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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여성의 가슴은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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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7-3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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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은 성욕을 둘러싼 이중적 잣대… 성적 징후만 남은 욕망의 대상으로L

사진/ 염중호 작 <수정할까요>(2002).
“가슴이, 가슴이, 없어요…” 하며 익살을 부리는 한국방송 제2텔레비전 <개그콘서트>는 가슴에 대한 두 가지 편견이 빚은 억지웃음을 우리에게 유발한다. 신체의 일부분을 일컫는 용어로 쓰이는 가슴은 여기서 여성의 섹시함을 상징하는 유방을 가리키는 나름대로 점잖은 표현이다. 따라서 웃음의 시발은 짐짓 점잖을 떠는 유방에 대한 이 비약에 숨어 있다. 여성이 스스로 “내 가슴이 작은 것이 아니라 아예 없다”며 돌아선 뒤에, 어김없이 남성 코미디언이 나와서 똑같이 “내 가슴이…” 하며 윗옷을 벗어젖힌 후 진짜 가슴을 내보이며 준비된 다음 익살을 보여준다. 이때 남성의 가슴에는 젖꼭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그림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다. 이 황당한 웃음거리 속에는 여성의 유방과 남성의 젖이 완전히 다른 의미로 통용되는 동시에 나름대로 우리 사회에 있는 ‘용서한 성욕’에 대한 이중적 잣대가 숨어 있다.

여성의 유방과 남성의 젖은 다르다?

대체로 우리에게는 여성의 성적 매력의 징표로 유방이 가슴보다는 적절한 표현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하지만 대체로 그것을 가슴이라고 폭넓게 부르며 ‘가슴’이 빵빵하기를 은근히 바란다. 그걸 언뜻 큰 것처럼 보여주거나 그럴 만한 크기를 암시하는 표현에는 눈치볼 것 없이 즐거이 웃어버린다. 이때 분명하게, 한쪽에서는 짐짓 요망한 세태의 이러한 작태를 탓하게 마련인데, 이 경우에도 유방은 가슴이라는 말로 단호하게 대체된다. 사실 가슴을 ‘유방’으로 일컫는 것은 남성에게는 그리 어울리거나 적확한 표현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폭넓게 성적 징표로 여성의 가슴이 늘 ‘유방’의 뜻으로 불리는 것 또한 적절하지 않다. 유방(乳房)은 한자어 뜻대로 ‘젖이 담긴 곳’을 가리키니 말이다. 그렇다면 유방은 수유하는 어머니의 젖가슴에 딱 맞는 표현이다. 여성의 가슴은 자식을 기르고 보살피는 생명과 연관된 신체기관이지 성적 대상으로서의 유방은 아니다. 그럼에도 중성적 표현인 가슴을 짐짓 점잖은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유방을 성적 징후 가득한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이중성은 자기의 욕망과 관계없이 사회적 가치에 충실하려는 우리 안의 통념에서 나온다.


실제로 젖이 나오지 않는 생물학적 특성이 있는 남성은 ‘젖가슴’을 남성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 표현은 여성에게는 지나치게 관능적이며 여성성을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 되고 만다. 순우리말로서 유방을 대체하는 이 낱말을 우리가 문맥 없이 자연스럽게 쓰기란 실로 곤란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처럼 직설적인 욕망을 함께 작동하게 하는 표현들을 대다수 사람들은 성적 욕망의 한가운데 기꺼이 숨겨둔 채 즐겨쓰고 있다는 점이다(그런 신체 부위별 고유명사들은 실로 많다). 우리는 여성의 몸에서 쉽게 성적 욕망을 본다. 이 뒤틀린 이상한 발상은 최근에 들어서야(우리는 한 30여년쯤 되었나?), 여성의 사회적 발언이 정치성을 띠기 시작하면서 비판받으며 조금씩, 그러나 매우 느리게 교정되고 있다.

여성들은 그 유방이 ‘누구의 것인가?’ 묻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남성의 가슴과 젖꼭지가 가지는 건강함이나 당당함과, 여성의 젖가슴에 대한 거짓 해석과 몰이해는 그 간격을 전혀 좁히지 못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온갖 상품이 난무하는 시대에 각종 매체에서는 요즈음 더욱 이 간격을 완고하고도 불멸의 것으로 정착시키려는 듯하다. 아아, 왜 여성은 땀흘리며 일하고 운동할 때조차 남자처럼 윗옷을 벗지 못하는가?

여성들의 유방은 누구의 것인가

남성의 벗은 상반신, 그러니까 남자의 젖꼭지가 드러나는 사진이나 이미지를 우리는 도발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여성의 시각에서 그런 이미지가 성적 끌림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여성의 성욕에 관심이 없는 우리는 사회적으로 남성의 젖꼭지를 도덕을 위해 모자이크처리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 여성의 가슴은 항상 적당히 가린다. 그러나 여성의 특징으로 젖가슴이 거기에 있다는 암시를 끊임없이 드러낸다. 잡지나 TV에 수시로 등장하는 여성의 속옷광고에서나 여름철 피서지 풍경 운운하면서 방송되는 9시 뉴스에서도 상당 부분이 노출된 여성의 젖가슴을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만일 공중매체에서 여성의 젖모양이 다 나오는 불가피한 경우가 있다면, 분명 모자이크 처리라는 익숙한 안전장치를 쓴다. 우리는 그것이 젖가슴임을 알지만 다 보지 못한 것은 쉽게 용서한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모두 상상에 의해 만족해하며 우리의 욕망을 굳이 감추지 않음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사실 여성의 젖과 꼭지는 우리가 상상하듯이 그렇게 작은 자극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성감대가 아니다. 매우 친절하게 그리고 정성을 다해 자신이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하는 성희를 전제할 때만 여성의 젖꼭지는 성감대로서의 역할을 시작한다. 하지만 남성의 젖꼭지는 여성의 젖꼭지보다도 예민하게 성애에 민감하며 성희에 대한 반사 기능이 더 발달(?)되어 있다. 그럼에도 남성의 가슴이 아니라 여성의 크고 탄력 넘치는 가슴(유방)은 성적 의미를 가득 담고 대외적으로 감추되, 가능한 한 늘 쉽게 보이도록 사회적으로 장치되어 있다. 즉 남성의 가슴은 쉽게 드러내도 아무 불편 없이 유유히 도덕의 안전지대에서 욕망이라는 뜻과 거리를 둔다. 이 어처구니없는 여성과 남성의 가슴에 대한 몰이해가 가지는 간극 안에는 상상을 통해서 가슴의 의미를 규정해온 오랜 과정이 놓여 있다.

“욕망은 욕망을 갈망한다”라는 정직하지만 모호한 명제를 통해 우리는 매우 우아하게 욕망이 내 몸과 마음을 떠나 언어적 표현의 기능으로만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큰 가슴은 더 큰 가슴을 갈망한다’는 실질적인 우리의 욕망은 몸에 착 달라붙어 있어 그 오류의 시작과 끝을 가늠하기조차 힘들게 한다. 여기에는 어떤 시스템이 작동하는 것일까? 왜 신비한 수수께끼처럼 설명이 불가능한 지경으로 우리의 가슴은 내몰리게 되었을까?

몸을 용서하고 제자리에 놓으라

불과 100여년 전까지만 해도 아이를 키우는 여성이 젖가슴을 내놓고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그러나 욕망하는 대상 즉, 여성의 젖가슴이 남성에게 일차적인 성적 대상이 되어버린 지금, 그 사실이 젖가슴을 여성적 신체 특징으로 만들었다. 그 다음 절차로 더욱 크고 풍만한 유방이 욕망의 더 큰 만족 대상이 되며, 사회는 비판적 주권을 스스로 놓아버렸다. 당연히 남성적 우월주의가 이 수수께끼를 주도한다. 솔직히 나도 이 수수께끼에 낄낄거리며 동참하고 있다. 여성의 젖가슴을 여성 자신의 것으로 돌려주기에는 어느덧 내 머리와 욕망에는 단단하게 굳은살이 박혀 있고, 또 그것을 받아주는 용서받은 성욕이(그렇게 믿는 뜻이) 경계를 이루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남성이고 여성이기 전에 ‘인간’으로서 이보다 더 앞선 욕망이 몸을 용서하고 제자리에 돌려놓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굳이 ‘선을 추구해야 하는 노력’으로서 욕망을 끄집어내어 대응할 필요는 없다. 가슴이 유방이나 젖가슴이 되어도, 크기의 차이가 상상력을 구축하여도 가짜와 진짜는 몸이 나서서 가름하기 때문이다.

전시기획자·아트컨설팅서울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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