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구텐베르크 성서’ 활자로드의 비밀은?
‘직지의 날’ 프랑스 유네스코 본부에서 <직지> 복본 전시
<직지>의 얼을 잇는 공예비엔날레 청주 문화제조창서 10월15일까지
등록 : 2023-09-22 14:47 수정 : 2023-09-27 01:17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권하’(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券下), ‘선광칠년정사칠월 청주목외 흥덕사 주자 인시’(宣光七年丁巳七月淸州牧外 興德寺 鑄字印施)
세계가 인증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책 <직지심체요절> 하권 끝장(39장)에 나오는 글인데 풀어보면 이렇다. “(이 책은) 백운화상이 뽑은 부처, 조사의 `직지심체요절’이라는 책의 하권인데, 선광 7년(1377년) 정사년 7월 청주목 외곽 흥덕사에서 활자를 만들어 인쇄했다.” 특히 ‘선광칠년 정사칠월 청주목외 흥덕사 주자 인시’는 위대한 기록이다. 이 열아홉자는 <직지>가 서양 최고 금속활자본 독일 <구텐베르크 성서>(1455년 간행)보다 78년 앞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책이라는 것을 인증했다.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열린 직지 특별전. 청주시 제공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활자를 만들어 인쇄했다”
유네스코는 2001년 9월4일 <직지>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했고, <직지> 본향 충북 청주는 이날을 ‘직지의 날’로 정했다. 청주시는 2023년 9월4일 직지의 날을 맞아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직지와 한지: 한국의 인쇄 및 종이유산’ 특별전을 열어 세계에 <직지>를 새겼다.
특별전에선 <직지> 복본을 전시했다. 복본은 종이 질, 먹 성분, 오염 상태 등을 분석해 원본처럼 복원하는 3차원적 복제본이다. 청주고인쇄박물관은 2021~202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원 등과 공동연구를 통해 <직지>가 평량(종이 두께·무게) 27.5±2.5g/㎡, 백색도 60% 전통 한지에 카본이 주성분인 먹으로 찍은 것을 확인하고, <직지> 복본을 제작했다.
복본을 전시한 것은 우리에게 원본이 없기 때문이다. 세계 유일의 <직지> 원본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하권 한 권만 있다. 워낙 귀한 자료여서 자주 공개하지도 않는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은 1972년 ‘세계 도서의 해 특별전’ 때 <직지>의 존재를 알린 데 이어, 이듬해 ‘동양의 보물 특별전’ 때 잠시 공개했다. 이후 베일에 싸였던 <직지>는 2023년 4~7월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 특별전’ 때 50년 만에 세상에 다시 나왔다. 이 특별전에 초대된 이범석 청주시장은 “50년 만에 공개된 <직지>를 만나 감개무량하다”고 밝혔다.
금속활자 인쇄는 정보통신의 혁신으로 불린다. 서양은 성경, 동양은 불경 간행 등 활자문화를 통해 지식·정보가 폭발했는데 금속활자가 촉매 구실을 했다. 황정하 세계직지문화협회 사무총장은 “세계인쇄문화사에서 검증되진 않았지만 <직지>-<구텐베르크 성서> 사이에 금속활자 인쇄 정보가 교환됐을 수도 있다. 실크로드를 통해 ‘활자로드’가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도서번호 109, 기증번호 9832’. 우리 것이지만 우리 것이 아닌,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에 있는 <직지>의 주소다. 프랑스로 간 <직지>의 이력은 표지에 남았다. <직지> 표제 옆 ‘711’은 경매 번호다.
1886년 한불수호조약 뒤 초대·3대 공사를 지낸 콜랭 드 플랑시가 <직지>를 수집해 프랑스로 가져간 뒤 1911년 3월 파리 경매장에 내놨는데, 이때 골동품 수집상 앙리 베베르가 180프랑을 주고 샀다. 앙리 베베르는 1952년 <직지>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했고, 도서관은 표지 아래쪽에 한국 서적 109번 뜻을 담은 도장 ‘COREEN 109’를 찍었다.
최초 금속활자 책일 뿐 아니라 내용의 가치도 커
<직지>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서 가치도 크지만 책 자체 가치도 빼어나다. <직지>의 본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다. 고려말 백운 화상 경한(1299~1374) 스님이 부처·선사·조사 등의 가르침 가운데 주요 부분을 가려 기록한 책이라는 뜻을 담았다. 불가에 전해지는 <불조직지심체요절>이란 책을 초록했다는 설도 있다. <직지 강설>을 펴낸 무비 스님은 <직지>를 두고, ‘선불교 최고의 교과서’라고 했으며, 도올 김용옥 선생은 “직지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히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서가 아니라 내용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 책 <직지>를 다시 가져올 순 없을까? 답은 ‘Non’(안 돼)이다. 그동안 수차례 요구했지만 프랑스 국립도서관 쪽은 반환은커녕 대여조차 거절한다. <직지>의 가치가 그만큼 크다는 것이다.
<직지> 본향 청주는 위대한 공예품 <직지>의 얼을 공예비엔날레로 잇는다. 1999년부터 홀수 해마다 여는 비엔날레는 12번째다. 2023 청주공예비엔날레는 9월1일 개막해 ‘사물의 지도-공예 세상을 잇고, 만들고, 사랑하라’를 주제로 10월15일까지 45일 동안 펼쳐진다.
2023 청주공예비엔날레 주 무대 청주 문화제조창. 청주시 제공
청주공예비엔날레 주 무대인 문화제조창에 마련된 옛 연초제조창의 흔적. 오윤주 기자
비엔날레 주 무대가 뜻깊다. 청주 내덕동 문화제조창과 동부창고 일원인데, 전엔 청주연초제조창이었다.
청주연초제조창은 1946년 11월 경성 전매국 청주 연초공장으로 출발해 1999년 제조창 안 담배원료 공장 폐쇄에 이어 2004년 12월 완전히 문 닫을 때까지 58년 동안 운영됐다. 노동자 2천~3천 명이 현란한 손기술로 해마다 담배 100억 개비를 생산하던 한국 최대 담배공장이었다. 건물만 24동에 면적은 12만2181㎡에 이른다.
청주공예비엔날레 주 무대인 문화제조창 황란씨의 작품 앞에서 벌어진 춤 공연. 청주공예비엔날레 조직위원회 제공
한 시민이 2023 청주공예비엔날레를 관람하고 있다. 오윤주 기자
시민들이 2023 청주공예비엔날레를 관람하고 있다. 오윤주 기자
옛 제조창은 이제 문화공간이다. 본관동(5만1515㎡)은 문화제조창으로, 남동관(1만9856㎡)은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으로 거듭났다. 본관동은 천장 높이 6.5m, 바닥 면적 9천㎡, 길이 180m 등 옛 모습을 그대로 살려 어떤 규모의 작품도 수용한다. 청주는 이곳을 화력발전소에서 세계적 미술관으로 거듭난 영국 테이트모던, 기차역이었던 프랑스 오르세미술관, 방적 공장이었던 독일 슈피너라이에 버금가는 문화 명소로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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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청주비엔날레에선 정열의 스페인 공예가 눈길을 끈다. 이번 비엔날레 주빈국 스페인은 공예진흥원 푼데스아르테 등이 영혼과 물질을 주제로 150여 점을 출품했다. 때마침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은 ‘피카소 도예 특별전’을 진행하는데,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기증한 피카소 도예 108점이 선보인다. 이웃 동부창고 등에선 플라멩코 공연, 스페인 문화 강연 등을 곁들인 스페인 문화주간 행사도 이어진다.
문화제조창 3층에선 ‘대지와 호흡하며 함께하는 사물들’ ‘인간-자연-사물을 연결하는 문화적 유전자와 맥락들’ 등 5가지 구성으로 18개국, 작가 63명(팀 96명)의 작품이 전시된다. 고혜정 작가의 ‘The Wishes’ 등 2023 청주국제공예 공모전 수상작 전시,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 등이 선보이는 미디어아트, 공예·예술 전문가가 참여하는 학술행사, 시민 참여형 비엔날레 ‘어마어마 페스티벌’, 조소·회화·서예 등 작가 60명이 참여하는 ‘작가들의 사물전’, 공연 등도 이어진다. 강재영 청주공예비엔날레 예술감독은 “청주비엔날레가 공예를 통해 이 시대를 반성하고, 미래를 상상하고, 일상에서 실천을 모색하는 새로운 문명의 지도가 되길 기원한다”고 밝혔다.
청주=오윤주 기자 sting@hani.co.kr*명절마다 전국 각 지역의 따끈따끈한 이슈를 <한겨레> 전국부 기자들이 전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