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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일제의 침략으로 끊긴, 서울의 옛 삼남길을 걷다

조선 한양도성에서 충청·전라·경상으로 향했던 ‘삼남길’은 고려 않고
일제 침략으로 만들어진 서울역~한강대교 잇는 길이 ‘국가 상징 거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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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3-06-23 13:15 수정 : 2023-06-28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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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쪽으로 가는 삼남길은 숭례문에서 출발해 서울역을 관통한 뒤 청파로로 넘어간다. 숭례문의 홍예문 안에서 바라본 삼남길의 모습. 김규원 선임기자.

“숭례문 남쪽으로 이문동을 지나 배다리(주교), 청파역, 돌모루참(석우참)까지 4리이고, 와요현(기와가마고개), 밥전거리(반전거리)를 지나 동작나루에 이르기를 8리, 숭례문에서는 12리 거리이다. 8대로를 보라.” ― 김정호, <대동지지>, 1866년

“청파 역졸 분부하고 남대문 썩 나서서 전라도로 나려간다. 칠패 팔패, 이문골, 도저골, 쪽다리 지나 청파 배다리, 돌모루, 밥전거리, 모래톱 지나 동자기 바삐 건너….” ―이광수, <일설 춘향전>, 1929년

한강대로 ‘국가 상징 거리’ 조성 타당한가

2022년 10월 프랑스 파리를 방문한 오세훈 서울시장은 서울 광화문에서 한강을 잇는 7㎞ 구간을 파리 샹젤리제 거리처럼 ‘국가 상징 거리’로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광화문~숭례문~서울역~한강대교 구간은 과거에도 여러 중앙정부나 서울시에서 ‘국가 상징 거리’로 만들겠다고 발표해온 곳이다. 그만큼 서울시 안에서 상징성이나 중심성이 강한 곳이다.

그러나 광화문~한강대교 구간은 역사적으로 국가나 서울시의 중심축이 되기엔 조금 개운치 않다. 왜냐하면 이 가운데 서울역~한강대교 구간은 조선 때 없었던 길이기 때문이다. 일제가 서울 남쪽 둔지산 지역에 용산기지와 용산역을 설치하면서 1906년 새로 놓은 길이다.

원래 서울에서 남쪽으로 가는 길은 세 갈래인데 삼남길(해남길), 동래길, 수원길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서울에서 남쪽으로 가는 옛길을 찾아 걸어보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이 운동을 벌이는 김천수 용산학연구센터장과 함께 세 갈래 길 가운데 삼남길을 걸어봤다. 삼남이란 충청, 전라, 경상을 말한다.

삼남길은 신경준의 <도로고>에 ‘삼남로’, 김정호의 <대동지지>에 ‘8대로’(해남길), 김정호의 <경조5부도>에 ‘과천로’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춘향전>에서 이몽룡의 암행어사길,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백의종군길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출발해 경기와 충청을 거쳐 호남의 땅끝 해남까지 가는 길이다. 이 길의 서울 구간은 맨 앞에서 본 것처럼 김정호의 <대동지지>와 이광수의 <일설 춘향전>에 잘 나온다.

삼남길의 출발점은 숭례문(남대문)이다. 숭례문은 김정호가 정한 10대로 가운데 8대로(해남길)와 4대로(동래길), 7대로(수원길) 등 3개 대로가 시작하는 곳이다. 도성 안에서 숭례문을 통해 도성 밖으로 출발해보자. 돌로 만든 홍예문(무지개문)을 통과하면 과연 도성을 나선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숭례문 홍예문 안에 서면 두 방향을 봐야 한다. 하나는 도성 안의 큰길인 남대문로다. 숭례문은 남대문로를 향해 있고, 태평로(현 세종대로)를 향해 있지 않다. 조선 전기엔 경복궁~황토현(세종대로 네거리)~종루(보신각)~광통교~구리개(을지로1가)~숭례문이 서울의 제1대로였다. 후기엔 창덕궁~종로3가 네거리~종루~숭례문이 제1대로였다.

청파역(숙대입구역) 부근에서 청파 배다리 쪽을 바라본 모습. 김규원 선임기자.

남대문에서 세 갈래 남행길이 시작돼

숭례문 홍예문 안에서 밖을 보면 보행 고가 ‘서울로7017’과 옛 서울역이 정면에 보인다. 삼남길은 이 방향으로 뻗어 있었다. 숭례문에서 서울역으로 가는 길은 고생스럽다. 가장 옛길에 가까운 경로는 <한국일보> 쪽으로 길을 건너 걸어가는 것인데, <한국일보> 쪽에서 서울역 쪽으로 건널목이 없어 지하도를 통해야 한다. 아니면 연세대세브란스빌딩 앞에서 서울로7017로 올라가 서울역 광장 쪽으로 내려와야 한다.

서울역 광장에서 삼남길은 사라진다. 삼남길은 현재의 서울역을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비스듬히 관통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재의 서울역과 철도 부지는 1902년 삼남길과 만초천 위에 들어선 것이다. 특히 현재 서울역의 플랫폼 남쪽 철로 부근에 ‘청파 배다리(주교)’라는 유명한 다리가 있었다. 청파 배다리는 삼남길이 만초천을 건너는 곳에 있었는데, 서울을 들고 나는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만초천은 무악(안산)과 인왕산에서 흘러나와 의주로, 서울역, 청파로, 전자상가, 용산나루(원효대교 북쪽)로 흐르던 하천이다. 대체로 청파 배다리 상류는 무악천, 그 하류는 만초천으로 볼 수 있다.

청파 배다리에 대해선 큰 논란이 있다. 과연 이 다리가 배다리였는지, 아니면 돌다리였는지다. 조선 초기 성현이 지은 <허백당집>의 ‘청파 석교기’를 보면, 청파의 다리는 ‘배다리’가 아니라 ‘돌다리’였다. 연산군 시절인 1497년 돌로 몇 칸의 ‘홍예교’(무지개다리, 아치다리)를 세웠다고 명확히 나온다. 김천수 센터장은 “배다리가 있다가 돌다리로 바뀌는 것이 상식적인데, 오히려 조선 초기엔 돌다리, 조선 후기엔 배다리로 나와 어떻게 된 일인지 정확히 모르겠다”고 말했다.

삼남길은 서울역을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관통해 청파동 삼거리 굴다리(갈월가도교) 조금 못 미쳐 청파약손한의원 부근에서 현재의 청파로로 나온다. 여기서 청파로를 따라 600m 내려가면 청파동 주민센터가 나오는데, 이 일대가 조선 때 ‘청파역’이 있던 곳이다. 청파역은 삼남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마지막 거점으로, 이 일대에 넓게 자리잡고 있었다.

청파역은 고려 때 처음 설치됐고, 조선 때는 동북부의 노원역과 함께 가장 중요한 역이었다. 두 역에 소속된 말이 모두 100~160마리였다고 한다. 조선 때 청파역의 동쪽에 만초천이 흐르고, 서쪽에는 느리고 푸른 언덕(청파)이 펼쳐져 있었다. 말을 먹이기에 아주 좋은 위치다. 이 언덕은 긴 용산 줄기의 한 대목이다.

돌모루에서 삼각지역 쪽으로 가던 삼남길은 경인철도가 놓이면서 끊겼다. 김규원 선임기자.

청파역은 조선의 교통·통신·물류 거점

조선 태종 때 만초천을 운하로 개발하자는 의견이 나왔는데, 이 또한 청파역과 남대문을 고려한 것이었다. 현재의 청파동 언덕을 넘어가면 효창원 아래 금양초등학교(옛 용산보통학교) 자리에 만리창이란 대규모 국가 창고도 있었다. 남대문의 바로 남쪽에 청파역이나 서울역이 들어선 것은 공간적으로 같은 맥락이다. 서울역과 청파역 일대는 서울 도성 바로 남쪽의 교통, 통신, 물류의 중심이었다. 이런 역사를 고려했다면 청파역 부근의 숙대입구역(갈월)의 이름은 마땅히 청파역이 돼야 했다.

청파동 주민센터에서 남쪽으로 400m 정도 더 내려가면 남영역 네거리인데, 이 곳이 삼남으로 가는 길의 큰 갈림목인 ‘돌모루참’이다. 돌모루는 돌모퉁이라는 뜻인데, 청파 배다리나 청파역과 마찬가지로 서울 남쪽의 대표적인 랜드마크였다. 현재 돌모루참 터엔 ‘용산다올노블리움’이란 오피스텔이 들어서 있다. 조선 때 여기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뉘었다. 삼남길인 해남길(8대로)과 동래길(4대로)은 옛 ‘캠프 킴’을 관통해 삼각지까지 가고, 오른쪽 원효로는 수원 화성으로 가는 수원길(7대로)이었다. 삼남길은 철길이 들어서면서 완전히 사라졌고, 철로 옆 청파로나 남영역 굴다리길, 한강대로 등이 새로 생겼다.

‘남영역’이란 지명은 일제의 찌꺼기로 바로잡아야 마땅하다. 남영동 일대는 일제 때 바로 옆에 용산 연병장(용산기지)이 있다고 해서 ‘연병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해방 뒤 이를 고치면서 사실상 이를 계승한 ‘남영동’(서울 남쪽 부대 동네)이란 지명을 붙였다. 남영역이란 철도역 이름도 여기서 나왔다. 이제라도 남영동은 ‘돌모루동’, 남영역은 ‘돌모루역’으로 바꾸면 어떨까?

남영동 굴다리를 지나 오른쪽으로 돌아 한강대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옛 ‘캠프 킴’ 남쪽 모서리에 난간 엄지기둥과 견치석(마름모쌓기) 제방이 눈에 띈다. 이곳에 동서로 흐르는 하천을 남북으로 건너는 다리가 있었는데, 이제는 하천이 덮여 난간 엄지기둥 하나만 남았다. 일제 때 이 하천의 이름은 고바야카와(小早川), 이 다리의 이름은 고바야카와 다리였다. 임진왜란 때 6군 사령관으로 참전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를 기념해 붙인 것이었다.

김천수 센터장은 “이 하천은 남산의 이태원 부근에서 시작해 용산기지의 메인 포스트를 관통한 뒤 만초천으로 합류한다. 일제는 ‘고바야카와’라고 불렀고, 현재는 ‘만초천 지류’라고 부른다. 그러나 무악과 인왕산에서 나온 만초천과 달리 남산 이태원 쪽에서 나왔으므로 ‘만초천 지류’가 아니라 ‘이태원천’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했다.

삼각지역 식당거리는 동작나루로 가는 삼남길인데, 대통령실과 국방부에 막혀있다. 김규원 선임기자.

삼각지 네거리에서 국방부 쪽으로 건너면 여기저기 대통령실 경비 경찰관들이 눈에 띈다. 우리은행 골목(한강대로62길)으로 들어서면 곧은길이 멀리까지 뻗어 있다. 철길로 인해 돌모루에서 삼각지까지 끊긴 옛길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이 길은 삼각맨션 부근에서 세거리가 되는데, 왼쪽 길(한강대로62다길)이 동래길의 출발점이다. 통상 동래길은 남대문~남관왕묘(남묘)~우수재(소머리고개)~전생서~남단(남쪽 제단)~이태원~서빙고나루로 알려졌다. 그러나 김정호는 <대동지지>에서 동래길이 돌모루에서 둔지산(용산기지 안 야산)을 지나 서빙고나루로 간다고 명확히 적어놓았다. 통상 동래길로 알려진 남묘~이태원~서빙고 길은 ‘지름길’이라고 적었다.

김천수 센터장은 “김정호는 수원길뿐 아니라, 동래길도 해남길에서 갈리는 것으로 인식했다. 아마도 청파 배다리와 청파역, 돌모루참을 지나는 길을 삼남으로 가는 제1도로로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통신사는 통상 청파역을 거치지 않고 바로 남묘를 거쳐 이태원으로 넘어갔다”고 말했다.

대통령실·국방부에 막힌 해남길~동래길

이 세거리에서 왼쪽 동래길로 2㎞를 더 가면 서빙고나루가 나온다. 그러나 현재는 대통령실과 국방부에 막혀 있다. 이제 수원길과 동래길이 떨어져나간 해남길은 세거리에서 직진으로 계속 내려간다. 그러나 이 길 역시 250m 남쪽에서 대통령실과 국방부에 막혀 있다. 여기부터 동작나루가 있던 이촌역까지는 1㎞ 정도다.

여기서 대통령실과 국방부 서문 쪽으로 가면 군 천주교 성당 입구에 ‘왜고개 성지 터’ 표지판을 찾아볼 수 있다. 천주교 박해 때 순교한 신부 6명과 신자 3명이 이 언덕에 묻혀 있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왜고개는 이곳의 옛 지명인데, 와요현(또는 와서현)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2023년 6월13일 김천수 용산학연구센터장이 왜고개 성지 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규원 선임기자

여기서 동작나루로 가려면 한강대로나 아모레퍼시픽 본사 건물 뒤쪽 길로 돌아가야 한다. 아모레퍼시픽 남쪽의 세계일보사와 용산철도고등학교, 용산역사박물관 일대가 옛 와서(기와관청) 터로 추정된다.

서빙고로를 따라 이촌역으로 가다보면 경찰관이 눈에 많이 띄는데, 바로 대통령실 주출입구(옛 미군기지 13번 게이트)다. 한강대로62길에서 끊긴 해남길은 이 주출입구 부근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맞은편 경의중앙선 이촌역 부근이 옛 동작나루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작나루 부근에 있던 밥전거리(식당거리)는 대통령실 주출입구 안쪽에 있던 옛 둔지미 마을로 추정해볼 수 있다.

이촌역 너머의 이촌동은 1차 한강 개발 이전엔 백사장으로 큰비가 오면 물에 잠기는 곳이었다. 큰비가 오지 않는 계절에만 사람이 살 수 있었다. 이촌동(二村洞)이란 이름은 원래 비가 오면 침수를 피해 이주하는 마을이라는 뜻의 이촌동(移村洞)에서 나왔다.

이촌역 부근에 옛 동작나루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규원 선임기자

경의중앙선 이촌역 부근이 옛 동작나루

이촌역 부근에 있던 동작나루의 원래 이름은 ‘동재기나루’였는데, 그 뜻은 분명하지 않다. 동작나루는 한강의 남북에 모두 있었는데 현재는 한강 북쪽은 이촌동, 남쪽은 동작동이 됐다.

여기서 서쪽으로 1.3㎞ 가면 노들나루(노량진, 한강대교 북쪽)가 나오고, 동쪽으로 1.3㎞ 가면 서빙고나루(반포대교 북쪽), 거기서 다시 1.9㎞를 더 가면 한강나루(한남대교 북쪽)가 나온다. 이촌역 부근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면 옛 과천이고, 계속 남쪽으로 가면 해남에 이른다.

글·사진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서울의 옛 삼남길 지도. 인포그래픽 장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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