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극을 이끌어가는 굵직한 인물이 모두 여성으로 설정된 건 ‘재미’를 고려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나온 결과물이다. “굳이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의도적으로 바꾸자고 작정한 건 아니”지만 “최종 빌런(악역)으로 나이 든 남자의 모습을 보는 게 너무 지겨웠”다. “(대본에 어울리는) 배우를 떠올리면서 ‘이런 분이 하면 재밌지 않을까?’
동시에 극은 연쇄살인범 케이를 통해 현실과 맞닿은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진한 분노와 공감을 일으키기도 했다. 케이가 ‘죽여도 된다’고 생각한 대상은 성매수 남성, 불법촬영 가해자, ‘갑질’과 탈법 위에 선 기득권층, 엔(N)번방과 ‘웹하드 카르텔’의 주범들이다. 이는 대본을 쓰던 당대의 현실, 그리고 그 현실을 살아가는 성초이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저희가 작품을 쓰는 동안 ‘미투’ 운동이
하나의 정체성으로 함께 일하는 성초이의 작업방식이 좀더 궁금했다. 작업을 위한 필수 앱은 페이스타임(영상통화 앱), 구글독스, 텔레그램 세 가지다. 페이스타임이나 텔레그램으로 실시간 대화하고 각종 참고자료를 주고받으며 구글독스 공유문서로 장면을 완성해나간다. 방식은 그때그때 다르다. 각자 다른 신을 쓸 때도 있고 아예 한 장면을 같이 쓸 때도 있다. 상대가 입력하는 글자를 실시간으로 동시에 볼 수 있는 구글독스 공유문서의 기능을 톡톡히 이용한달까. 둘 다 이 작업방식이 “아주 잘 맞는다”.
공동작업은 지칠 때 서로를 붙들어주면서 짐을 나눠지기에 제격인 방식이기도 하다. “사실 집에서 (작업을) 하면 잘 안 될 때도 있잖아요. 그때 (페이스타임) 켜놓고 하면 집중도 되고요. ‘내가 좀 대충 봐도 상대가 열심히 봐주겠지’란 믿음도 있고요. (웃음) 스트레스가 경감되는 장점이 있죠.”
<구경이>를 위한 자료조사는 인터넷의 힘을 많이 빌렸다. <구경이> 곳곳엔 인터넷 밈을 적극 활용한 대사도 나오는데 “인터넷에 살고 있다”고 표현할 정도로
다만 저유조, 출렁다리, 인천 월미도 등의 장소는 직접 다녀오면서 대본이 구체화하기도 했다.
성초이 작가팀이 마주앉아 글을 쓰고 있다. 박승화 선임기자
잘 쓰기 위한 덜 쓰기 vs 머릿속 가득 글쓰기
개별적인 작업 루틴은 조금 다르다. A는
‘다섯 씬’ 이상을 넘겼거나 ‘하루 3시간 이상’ 썼다는 두 기준 중 하나를 충족하면 그만 쓴다. “욕심내면 다음날 작업에 영향을 미치더라고요. 그래서 3시간 쓰고 나머지 시간에는 취미활동을 하든지 작업에 필요한 참고자료를 보든지 해요. ‘글을 안 쓰는 시간’이 확보돼야 쓰는 시간에 집중하게 돼요.” A는 ‘취미 부자’인데
피아노·프라모델·주짓수 등을 한다. “새로운 커뮤니티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보다 오는 일”은 적절히 자신을 환기하면서, 오히려 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 동력이 된다. 영화·드라마·책은 일상이다.
B는 “마감을 어기지 않는다” 정도의 기준을 두고 있다. 단 퇴고하는 시간을 꼭 갖는다. “마감 최소 3일 전에 끝내고 ‘글 청소’를 하는 게 마음이 좀 놓여요. 물론 끝나도 끝나는 게 아니고 퇴고도 완전한 퇴고도 아니지만요.” B의 취미는 상대적으로 간단하다. 산책과
컴퓨터 온라인 게임을 열심히 하는 정도다. 방탈출은 성초이가 함께 즐기는 취미인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땐 하나의 서사를 따라가며 문제를 풀어야 탈출 가능한 방탈출 게임을 하며 영감을 받기도 한다고.
A는 “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시간이 꼭 있어야” 하지만, B는 반대다. “늘 (글을)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A는 “작업이 끝나서 노트북을 닫으면 아예 보지도 않는” 반면, B는 “모니터 세 개에 게임, 레퍼런스가 되는 영상, 작업창을 모두 켜두는” 스타일이다. 게임 한 차례가 돌 때마다 15초가량 쉴 수 있는데 그때 한 문장씩 쓰곤 한다.
이들에게 이야기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자 “전부”(B)다. B는 어렸을 때부터 뭐든 이야기로 풀어내는 걸 좋아했다. “학교에서 수행평가를 할 때 논설문 같은 것 쓰라고 하잖아요. 저는 그때도 이야기를 썼어요. 어떤 이야기를 통해서 주제를 표현하는 방식으로요.”
A는 고등학교 때 영화의 매력을 알았다. “한 장면에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들 있잖아요. 음악을 포함해 종합적으로 표현되는 것들에 (소설보다) 더 매력을 느끼면서 이런 장면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현실에 없는 걸 보는 일, 일어날 법하지만 절대 일어나지 않는 일을 볼 수 있잖아요. 이야기는 결국 상상을 통해 발전시키면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일이고, 그런 점이 재밌던 것 같아요.”
틈틈이 메모하는 것도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데 도움된다고. 단 이미 영화나 드라마에 나온 대사를 메모해두진 않는다. “이미 한 번 쓰인 거니까요. 대신 실생활에서 들리는 말, 지인들과 대화하거나 대중교통에서 듣는 이야기 등을 메모해두곤 해요. 이런 메모에서 많이 가져와 쓰는 것 같아요.”
어떤 메모가 있는지 슬쩍 귀띔해달라 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각본도 쓰고 감독도 하시는 분이 말씀하신 건데 ‘연출은 개도 해’ 이런 말이 있네요.”(A) “‘이대로 잃어버리기는 싫습니다’란 문장이 적혀 있어요. 고양이를 찾는 전단에서 본 문구예요.”(B)
성초이는 2023년 선보일 <링마벨> 작업에 한창이다.
<링마벨>은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초국적 스파이들이 나오는 ‘첩보물’로 ‘시즌제 스파이 드라마’다. “전작보다 훨씬 힘들다”며 머리를 싸매는 중이다.
“이야기를 쓰는 일에 권태가 온 것 같아요.” A가 걱정하자 옆에서 B가 천연덕스럽게 되받아친다. “잘 풀리고 있다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봐!” 이내 웃음이 터졌다. 성초이가 보여줄 호흡에 또 한번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글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사진 박승화 선임기자 eyeshoot@hani.co.kr성초이 작가의 작업실 책꽂이에 가지런히 놓인 대본집과 <샌드맨> 그래픽노블 등. 성초이 제공
성초이가 영감을 얻는 작품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
책을 많이 읽었다. 최근에 나온 중국 작가 위화의 소설(<원청>), (스파이 소설의 대가로 꼽히는) 존 르 카레의 소설들. 지금은 안드레아 롱 추가 지은 <피메일스>를 읽고 있다.”(A) “<샌드맨>을 재밌게 보고 있다. 넷플릭스에 나온 드라마도 있는데 원작인 그래픽노블을 보면서 “너무 재밌다”고 감탄한다. “이렇게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이런 사람이 예술을 하는 거구나”라고 생각한다.”(B)
둘 다 특별히 작법서를 읽는 건 아니다. B는 “유일하게 본 작법서가 <세이브 더 캣>인데 얇고 영화 시나리오용이라 드라마와는 또 다르다”고 했다. 대신 다른 드라마 대본을 읽는 게 훨씬 도움된다고. A는 미국 드라마 <베터 콜 사울> 시나리오를 보고 있다.
최근에 둘 다 재밌게 본 작품은 미국 드라마 <더 보이즈>(아마존프라임)와 김은숙 작가의 <더 글로리>(넷플릭스)다. “<더 글로리>를 보면서 무얼 덜어내야 할지 너무 잘 안다고 생각했다. 나라면 더 대사를 주거나 설명하고 싶은 캐릭터에 대해서도 빼야 할 부분을 빼고 깔끔하게 넘어가더라.”(B) “대사를 진짜 잘 쓰신다고 생각했다.
나는 실제로 편하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면 대사로 못 쓰는 편인데 <더 글로리>의 대사는 실제로는 쓰지 않을 법한 말이라도, 강렬하게, 캐릭터에 어울리게 쓰여져 있다. 그래서 그 대사들이 사람들의 뇌리에 박히고, 많은 사람들이 되뇌이게 되는 것 같다. 그런 점을 정말 배우고 싶다.”(A)
성초이 작가팀이 쓴 <구경이> 대본집. 박승화 선임기자
드라마 마니아라고 선뜻 얘기하기는 어렵다. 다만 장르물, 특히 무언가를 ‘수사하고 추적하고 법정에서 뭔가를 따지는’ 스릴러 요소가 담긴 작품을 유달리 좋아한다. 2021년 방영된 <구경이>는 산뜻한 충격이었다. 대개의 스릴러 장르에서 여성은 범죄 피해자로 재현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스릴러 장르를 좋아하면서도 늘 ‘이런 걸 즐기며 봐도 되나’ 싶어 마음 한쪽에 찝찝함이 남아 있곤 했다.) 여성 캐릭터가 수사팀의 일원일 수는 있어도 수사를 전면에서 이끄는 ‘똑똑하고 힘 있는 캐릭터’와는 거리가 멀었다. <구경이>는 이런 통념을 완전히 비틀어버린다. 범죄 피해자를 대상화하지 않고도 사건 수사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 구태여 남성 경찰이나 탐정이 아니라도 극을 흥미롭게 주도해갈 수 있다는 것(덕분에 남성 주인공이 수사하는 모습에 반해버리는 여성 보조 캐릭터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 60대 중년 여성이 애달픈 엄마 역할로만 등장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구경이>를 보면서 새삼 깨닫게 됐다.
성초이의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건 이런 ‘새로움’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성초이는 ‘천재’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보며 감탄하다가도 “어차피 내가 그 사람처럼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쓰는 일은 결국 각자가 알아서 부딪쳐가며 터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성초이만의 색깔을 담아낸,
이들이 계속 부딪쳐가며 쓰고 들려줄 이야기가 계속 궁금해진다.
<구경이>(JTBC, 2021년): 스릴 있지만 유머를 잃지 않는 ‘코믹 추적극’. 케이가 살인의 표적으로 삼는 대상은 주로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죽여 마땅하다”고 믿는 자들이다. 나제희, 산타, 경수와 함께 케이를 쫓는 구경이는 살인이 정답이 아니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걸 자신만의 방식으로 알려준다. 여성 배우들의 케미스트리와 남성 퀴어 커플 등 개성 있는 캐릭터로 시청자의 환호를 받았다. 구경이의 성장을 따라가다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관하거나 냉소하지 않는 법을 찾게 된다.
한겨레21 1454호 표지. 서점에서 판매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