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과정에서 조선공산당의 세 대표단 사이에 불꽃 튀는 논쟁이 벌어졌다. 조선 혁명의 진로와 당의 조직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한국 사회주의운동 사상 이처럼 긴 시간의 강도 높은 토론이 달리 있었을까 싶을 만큼 그 양상이 격렬했고, 내용이 풍부했다.
김단야는 이 논쟁의 한 당사자가 됐다. 창당 주도 그룹의 대표로 각 국면의 논의 과정에 개입했다. 그는 9월20일 청문회에 참석해 사회주의운동의 현안에 관해 자기 견해를 구두로 전달했다. 6·10 만세 운동으로 당이 대대적인 검거 사건에 휘말린 것, 그 공백을 당 외 공산그룹인 서울파가 두 차례 걸쳐 입당함으로써 메운 사실, 1926년 말 제2차 당대회가 열려 새 집행부가 구성된 것, 새 집행부가 두 당으로 분화된 사실 등을 진술했다.
청문회가 끝난 뒤에는 장문의 서면 보고서를 제출했다. 9월25일자였다. 청문회에서의 구두 보고를 보완하는 기록이었다. 33쪽 규모의 영문 문서를 쿠시넨위원회 앞으로 보냈다.
이어 10월24일에는 결정서 시안을 제출했다. 조선위원회 요청으로 작성한 김단야 버전의 조선문제결정서 초안이었다. 당신 같으면 조선 문제에 관해 어떤 결정서가 채택돼야 한다고 생각하냐, 이 물음에 대한 답안이었다. 영어로 쓰인, 무려 65쪽에 이르는 장문의 정치 문헌이었다. 세계 정세와 조선 정세를 논하고, 조선혁명의 성격과 동력을 규정하며, 부르주아지 민족주의 세력과 통일전선 정책을 어떻게 입안할지, 공산당 조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향후 투쟁의 전략과 전술은 어떠해야 하는지 포괄적으로 논하고 있다.
11월13일은 조선 문제 논의 과정에서 분수령적 의의를 지닌 날이었다. 이날 조선 문제에 관한 결정서 초안이 나왔다. 조선위원회가 작성했다. 문안 작성을 맡은 당료가 러시아인 이델손이었으므로 ‘이델손 초안’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조선공산당의 두 대표단은 각각 이 초안에 대한 비판적 심의 의견을 냈다. 김단야도 제출했을 터이지만, 그의 심의 의견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김단야가 쿠시넨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1928년 10월24일자로 작성한 조선문제결정서 시안 첫 페이지. 영문 타자본으로 65쪽에 이르는 장문이다. 그의 정치 이론과 정책론이 두텁게 서술돼 있다.
어쩌면 심의 의견을 낼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델손 초안’은 김단야의 주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초안은 조직 문제와 정치 문제로 나뉘었는데, 특히 조직 문제를 다룬 ‘당내결정 초안’은 김단야 주장의 핵심을 그대로 수용했다. 2월당의 대표자들은 자당 정통론을 주장했고, 12월당의 대표단은 자당 우월론을 주장했다. 둘 다 자기네 당을 국제공산당 지부로 승인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김단야는 달랐다. 현존하는 두 공산당은 진정한 당이 아니라 타기해야 할 분파주의의 소산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둘 다 결함과 과오를 지녔으므로 어느 하나를 선택해 공산당을 만들거나, 양자 통합에 기반해 공산당을 세우는 방식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가 제안한 것은 신당 창당론이었다. 기존 두 공산당을 인정하지 말고 국제당의 직접 지도하에 새 공산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5조선위원회의 ‘당내결정 초안’의 첫머리는 “상쟁하고 있는 조선 공산주의 그룹들 가운데 그 누구에게도 국제당 조선지부 대표권의 승인을 거절한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바로 김단야의 주장과 동일한 내용이었다. 김단야의 의견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6이델손 초안 이후에도 조선위원회 내부 논의는 계속됐지만, 조직 문제 내용에서 근본적인 변동은 없었다. 초안 작성일로부터 열흘이 지난 뒤인 11월24일, 동방비서부로 이관하기 위해 ‘조선위원회 원안’이 확정됐다. 한 항목이 추가됐다. 향후 조선공산주의 사업에 대한 국제당의 지도를 강화한다는 조항이었다. 조선공산당 신집행부 구성을 국제당 동방부가 직접 컨트롤하겠다는 의미였다.
‘조선위원회 원안’은 이후 동방비서부의 심의·교열을 거쳐 정치비서부로 이관됐다. 국제당집행위의 최상급 기구인 정치비서부가 조선 문제 결정서 최종안을 의결한 것은 1928년 12월10일이었다. 마지막 국면까지 이델손 초안의 신당 창당론은 수정되지 않았다.
김단야는 국제당의 1928년 12월 결정서의 골격을 입안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달리 말하면 ‘12월 테제’를 탄생시킨 주역이었다. 기존에 국제당과 조선의 상호관계에 관한 연구논문을 발표한 몇몇 연구자는 12월 테제가 국제공산당을 쥐고 있는 소련 공산주의자가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더러는 거기에다 반공 신념을 버무렸다. 조선인 공산주의자는 국제당의 논의 과정에 참여하지 못했고, 단지 소련의 지시에 맹종하는 꼭두각시 같은 역할을 했노라고 썼다.
김단야는 그런 연구 결과가 근거 없는 편견임을 잘 보여준다. 그가 작성한 방대한 정치 문헌들은 일제하 조선 사회주의자가 도달했던 이론·정책 역량의 높이를 대표한다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그가 12월 결정서 채택 과정에서 수행한 역할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그는 12월 결정서의 기본 골격을 설계한 자였다. 1930년대 사회주의운동 전개 과정에서 당 재건 과제와 12월 테제의 영향력이 오랫동안 강력히 지속됐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김단야는 그 출발선을 그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참고 문헌
1. Инструкция об условиях приема в МЛШ(국제레닌학교 입학 조건에 대한 규정), РГАСПИ ф.531 оп.1 д.18 л.13~14.
2. Заседание Комис. по Корейск.Вопр. 20/Ⅸ-28г.(조선문제위원회 1928년 9월20일자 회의), pp.30~31, РГАСПИ ф.495 оп.45 д.25.
3. Кимданя(김단야), To the Korean Comission, 1928. 9.25., pp.1~33,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52 л.82~99об.
4. Kim Dania, On the problem of Korean revolution, 1928. 10.24., pp1~65,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59 л.246~310.
5. 임경석, ‘코민테른 조선위원회 속기록 연구-1928년 9월20일자 회의를 중심으로’, <사림> 76, 305~306쪽, 2021년 4월.
6. 임경석, ‘코민테른의 1928년 결정 초안과 조선 대표단’, <역사학보> 253호, 248~251쪽, 2022년 3월.
*임경석의 역사극장은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