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예 다른 형태라고 봐요. 만화에서도 단행본 작가와 연재 작가의 생태계가 다르듯이. 지금은 좀 달라졌지만 제가 <방법>을 쓸 때만 해도 대본이 4회까지만 나오면 바로 작업에 들어갔거든요. 하지만 OTT 드라마는 대본이 다 나와야 시작할 수 있죠. 또 드라마 에피소드를 한 번에 전부 공개하느냐, 한 주에 2회차씩 공개하느냐, 영화도 OTT 플랫폼에서 선보이느냐, 극장에서 상영하느냐에 따라 다 다릅니다. 캐릭터를 구상할 때도 영화는 속도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인물을 많이 떠올렸거든요. 시리즈는 속도감보다는 오히려 터닝 포인트가 많이 필요해서 여러 갈등을 겪는 인물이 낫더라고요. 그래서 <지옥>에 등장하는 캐릭터들도 대부분 딜레마를 갖고 있고, 앞으로 나올 작품들도 거의 다 그럴 예정이에요. 경험해야 할 매체의 특성은 여전히 많고, 매번 새롭습니다.”
“경험 측면에서 보면 어쩌면 좋은 시기라는 생각도 드는데, 지금은 모든 게 뒤섞인 혼돈기예요. 뭘 알아야 방향을 잡고 나아갈 텐데 그걸 명확히 아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 직접 돌파해나가는 수밖에 없죠. 이런 시기엔 경험만이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창 그림 배울 때 ‘물속에 들어가 허우적대야 수영을 배우지, 물 밖에서 수영하는 법만 공부해선 수영을 잘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지금 상황에 잘 어울리는 말 같아요.”
“이야기하고 싶은 테마가 생기면 그에 맞는 소재를 찾거나 고민하긴 하는데 글이 정말 안 풀리지 않는 한 많이 보진 않아요. 차라리 예전에 본 것을 중심으로 복기하죠. 특히 요즘에는 따로 작품을 볼 시간이 많지 않거든요. 대신 아이들과 유튜브나 키즈 콘텐츠를 보는 시간이 많아졌는데, 그럼 해당 산업의 흐름 같은 게 눈에 들어와요. 예를 들어 키즈 애니메이션도 몇 년 사이 흐름이 완전히 뒤바뀌어버렸거든요. 제작 과정도 당연히 달라졌고요. 전체적인 미디어 흐름이 천지개벽을 하다보니 그런 변화를 계속 생각해보게 돼요. 한동안 프로레슬링을 재밌게 봤는데 거기선 갈등이 무한하게 일어나거든요. 동료와 싸우고, 불륜이 일어나고, 새로운 갈등이 계속 끼어들고 대체돼요. 보면서 앞으로 많은 콘텐츠가 이런 방향으로 가는 건가 싶었어요. 특정 세계관 안에서 끝없이 갈등이 생산되는 구조. 요즘 OTT와 TV의 시즌제 드라마를 보면서 같은 걸 느껴요.”
―실제 <지옥>도 시즌제 드라마로 집필하고 계시죠.“네, 그래서 그런 점이 더 눈에 들어오는지도 모르겠어요. 그 시즌제라는 형식이 요즘 작업할 때 크게 고민되는 것 중 하나거든요. OTT 플랫폼 생태계상 인기가 없으면 후속 시즌이 안 나올 수 있어요. 작가가 시즌2를 염두에 두고 대본을 썼는데, 시즌1에서 끝난다면 그건 반쪽짜리 작품이 되는 거잖아요. 그러고 싶지 않아서 <지옥>도 하나의 시즌으로서 완결성을 갖되 다음 시즌을 보고 싶게끔 하려고 많이 고민했어요. 원래 <지옥> 만화 버전에선 박정자(김신록 분)가 부활하는 신이 없거든요. 만화의 완결성을 위해 뺐는데 드라마 버전에선 다음 시즌의 여지를 남겨두기 위해 전략적으로 넣었습니다.”
―처음부터 계획한 바는 아니었지만 <서울역> <부산행> <반도>도 차츰 세계관이 확장된 사례죠. 이미 영화로 경험해서 드라마에서도 더 수월하게 진행하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요.“여전히 어렵습니다. (웃음) <부산행>은 사실 확장하려는 의도를 가졌으면 더 보편적인 시도를 했을 것 같아요. <부산행>의 좀비는 속도가 빠르고, 말하자면 기차를 위한 좀비라 다른 공간으로 옮기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제목도 다르게 지었을 거고요. 그래도 많이들 ‘연니버스’라고 세계관을 엮어 봐주시니 감사하죠.”
―<방법> <괴이> <선산>처럼 드라마 각본만 집필하는 경우 직접 연출할 작품의 각본을 쓸 때와 접근법이 다른가요.“그것도 경험해가는 중인데 글 자체가 달라지는 것 같진 않아요. 한 가지 원칙이 있다면 연출을 맡은 감독님의 방식에 개입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괴이> 현장에 한 번도 안 갔고 <선산>도 한 번 들렀어요. <선산> 연출하는 민홍남 감독이 <부산행> <염력> <반도>의 조감독이거든요. 제가 가 있으면 얼마나 부담스럽겠어요. (웃음) 현장에 두 시간 정도만 있다 나왔습니다.”
―20년 가까이 계속 장르물을 제작했는데, 감독님은 장르물의 매력이 뭐라고 생각하나요.“공유할 세계가 존재한다는 게 제일 큰 매력이에요. 특정 장르에 빠지는 이유는 다양한데 에스에프(SF)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좀비물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좀비물 중에서도 서사 때문에 혹은 비주얼 때문에 좋아할 수도 있어요. 그런 세세한 이유와 요소를 공유할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은 점이죠.”
―2022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과 대담을 진행할 때 ‘작업할수록 장르물의 틀 안에서 계속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나가고 싶다는 열망이 있는데 그 시도를 장르물에서 어떻게 해나가고 계신가’라는 질문을 하셨죠. 같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새로운 돌파구를 어떻게 찾아가고 있나요. “장르에 충실하되 장르를 탈피하는 것, 그게 숙제인 것 같아요. 장르라는 건 아까 말했듯이 해당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공감대를 얻는 게 중요한데, 이들은 동시에 그 장르에서 탈피한 것을 보고 싶어 해요. 그렇지만 그 틀을 너무 벗어나면 안 되고 중간을 잘 맞춰야 해요. 정말 어렵죠. 어려운데 저는 그래도 계속 경험해보는 수밖에 없다고 봐요. 요즘 작품을 기획해서 대본을 쓰고 공개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최소 2년이거든요. 그사이 세상이 너무 달라지니까 미래를 예측하고 큰 흐름을 읽는다는 게 쉽지 않아요. 그때 지지대가 돼주는 것이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축적한 데이터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요즘 대중에겐 보편성이 존재하지 않아요. 갈수록 그런 것 같아요. 여러 세대가 제각기 다른 작품을 보고, 그 와중에 그들의 입맛도 계속 변화하죠. 그걸 작품을 통해 계속 감지하며 나아가려고 노력합니다.”
―원래 <괴이>를 멜로물로 쓰고 싶었다는 인터뷰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앞으로 어떤 결의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은가요.“정말 많아요. 최근에 영화 <러브레터>를 다시 봤는데 진짜 좋더라고요. 뇌가 정화되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웃음)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도 다시 봤는데 역시 좋았고, 언론계 문제를 파헤치는 <엘피스 -희망, 혹은 재앙->이라는 드라마도 재밌게 봤어요. 좋은 표현이라 생각하진 않지만 이른바 ‘막장 드라마’ 작풍을 띠는 것도 해보고 싶고. 다 제가 해보지 않은 장르와 형식의 작품들이죠. 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건 다르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기회가 온다면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연상호 작가 겸 감독이 자신의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했다.
연상호 감독에게 시나리오의 중요성에 관해 묻자 “시나리오는 설계도”라는 답이 돌아왔다. “감독과 배우, 스태프까지 많은 사람이 모여서 하는 작업인데 최종적으로 작품이 어떻게 나올지 아무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요컨대 배우와 미술팀, 촬영팀, 심지어 연출을 맡은 감독까지 “모두가 하나의 그림을 그리며 나아갈 수 있게끔 하는 지표가 필요한데 그게 바로 시나리오”라는 것이다. “안전한 설계도와 다름없는 각본”의 중요성을 알기에, 연상호는 매일같이 작업실 책상에 앉아 대본을 쓴다.
글 조현나 <씨네21> 기자·사진 최성열 <씨네21> 기자
연상호 감독과 인터뷰한 날은 마침 <씨네21> 마감일이었다. 마무리 짓지 못한 글을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집을 나섰다. 그러나 작업실에 들어선 순간, 복잡하게 얽힌 고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작업실 벽에 붙은 영화 <부산행> <염력> <반도>, 드라마 <지옥> 등의 포스터와 테이블마다 가득한 <다크 나이트> 시리즈의 배트맨, 조커, 캣우먼, 울트라맨과 고질라를 비롯한 괴수들, <슬램덩크>의 피규어들, 영화 디브이디(DVD), 층층이 쌓인 건담 상자들까지. 사진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작업실 곳곳을 살피며 ‘여길 한 바퀴 돌며 대화를 나누다보면 감독님의 필모그래피와 취향에 관해 끝도 없이 이야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대로, 연상호 감독이 “마치 직장인처럼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6시까지 시간을 보내는” 작업실에선 수많은 실험이 이뤄지고 있었다. 그의 답변을 들으며 여러 이야기 조각들을 꿰매고 맞춰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내는 과정이 자연스레 연상됐다. 마감에 대한 걱정은 잠시 잊은 채, 한 창작자의 세계를 면면히 들여다본 귀한 시간이었다.
드라마
<괴이>(티빙, 2022년): 불상과 눈이 마주치면 과거의 트라우마가 눈앞에 재현된다. 이 기이한 사건을 해결하려는 이들의 이야기.
<지옥>(넷플릭스, 2021년): 예고 없이 벌어지는 지옥행 선고와 종교단체 새진리회의 진실을 파헤친다.
<방법>(tvN, 2020년): 사진, 한자 이름과 소지품만으로 상대를 살해할 수 있는 10대 소녀와 사회부 기자가 거대한 악과 맞서 싸우기 시작한다. 연상호 작가의 첫 드라마 집필작.
영화
<정이>(2022년): 22세기를 배경으로, 인공지능(AI) 개발사의 연구팀장이 내전을 끝내기 위해 자신의 엄마이자 전쟁 영웅이었던 군인을 복제해 전투 AI를 개발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방법: 재차의>(2021년): 주술사에 의해 되살아난 시체 ‘재차의’가 살인을 저지르자 이를 막기 위한 ‘방법사’의 사투가 벌어진다. 드라마 <방법>의 스핀오프 영화.
<반도>(2020년): 고립된 반도에서 좀비를 피해 살아남은 자들과 이곳에 다시 발을 들인 자들의 치열한 탈출기.
<염력>(2018년): 재개발 지역 주민들을 지키기 위해 한 남자가 자신의 염력을 사용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작품.
<부산행>(2016년): 열차에 오른 승객들은 안전지대 부산에 무사히 도착하기 위해 좀비들과 대치한다. 연상호 작가의 첫 실사 영화.
한겨레21 1454호 표지. 서점에서 판매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