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도 과거 이런 출판계 흐름이 존재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시절인 1997년 소설 <아버지> 열풍이 불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은 2008년 이후엔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인기를 끌었다. 힘든 시기에 ‘가족’을 찾는 책이 많았다면, 2010년대엔 ‘힐링’과 ‘위로’가 대세였다. 2010년대 전반기엔 <아프니까 청춘이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미움받을 용기> 등이 인기를 얻었다. 후반부턴 <언어의 온도>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같은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됐는데, 독자들이 책에서 깊은 지식보단 일상적인 위로를 얻으려 한다는 흐름을 보여줬다. 이 흐름이 2020년대에도 이어져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잡았다.
최근 흐름에서 백화점·편의점·부엌 등 공간이 눈에 띄는 배경으로는,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공간을 바라는 독자의 심리도 결합한 것으로 보인다. 장은수 문학평론가(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그동안의 한국 소설은 여기가 서울인지 뉴욕인지 알 수 없는 추상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없는 세계’에서 ‘있는 세계’로 가고 싶은 소설에 대한 기본적인 욕구, 일상의 구체성이 결합하길 바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구환회 교보문고 소설 분야 MD는 “최근 특정한 취미나 주제에 대해서 정해놓고 파고 들어가는 에세이 시리즈가 많이 나와 인기를 끌고 있다”며 “마찬가지로 내 삶에 정말 밀착돼 있는 구체적인 공간이 자세하게 명시돼서 문학 독자에게 좀더 눈길을 끄는 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무명작가’ ‘선 전자책, 후 종이책’도 하나의 경향이라 할 수 있다. 무명작가가 등단 같은 출판계의 문턱을 넘지 않고 전자책으로 인기를 얻은 뒤 종이책을 펴내고, 이 종이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꿈같은 이야기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의 이미예 작가와 <휴남동 서점> 황보름 작가는 모두 대기업을 다니다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불편한 편의점>의 김호연 작가는 몇 권의 소설책을 내긴 했지만 이름이 알려진 작가는 아니었다. <휴남동 서점>은 전자책 플랫폼 ‘밀리의 서재’에서 공개된 뒤 종이책으로 나왔고, <달러구트 꿈 백화점>은 전자책 플랫폼 ‘리디북스’에서 먼저 공개된 이후 종이책으로 나왔다.
2022년 9월14일 교보문고 서울 광화문점에 전시된 ‘힐링 소설’들. 김진수 선임기자
백원근 출판평론가(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웹툰, 웹소설을 연재하는 플랫폼이 많이 생기면서 많은 작가가 참여할 수 있게 됐고 업계에 활력을 줬다”며 “그 여파가 종이책 시장에도 밀려 들어와서 이제는 작가의 지명도보다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한 입소문이 중요하게 됐다”고 말했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과 <휴남동 서점>을 읽었다는 박상미(35)씨는 “소설 자체가 주는 감동과 위안도 있지만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고 심지어 베스트셀러가 될 수도 있다는 꿈같은 소설 바깥 이야기도 흥미로웠다”며 “무명작가가 입소문만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과정을 보는 것이 희망을 줬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공통점은 책 표지다. 백화점, 편의점, 도서관, 서점 등 표지에 상점 건물을 그린 것이다. 독자 입장에선 같은 출판사의 시리즈물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비슷하다. 실제로 <불편한 편의점>과 <휴남동 서점>은 다른 출판사에서 나왔지만, 두 표지 모두 일러스트레이터 반지수 작가가 그렸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과 <수상한 중고상점>의 표지는 일러스트레이터 제딧 작가가 그렸다. 업계에서는 이들이 그린 표지도 인기에 한몫했다고 본다. 이정아(25)씨는 “<불편한 편의점>이 ‘벚꽃 에디션’으로 표지 갈이를 했는데, 초판본이 있음에도 표지가 예뻐서 샀다”며 “대부분 표지가 예뻐서 모으는 재미가 있고 SNS에 사진을 찍어 올리기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비슷한 제목과 표지는 물론 내용이 비슷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소설에 식상함을 느끼는 독자도 있다. 김제훈(40)씨는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읽었는데 문장 수준이 낮고 개연성이 낮은데다 반전도 없어서 재미없었다”며 “비슷한 소설이 너무 많아서 헷갈리고 지친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형출판사의 편집자는 “당장은 책을 많이 팔기 위해서 비슷한 책을 낼 수도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출판사 브랜드 이미지에 타격을 줄 수도 있어 대형출판사는 이런 유행에 편승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백원근 평론가는 “최근 독자들이 책에서 추구하는 가치의 경계선이 무너진 것 같다”며 “구조가 탄탄하고 복선이 깔려 있고 문장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소설의 요소보단 재미와 공감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졌다”고 말했다. 장은수 평론가는 “(최근 유행하는 소설들이) 성찰이 충분하지 않고 단순한 전개라서 아쉽지만, 그럼에도 유의미한 현상이라고 본다”며 “공간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전부 추상적인 사유 놀이가 돼버리기도 하는데 공간성을 회복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히가시노 게이고, 2012아무도 살지 않는 오래된 잡화점에서 벌어지는 기묘하고 따뜻한 이야기.
<달러구트 꿈 백화점> 이미예, 2020‘무의식에서만 존재하는 꿈을 정말 사고팔 수 있을까?’라는 기발한 질문에 답을 찾아가며, 꿈을 만드는 사람, 파는 사람, 사는 사람의 비밀스러운 에피소드를 담은 판타지 소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매트 헤이그, 2021죽기로 결심한 주인공이 삶과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미스터리한 도서관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에서 눈을 뜨며 인생의 두 번째 기회를 얻는다.
<불편한 편의점> 김호연, 2021서울 청파동 골목 모퉁이에 자리잡은 작은 편의점을 무대로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의 삶의 속내와 희로애락을 따뜻하고 유머러스하게 담아낸 작품.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황보름, 2022책과 서점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스스로 일어서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이야기.
<책들의 부엌> 김지혜, 2022책과 어울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힐링하는 곳, 북카페 ‘소양리 북스 키친’이 문을 연다. 삶에 지친 사람들은 저마다의 고민을 안은 채 카페를 찾고, 맛있는 책 한 권과 함께 휴식을 취하며 위로받고 일상으로 돌아갈 힘을 얻는다.
<수상한 중고상점> 미치오 슈스케, 2022위로와 환대의 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중고상점 이야기. 2011년 국내에 소개된 뒤 재출간.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 무라세 다케시, 2022열차 사고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 사고 당일의 열차에 올라 사랑하는 이의 마지막을 함께할 방법이 있다는 소문이 돌자 그들은 간절한 그 순간을 위해 열차에 오른다.
<말도 안 되게 시끄러운 오르골 가게> 다키와 아사코, 2022정체 모를 투명한 기구를 귀에 착용하고 있는 점원은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흐르는 음악이 들린다며 세상에 하나뿐인 손님만의 오르골을 내주는데, 손님들은 오르골이 된 ‘마음속의 음악’을 듣고 잊었던 중요한 것을 기억해낸다.
<수상한 목욕탕> 마쓰오 유미, 2022사회에서 상처받은 두 자매가 우연히 ‘행운 목욕탕’을 운영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수수께끼들을 풀어나간다.
<하쿠다 사진관> 허태연, 2022제주도로 여행을 왔다가 우연히 사진관에서 일하게 된 주인공이 겪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