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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대물 권하는 ‘변강쇠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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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8-1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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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지의 부족함을 남성의 결핍으로 내몰아… 허황한 욕망의 그림자를 지울 수 없나

사진/ <수정할까요#1>(염중호 작, 2002)
사람들은 저마다 다 가지고 있는 것을 굳이 없다고 한다. 사람들은 굳이 없다고 하면서도 수많은 이름을 붙여 굳이 어렵게들 말한다. 저마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저마다 다들 다르게 부르고 있는 이‘것’에 대하여 순 우리말로 부르기로 하자. 자지라고 말이다.

남자들이라면 직위를 막론하고 연령의 노소를 뛰어넘어, 또 머리에 든 것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히 제 마음속 깊은 곳에 어쩔 수 없는 강박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데, 크기와 굵기에 대한 턱없는 부족함과 모자란 결핍에 대한 뒤집힌 욕망이 그것이다. 자지의 크기에 대해서 말이다. 해서 은근짜하게 이 욕망에 불을 지피는 공개적인 유혹이 있으니, 현대 과학이 담보하는 즐거운 상상으로 버무린 허황된 갈망의 대상으로서의 ‘물건’으로 다시 태어나는 꿈이 그것이다. 거대하고 단단하며 사람의 것을 포기하는 큰 자지에 대한 환상 말이다.

부족함을 일깨우는 현란한 문구들


스포츠신문은 우리 사회에서 스포츠와 연예 혹은 연애에 대한 무궁무진한 정보를 퍼 담아내는 매우 귀중한 소식지임에 분명하다. 여기서 찾아본 ‘꿈★이 이루어지는’ 문구들은 다음과 같은 절묘한 ‘아름다움’이 늘 ‘부족함’에 호소하는 것들이다. “고개 숙인 남성, 최고의 남성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남성 확대- 둘레와 길이- 한번에 동시 수술”, “강한 남성을 만들어 드립니다”. 이와 같은 현란하고도 귀중한 정보로 들어찬 광고 문구들은 바로 의학이라는 안전장치를 통해 남성의 결핍을 보완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자지에 대한 망상을 합리화하는 데 진력을 다한다. 굳이 그 크기가 병적 대상이 되어 건강한 일상을 해치는 지경의 상황이 아닐지라도, 이미 병든 욕망은 치료의 필요성이 좀더 확고한 병력으로 변해서 이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귀한 정보들은 사실 모든 남성들에게 필수적인 현대사회의 정보가 아닐 수 없다. 맞다. 나도 강한 남성으로 만들어져 한번에 그것도 동시에 굵거나 커지는 자지를 가지고 싶다. 그래서 최고의 남성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

요즈음, 그러니까 나라가 온통 시장경제 원리에 몸을 허락하거나 그래야 한다고만 믿어버린 이후, 광고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하나같이 다시 태어난 강한 ‘것’이거나 ‘놈’들뿐이다. 그래서 부자아빠가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든지 공공연하게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마치 축원 드리듯 그렇게 조잘거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사이사이에는 꼭꼭 숨어 있지만 흉물스러운 몰골을 한 남근주의적 발상이 쉽게 드러나고 있다. 어쩌겠는가, 크고 굵은 자지를 가진 미국이(공교롭게도 우리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미국인은 대개가 남근주의의 대명사인 군과 속절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가늘고 약한 자지를 가진 우리에게 그 위용을 보이면서 제 잘난 척 다하는 꼴을 보면 우리도 빨리 다시 태어나 그들처럼 큰 ‘것’을 꼭 가져야 한다고 다시금 다짐하게 되는 것을. 당연히 부자아빠로 남기 위해 열심히 일하면 떠나야 할 판이니 투자하러 가는 편이 좋고, 꼭 필요한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사야 할 물건이 굳이 명품관의 빨간색 핸드백이고 보면 이 허황된 욕망의 늪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시장에 몸을 맡겼으니 성형을 해서라도 제대로 된 ‘물건’을 하나 떡하니 가지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아주 크고 대단히 굵은 자지로 말이다.

욕망의 늪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모름지기 예술은 사람들이 저마다 무엇이라고 하든 간에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자연스럽게 들여다보는, 관찰하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 그 결과를 표현이라는 방식으로 풀어낼 때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상상력을 토대로 하여 잠시 하나의 쟁점에 관심을 모으고는 그 진짜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예술은 그럴 때 비로소 사회적 쓰임새가 있게 된다. 영화감독 한분이 애써 관찰하고 이야기를 풀어낸 작품을 일반인은 볼 수 없게 되었다. 저마다 무엇이라 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볼 수 있으되(제한상영등급을 받았으니), 볼 수 없는(제한상영관이 없으니) 애매한 판정을 받았다. <죽어도 좋아>란 이 영화를 직접 볼 수 없는 나로서는 평자들의 글을 통해서만 알 수 있게 되었는데, 쟁점은 자지가 자지처럼 보인다든지 성교가 성교처럼 보인다는 데 있는 모양이다. 남자의 성적 징후들은 늘 당대의 권력과 동일시되어 있게 마련이어서 미국의 큰 자지와 함께 영화 한편에 대한 권력형 판단근거는 나에게 성형 뒤 다시 태어난 거대한 자지처럼 사람의 것을 포기한 단 하나의 모양으로만 비친다.

획일적인 가치판단은 대단한 제국주의적 발상이어서 모두가 그리 하면 안 된다고들 한다. 그런 사고방식은 이제 한심하다거나 그런 처신은 몹쓸 짓으로 보인다는 뜻일 게다. 당연히 다양한 가치가 존립하는 그런 사회에 대해 저마다 말을 보태게 되는데, 화이부동(和而不同)을 머리 속에 그리면서 그 조화롭고 평안한 관계의 꿈★이 이루어진다고 믿지는 왜 못하는 걸까? 우리는 왜 아직도 어떤 표준화를 갈망하고 지지하며 스스로를 그 안에 집어넣어 저마다 다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믿는 것일까? 왜 스스로 자존하는 데 그리도 강팍하고 야박할까? 국제화를 지향하는 사회에서 국제적 표준에 제 스스로를 맞추어야 한다고 믿는 어리숙함을 왜 우리는 바르게 꾸짖지 못하는 걸까?

획일화 잣대 버리고 ‘나를 나답게’

우리 사회가 미국 앞에서 한없이 위축된 왜소증으로 고민할 때, 정교한 관찰을 통해 인간의 다양한 삶의 틀을 보여주는 개성이 획일적인 판단 앞에서 나락으로 떨어질 때, 성형을 통해 한번에 그것도 동시에 두 가지를 충족시키는 모양으로 굳이 고치라고 하는 현란한 유혹에 정신이 몽롱할 때 분명히 나는 ‘나를 나로 있게’ 하는 개성 있는 자지로 남고 싶다. ‘무엇을 욕망한다는’ 행위와 결과가 친절한 도덕주의자들이 경고하듯 허망함에 노출될지라도 내 삶이 조금씩 그 욕망으로 인해 상승하는 것을 나는 알기에 누가 보아도 분명한 내 자지를 그대로 가지고 싶다. 저마다 다 다른 모양과 크기를 제 잘난 맛에 드러내고 비로소 저마다 다른 그러나 같은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그런 자지를 말이다. 열심히 일한 뒤 쉬고(결코 떠나지 않으며), 부자아빠가 되기 위해 내 육신의 노동을 의심하지 않는(결코 일확천금을 꿈꾸지 않는), 몸에 달라붙어 있는 작고 뒤틀린 그런 내 자지가 자랑스럽도록 말이다.

전시기획자·아트컨설팅서울 큐레이터 soplee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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