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분열된 조선공산당에 새 노선을 제시한 김단야

1928년 쿠시넨위원회 출석해 조선공산당의 상황과 진로 답변
국제공산당의 결정으로 알려진 ‘12월 테제’의 실질적 작성자

1452
등록 : 2023-02-23 23:09 수정 : 2023-03-01 14:26

크게 작게

김단야가 1926~1928년 재학했던 국제레닌학교. 국제공산당 산하 각국 공산당 간부 재교육 기관으로서 대학교에 상응한 고등교육 기관이었다.

김단야(29)는 1928년 9월20일에 열리는 쿠시넨위원회 회의에 출석해달라는 통보를 받았다. 러시아 모스크바의 국제레닌학교에 재학할 때였다. 국제당 동양부의 추천으로 1926년 9월에 입학한 이래 3년째 되던 해였다.

국제레닌학교란 국제공산당이 운영하던 각국 공산당 간부의 재교육 기관이었다. 대학교에 상당하는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입학 요건이 까다로웠다. 학교 문을 두드리려면 당 집행부의 지도적 지위에 있는 간부이거나, 5년 이상 당 경력과 3년 이상 활동 경험을 갖춘 당원이어야 했다. 외국어 구사 능력도 필요했다. 영어를 비롯한 11개 외국어 가운데 하나를 구사할 수 있어야 했는데, 조선어와 일본어는 그에 포함되지 않았다. 김단야는 영어반에 속했다. 그의 영어 구사 능력은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정치적 문헌 작성과 토론 수행에 어려움이 없었다. 재학생은 수준 높은 마르크스주의 교육 기회를 얻었고, 재학 중 기숙사·장학금·의복·음식 등을 제공받았다.1

‘화요파’의 대표자로 간주된 스물아홉 청년

쿠시넨위원회란 국제당집행위 최상급 기구인 정치비서부가 조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28년 9월7일 설립한 조선문제위원회를 말한다. 위원은 정치비서부원 3명이고, 한시적인 기구였다. 핀란드공산당 지도자 쿠시넨(47)이 위원장을 맡았고 독일공산당 렘멜레(48), 소련공산당 탸트니츠키(46)가 위원이 됐다. 이들의 임무는 경쟁하는 두 조선공산당의 분쟁을 해소할 방안을 마련해 정치비서부에 제안하는 데 있었다.

당시 조선공산당은 둘로 나뉘었다. 1927년 12월 열린 제3차 당대회에서 설립된 ‘12월당’, 1928년 2월 열린 또 다른 제3차 당대회에서 출범한 ‘2월당’이 그것이다. 세간에선 전자를 옛 서울파와 상하이파가 통합했다는 의미로 ‘서상파’라 했고, 후자를 ‘엠엘파’라 했다. 두 당이 서로 조선혁명의 참모부를 자임했기에, 국제당은 그중 어느 쪽을 자기 지부로 인정해야 하는지를 놓고 골치를 썩였다. 쿠시넨위원회가 입안하는 해결 방안은 상급 기구인 정치비서부와 집행위원회, 그리고 전당대회를 차례로 통과할 터였다. 요컨대 쿠시넨위원회는 조선공산당의 향배를 좌우하는 권한을 가진 막중한 기구였다.

김단야.

도대체 왜 쿠시넨위원회는 김단야를 회의 석상에 불렀을까? 조선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청문회를 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조선공산당 각 그룹의 대표자를 한자리에 모아놓고 토론과 질의응답을 하기로 했다. 이 회의에는 모스크바에 와 있는 두 조선공산당의 대표자들이 초청됐다. 그런데 그들만이 아니었다. 김단야도 초청자 명단에 포함됐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가 현존하는 어느 공산당에서도 대표자로 파견된 게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쿠시넨과 다른 두 위원은 양당 외에 1925년 4월 창당대회 주도 그룹이 엄존한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세간에서 ‘화요파’라고 부르는 세력이었다. 러시아어 사료에선 ‘고참 당원그룹’(группа старых партийцев)이라고 표기됐다. 김단야는 조훈과 더불어, 이 그룹의 대표자로 간주됐다. 김단야는 청문회 출석은 물론이고 뒤이은 조선 문제 논의 과정에 계속 개입할 수 있었다. 쿠시넨 위원장의 재량과 양해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둘로 갈라진 조선공산당 승인이 쟁점

김단야는 쿠시넨위원회가 주관한 조선 문제 논의 과정에 줄곧 참여했다. 그 위원회는 1928년 9월7일 설립 뒤 12월10일 정치비서부에서 ‘조선문제 결의안’이 채택될 때까지 3개월 동안 존속했다. 그 기간에 조선 문제 논의는 몇 개의 국면을 거쳤다. 조선위원회 청문회(9월20일), 각 당 서면보고 접수(9월22~25일), 각 당 결정서 시안 접수(10월1일~11월3일), 조선위원회 초안(11월13일), 초안 심의(11월14~19일), 조선위원회 원안(11월24일), 동방비서부 심의·교열(11월27~29일), 동방비서부 승인안(12월7일), 정치비서부 최종안(12월10일) 등이 그것이다.

김단야가 쿠시넨위원회 청문회를 마치고 제출한 1928년 9월25일자 서면보고서 마지막 페이지. 유려한 영문 필기체 친필로 쓰여 있다. 자신의 또 다른 원고 `조선공산당의 형성에 관하여’와 `당과 반대파 사이의 정치적 차이’가 국제공청 아카이브에 보관돼 있으니 필요하다면 참고하라고 첨언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공산당의 세 대표단 사이에 불꽃 튀는 논쟁이 벌어졌다. 조선 혁명의 진로와 당의 조직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한국 사회주의운동 사상 이처럼 긴 시간의 강도 높은 토론이 달리 있었을까 싶을 만큼 그 양상이 격렬했고, 내용이 풍부했다.

김단야는 이 논쟁의 한 당사자가 됐다. 창당 주도 그룹의 대표로 각 국면의 논의 과정에 개입했다. 그는 9월20일 청문회에 참석해 사회주의운동의 현안에 관해 자기 견해를 구두로 전달했다. 6·10 만세 운동으로 당이 대대적인 검거 사건에 휘말린 것, 그 공백을 당 외 공산그룹인 서울파가 두 차례 걸쳐 입당함으로써 메운 사실, 1926년 말 제2차 당대회가 열려 새 집행부가 구성된 것, 새 집행부가 두 당으로 분화된 사실 등을 진술했다.2

청문회가 끝난 뒤에는 장문의 서면 보고서를 제출했다. 9월25일자였다. 청문회에서의 구두 보고를 보완하는 기록이었다. 33쪽 규모의 영문 문서를 쿠시넨위원회 앞으로 보냈다.3

이어 10월24일에는 결정서 시안을 제출했다. 조선위원회 요청으로 작성한 김단야 버전의 조선문제결정서 초안이었다. 당신 같으면 조선 문제에 관해 어떤 결정서가 채택돼야 한다고 생각하냐, 이 물음에 대한 답안이었다. 영어로 쓰인, 무려 65쪽에 이르는 장문의 정치 문헌이었다. 세계 정세와 조선 정세를 논하고, 조선혁명의 성격과 동력을 규정하며, 부르주아지 민족주의 세력과 통일전선 정책을 어떻게 입안할지, 공산당 조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향후 투쟁의 전략과 전술은 어떠해야 하는지 포괄적으로 논하고 있다.4

11월13일은 조선 문제 논의 과정에서 분수령적 의의를 지닌 날이었다. 이날 조선 문제에 관한 결정서 초안이 나왔다. 조선위원회가 작성했다. 문안 작성을 맡은 당료가 러시아인 이델손이었으므로 ‘이델손 초안’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조선공산당의 두 대표단은 각각 이 초안에 대한 비판적 심의 의견을 냈다. 김단야도 제출했을 터이지만, 그의 심의 의견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김단야가 쿠시넨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1928년 10월24일자로 작성한 조선문제결정서 시안 첫 페이지. 영문 타자본으로 65쪽에 이르는 장문이다. 그의 정치 이론과 정책론이 두텁게 서술돼 있다.

분파주의 소산인 두 공산당 승인 말고 창당을

어쩌면 심의 의견을 낼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델손 초안’은 김단야의 주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초안은 조직 문제와 정치 문제로 나뉘었는데, 특히 조직 문제를 다룬 ‘당내결정 초안’은 김단야 주장의 핵심을 그대로 수용했다. 2월당의 대표자들은 자당 정통론을 주장했고, 12월당의 대표단은 자당 우월론을 주장했다. 둘 다 자기네 당을 국제공산당 지부로 승인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김단야는 달랐다. 현존하는 두 공산당은 진정한 당이 아니라 타기해야 할 분파주의의 소산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둘 다 결함과 과오를 지녔으므로 어느 하나를 선택해 공산당을 만들거나, 양자 통합에 기반해 공산당을 세우는 방식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가 제안한 것은 신당 창당론이었다. 기존 두 공산당을 인정하지 말고 국제당의 직접 지도하에 새 공산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5

조선위원회의 ‘당내결정 초안’의 첫머리는 “상쟁하고 있는 조선 공산주의 그룹들 가운데 그 누구에게도 국제당 조선지부 대표권의 승인을 거절한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바로 김단야의 주장과 동일한 내용이었다. 김단야의 의견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6

이델손 초안 이후에도 조선위원회 내부 논의는 계속됐지만, 조직 문제 내용에서 근본적인 변동은 없었다. 초안 작성일로부터 열흘이 지난 뒤인 11월24일, 동방비서부로 이관하기 위해 ‘조선위원회 원안’이 확정됐다. 한 항목이 추가됐다. 향후 조선공산주의 사업에 대한 국제당의 지도를 강화한다는 조항이었다. 조선공산당 신집행부 구성을 국제당 동방부가 직접 컨트롤하겠다는 의미였다.

‘조선위원회 원안’은 이후 동방비서부의 심의·교열을 거쳐 정치비서부로 이관됐다. 국제당집행위의 최상급 기구인 정치비서부가 조선 문제 결정서 최종안을 의결한 것은 1928년 12월10일이었다. 마지막 국면까지 이델손 초안의 신당 창당론은 수정되지 않았다.

김단야는 국제당의 1928년 12월 결정서의 골격을 입안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달리 말하면 ‘12월 테제’를 탄생시킨 주역이었다. 기존에 국제당과 조선의 상호관계에 관한 연구논문을 발표한 몇몇 연구자는 12월 테제가 국제공산당을 쥐고 있는 소련 공산주의자가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더러는 거기에다 반공 신념을 버무렸다. 조선인 공산주의자는 국제당의 논의 과정에 참여하지 못했고, 단지 소련의 지시에 맹종하는 꼭두각시 같은 역할을 했노라고 썼다.

1930년대 사회주의운동의 출발선을 그으며

김단야는 그런 연구 결과가 근거 없는 편견임을 잘 보여준다. 그가 작성한 방대한 정치 문헌들은 일제하 조선 사회주의자가 도달했던 이론·정책 역량의 높이를 대표한다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그가 12월 결정서 채택 과정에서 수행한 역할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그는 12월 결정서의 기본 골격을 설계한 자였다. 1930년대 사회주의운동 전개 과정에서 당 재건 과제와 12월 테제의 영향력이 오랫동안 강력히 지속됐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김단야는 그 출발선을 그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참고 문헌

1. Инструкция об условиях приема в МЛШ(국제레닌학교 입학 조건에 대한 규정), РГАСПИ ф.531 оп.1 д.18 л.13~14.

2. Заседание Комис. по Корейск.Вопр. 20/Ⅸ-28г.(조선문제위원회 1928년 9월20일자 회의), pp.30~31, РГАСПИ ф.495 оп.45 д.25.

3. Кимданя(김단야), To the Korean Comission, 1928. 9.25., pp.1~33,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52 л.82~99об.

4. Kim Dania, On the problem of Korean revolution, 1928. 10.24., pp1~65,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59 л.246~310.

5. 임경석, ‘코민테른 조선위원회 속기록 연구-1928년 9월20일자 회의를 중심으로’, <사림> 76, 305~306쪽, 2021년 4월.

6. 임경석, ‘코민테른의 1928년 결정 초안과 조선 대표단’, <역사학보> 253호, 248~251쪽, 2022년 3월.

*임경석의 역사극장은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