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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조선이 사라진 시대, 조선인으로 남은 사람들을 그리다

금희·전춘화 중국동포 작가 인터뷰
한글로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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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3-04-21 18:50 수정 : 2023-04-25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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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춘화 작가.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그 자체일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이’와 ‘저’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회색지대들, 그 지대마다 완전히 그 지대에 속하는 것들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두 개의 완전수 사이에 확실하게 존재하는 무수한 소수들처럼. (금희 소설 ‘세상에 없는 나의 집’)

이주민의 후손으로 태어난다는 건 처음부터 ‘나의 집이 어디인지’ 물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나는 것이었다. 중국동포(조선족·우리 한민족 혈통을 가진 중국 국적의 소수민족) 작가 금희는 소설집 <세상에 없는 나의 집>(창비 펴냄, 2015년)의 표제작 ‘세상에 없는 나의 집’에서 ‘매번 어느 누구하고도 같지 않은 나 자신을 더 또렷이 느끼곤 했던’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그렸다. 중국동포라면 크게 공감할 만한 이야기면서도, 그들에게만 유효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소설 속 표현처럼 실은 대부분의 사람 역시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모두들 저마끔(‘저마다’의 조선말) 누군가에게 떠밀려 평형을 잃고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선’ 채로 그의 소설에 공감했다.

금희 작가가 이 소설집으로 신동엽문학상(2016년)을 받은 지 7년여가 지났다. 서점 매대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중국동포 작가의 우리말 소설집이 또 하나 등장했다. 이번엔 연변 조선족자치주에서 나고 자라 한국으로 온 30대 작가, 전춘화의 소설집 <야버즈>(호밀밭 펴냄, 2023년 3월)다. 그의 소설은, 한국에 사는 한국인이라면 좀처럼 자신을 이입해보지 않았던, 닮고도 다른 ‘조선족’에 우리 자신을 이입시킨다.

사실은 이상한 일이다. 중국 땅에서 동포 3세, 4세로 태어난 중국 국적 작가가 우리말로 소설을 쓴다는 건. 조선이 사라진 시대, 간도 땅에서 조선인으로 태어나 글을 쓴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2023년 3월30일 줌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중국 창춘에 머무는 금희 작가의 말투는 차분하면서도 다정했고, 한국에 온 지 10년이 된 전춘화 작가의 말투는 그보다 좀더 발랄하고 한국식 억양과 닮았다. 전 작가와는 4월10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한 번 더 만났다.

금희 작가. 한겨레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동포 3세가 한글로 소설 쓰는 이유

―재미동포, 재일동포를 떠올려보면 이주민의 후손은 그 땅의 언어로 글을 쓰는 게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싶었다. 왜 한글로 소설을 쓰는지 궁금했다.

전춘화 중국 연변 조선족자치주에서 자라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과에 들어가면서 한국에 왔다. 연변엔 사실 한족보다 조선족이 훨씬 많고, 내가 다닌 연변대학 조문학부도 한국으로 치면 국어국문학과였다.

돌아보면 책 읽는 걸 좋아했다. 어린 시절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이 펄 벅의 <대지>였는데, 외국 여성이 중국 질곡사를 썼다는 데 놀랐다. 웃기지만 나는 중국 한족 옆에 살면서 한족의 정서를 그 책을 통해 배웠다. ‘나도 책을 잘 쓰면 누군가 조선인의 정서를 이해할 수 있겠구나, 펄 벅은 한족 이야기를 쓰는데 나는 왜 내 민족을 대변 못할까’ 이런 생각을 했다.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다. 공무원이던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월급날이면 한글 서적을 꼭 두 권씩 사주셨다. 지금도 기억나는 게, 어릴 때 서점 2층에 한글로 된 책이 몇 권인지 세봤는데 어린이용 도서가 36권 정도 있었다. ‘한 달에 두 권씩이면 금방 다 보겠는데 어떻게 하지’ 이런 걱정을 했다. ‘지현아 생일 축하해’ 같은 글이 적힌, 신경숙·이문열·황석영 등 한국 작가들의 중고책을 동네 작은 책방에서 찾아 읽었다.

금희 나는 연변이 아니라 마을만 벗어나면 다 중국인인 산거지역(조선족이 드문 곳. 반대말은 집거지역), 창춘의 작은 조선족 마을에서 태어났다. 세상엔 원래 한글로 된 간판 같은 건 없는 줄 알고 자랐다. 연변대학 사범대에 처음 들어갔을 때 가장 놀란 건 거리마다 조선어 간판이 있다는 점이었다.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그래도 교원이던 어머니가 책장에 한글로 된 책을 할 수 있는 한 많이 모아주셨다. 초등학교 1학년 겨우 한글을 깨쳤을 때 찬장 안의 책들을 하나씩 뽑아 보는 게 즐거웠다. 아이들에겐 사실 맞지 않는 <아라비안 나인트> <노인과 바다> <검은 고양이> <왕자의 눈물> 같은 것이었다. 때론 내가 쓰는 언어가 네티즌 댓글보다 못한 느낌이어서 ‘이렇게 척박한 땅에서 나온 메마른 언어로 무슨 작가냐’ 생각하기도 했다. 언어의 기술이랄까, 언어의 풍성함을 갖추지 못한 나 자신과 싸움을 벌였다. 그런데 윤동주 시인을 보니 그를 둘러싼 토양(윤동주의 고향은 중국 북간도, 현재의 연변 조선족자치주에 있다)도 풍성하지 않았더라. 윤동주 시인은 ‘더욱 소박한 언어로 표현하리라’는 걸 추구했다. 꼭 화려한 말만이 심금을 울리는 건 아니지 않을까 생각했다.

‘대림동의 조선족’ 그 이후 이야기

―1979년생(금희 작가), 1987년생(전춘화 작가)인데, 동시대 한국인과 자라온 환경이 굉장히 다를 것 같다.

전춘화 한국인인 남편에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면 ‘뭔가 우리 어머니 시대 얘기 같은데’(웃음)라며 저를 놀린다. 어릴 때 김장하면 냉장고가 없어서 땅을 파서 김치를 보관했다. 가로등이 없으니 엄마가 땅속으로 사다리를 타고 김칫독에 김치를 꺼내러 가면 무섭지 않나. 그럼 내가 따라가 전등을 비춰주고 엄마가 김치를 꺼내곤 했다. 물론 지금 한국에 사는 젊은 조선족은 ‘대림’으로 상징되는 부모 세대와 많이 다르다. 우리 부모 세대가 고생해서 돈을 번 덕에 한국에서 대학원도 다니면서 학위를 취득한다. 사실 ‘번역’이 제일 만만해서 번역일을 많이들 한다.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시민단체에서 동포들을 취재하는 일도 잠깐 했다.

오 여사라는 호칭을 처음 들었을 때 엄마는 양꼬치 가게에서 후식 냉면을 먹고 있는 내게 전화해 20년 무명 경력 끝에 빛을 본 여배우가 수상 소감을 말하듯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진정하며 속삭였다. “이제 난 오 여사다.” (전춘화 소설 ‘블링블링 오 여사’)

딸을 뒷바라지하러 한국에 와 간병일을 하는 조선족 중장년 여성의 이야기는 전 작가의 어머니를 모티프로 쓴 이야기다. 소설 속 조선족 간병인 오봉선씨는 ‘서울시 은평구 모 은행에서 과장으로 일한다는 많이 배우신 분’에게 ‘여사’ 호칭을 듣고 설레기도 하고, 어느 날 갑자기 교체 통보를 듣고 눈물을 떨구기도 한다. 교체된 것이 슬퍼서가 아니라 ‘배우신 분’의 아이, 택시에 치여 다리가 마비된 소녀와의 깊어진 관계 때문이었다. 계산하면서도 걱정하고, 연민하면서도 상처받는 오 여사의 모습은 평범한 우리 삶과 닮았다.

“엄마, 중국 사람들은 감정이 상했을 때 기분 나쁘게 뭘 째려봐, 하면서 공격적인 언어를 날리고 표정을 험하게 일그러뜨리지? 한국 사람들은 아니야. 같이 화내지 않고, 같은 감정을 공유하지 않음으로써 싸울 때도 갑의 위치에 서려고 할 때가 있지. 차라리 같이 화내고 소리 지르고 싸우면 덜 상처받겠는데 말이야.” (전춘화 소설 ‘블링블링 오 여사’)

금희 어릴 땐 그런 기대를 좀 했다. 내가 사는 동네는 나가면 다 중국인이었으니까 ‘나랑 같은 동족의 나라에 들어가면 어떤 느낌일까’ 상상하면 너무 기대됐고 좋았다. ‘서로 다른 민족이라 통하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 이질적인 문제로 인한 갈등이 없겠지?’ 생각하면서. 연변 같은 집거지역과 또 다른 게, 산거지역에 사는 조선족은 우애가 대단하다. 기차를 타면 모르는 사람이라도 조선말을 쓰면 음식을 나눠 먹었다.

그러다 연변대학 사범대를 나와 초등학교 선생님이 됐고 나중엔 톈진에 가서 한국 기업을 다녔다. 그 무렵 첫아이를 낳고 한국에 갔다. 들어갈 땐 합법 신분이었는데 비자가 만료되면서 문제가 생겼다. 불법 신분으로 잠시 머무르면서 굉장히 힘든 시간을 겪었다. 식당일, 모텔일, 청소일을 한 적도 있고 한국 아이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어릴 때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저쪽의 중국 한족, 이쪽의 조선족이 참 많이 싸웠다. 그냥 싫어서 싸웠다. 그러나 솔직히 그것은 어떤 차별의 느낌은 아니었다. 반면 한국에선 민족 간 싸움은 없지만 ‘개인 대 개인’ 혹은 ‘이익 대 이익’으로서의 갈등이 많음을 느꼈다. 민족의 관계보다 자본주의적 관계가 더 많으니까. 그러면서 어린 시절의 환상은 좀 깨져갔다.

조상이 떠나온 고국은 분단 전 ‘조선’

“내는 머 목사가 맨날 말하는 믿음이란 게 어떤 거인디 그딴 거 잘 모르는데, 기래도 이거는 압네다. 한 사람이 어떻다는 거이는 하느님만 아시디, 딴 사람들으는 다 모른다는 거이요. 안 기래요, 집사님?” (금희 소설 ‘옥화’)

북한을 탈출해 중국으로 온 ‘여자’는, 조선족 교회 커뮤니티 안에서 성가신 존재가 된다. 교회 여기저기서 돈을 빌렸고, 도움에 고마워할 줄 몰랐다. “물론 이웃을 도우라고 하나님이 그러셨지만, 우리가 모든 사람들 다 도울 수 있는 게 아니니까”란 어느 교회 지인의 말은 정당해 보였다. 사람들이 보내는 혐오의 시선에 여자는 항변한다. 두만강을 헤엄쳐 건너와 ‘사람 장사꾼’에게 붙잡혔고, 연변이나 조선족 동네가 아닌 허베이성 산골 오지에 팔려간 여자였다. ‘내 배로 낳은 내 아새끼도 내삐리고 도망친 사람’의 삶이라지만 진정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하나님’ 말고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금희 소설 ‘옥화’에는 탈북민에 대한 내 생각이 거의 다 들어 있다. 탈북민을 처음 봤을 때 우리가 느꼈던 반가움이랄까, 같은 조선말을 하는 데서 오는 호기심과 친밀감 이런 것이 있다. 하지만 가치관, 생활환경이 너무 많이 달라졌으니 탈북민과 조선족 사이에 우리 개인의 힘으로 넘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래도 어쨌든 조선족 입장에선, 우리 조상이 떠나온 고국은 분단 전 하나였던 ‘조선’이었으니 우리 모국을 봤으면 좋겠다는 소망은 있다.

전춘화 금희 작가님 말씀처럼 사실 우리 조상은 남북이 합쳐져 있을 때의 ‘조선’을 빠져나온 거다. 내 고조할아버지는 조선의 북쪽 지방에 살던 분이라고 한다. 농사지으면 일본군에게 뺏기곤 하니 너무 화가 나 ‘착취를 안 당하는 땅으로 가자’ ‘척박한 땅도 일굴 수 있다’는 생각으로 피난을 떠났다. 총소리가 멈출 때까지 세 번을 옮겼단다. ‘하찮은 삶은 건드리지 않기 때문에 깊이 들어가자’ 해서 시골까지 갔다. 통일 얘길 하면 정치적 성향으로 판단하려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게 아니라 개인적 경험 때문에라도 조선족이 북한을 바라보는 시선은 좀 다르다. 연변 지역에는 탈북한 어린 여성이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은 경우가 있다. 그들은 한국이나 제3의 나라로 탈출을 꿈꾸며 연변을 경과지로 여겼지만, 정작 시골 노총각에게 팔려 발목이 잡히기도 한다. 그런 부분이 서글프고 마음 아팠다.

금희 할아버지는 경상남도 분이셨다. 어렸을 때 부모님 따라 러시아로 갔다고 한다. 지금은 고려인이라고 부르지만 그때는 다 조선인이라고 했다. 군대로 들어가 김일성 수하에도 있었고 조선어와 중국어, 러시아어에 다 능통해 정보원으로도 활약했던 거 같다. 사령까지 올라갔다가 북한 대사로 중국 선양 대사관에 왔는데 이후 당정에서 사건이 벌어져 좌천됐다. 모든 걸 뺏기고 도망쳐 나왔고, 창춘 근교 아주 작은 시골 동네로 들어갔다. 나중에 군인 신분을 회복해 김일성 보좌관한테 온 답신 유물이 남아 있다. 내게는 8살, 9살 무렵 본 할아버지에 대한 단편적 기억만 있다. 남들이 농사지을 때 농사지을 줄 몰라 술을 마셨고, 논밭에서 러시아 노래를 부르며 춤추셨다.

2023년 4월10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전춘화 작가.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내가 하지 않으면 잊힐 이야기

“정신이 올바르게 박힌 사람들은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갔거나 문화대혁명 때 목소리를 내다가 투옥되었다오. 먹고사는 일만 전부인 줄 알았던 무지하고 용기 없는 사람들, 서라면 서고 앉으라면 앉으며 구메농사에 만족한 채 동족상잔의 전쟁터에까지 동원된 사람들이 이곳에 남아 희망이 없는 소수민족이 된 거요. 언제나 항상 모든 순간 주체적이었던 적은 없었지. 이건 유전자라니까, 유전을 내가 어떻게 바꿔.”

아버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방 문이 벌컥 열리더니 러닝셔츠 차림의 할아버지가 뛰쳐나와 아버지의 오른쪽 뺨을 찰지게 때렸다. (전춘희 소설 ‘우물가의 아이들’)

―두 분의 소설을 읽으면서 ‘기록’으로서의 의미를 생각하게 됐다. 조선족 기록을 남긴다는 생각을 하면서 글을 쓰는지 궁금했다.

전춘화 경력에 비해 나는 과하게 비장하긴 하지만 역사를 기록한다는 마음으로 쓴다. 한국에 온 지 10년 정도 됐는데 와서 제일 부러웠던 게 한국과 조선족이 물리적으로 헤어진 게 60년에 불과한데, 조선족과 달리 한국은 그 60년의 기록을 차곡차곡 쌓으면서 건너왔더라. 역사학자들이 다양한 견해를 제시하고 국민은 계속 토론하면서. 조선족은 사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도 역사를 잘 모른다. 진시황 몇 년도 통치, 이런 걸 암기하면서 정작 내 뿌리를 배울 기회는 잘 없다.

최근에 자료를 찾아보다 <연변문화대혁명-10년의 약속>(류은규 지음, 토향 펴냄, 2010년)을 발견했다. 문화대혁명 시기 조선족이 핍박당하고 고난을 겪었는데, 그걸 목숨 걸고 몰래 사진 찍으며 기록한 분이 있었다. 그걸 보면서 울었다. 우리 윗세대는 문화대혁명 전까지만 해도 낯선 사람을 만나면 ‘나는 함경북도에서 온 누구요’ 이런 식의 인사를 나눴다고 한다. 본적을 앞에 붙여 소개함은, 언젠가 그곳이 내가 돌아갈 고향임을 인지한 거다. 그러다 족보가 불태워지고 북한에 친척이 있으면 북쪽 간첩, 남한에 친척이 있으면 남쪽 간첩으로 몰리면서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이 많이 소거된 게 아닌가 싶다. 먹고사는 일만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역사는 지나간 것이지만, 피부에 닿는 생존의 문제는 아니지만, 이건 존재의 문제니까.

금희 두 아이를 백년 역사의 조선족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보내 졸업시켰다. 우리 자녀 세대에서는 이제 ‘조선족’의 이미지라든가 분위기를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우리는 조선족 공동체 마을에서 자랐지만 아이들은 문화적 배경이 전혀 없어 외국어처럼 한글을 배운다. 아이한테 ‘말은 못하더라도 들어는 놓아라. 읽기는 해라. 중국 학교에 들어가면 완전히 없어질 거’라고 말하곤 한다. 한번은 조선족 지역 교회에서 학부모 대상으로 조선족 역사를 강의했다. 강의하면서 갑자기 일제강점기 ‘야학’ 선생과 같이 생각했다.(웃음) 문화가 없어진다는 건 자신의 보루, 진지가 없어지는 건데 이걸 지켜야겠다고….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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