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둘래 제공
아이 셋이랑 피난을 어떻게 가나
다들 피난 갈 준비를 합니다. 미리 피난 갈 준비를 했다가 물이 넘치면 학교 뒷산 쪽에 가기로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두꺼운 옷을 입히고 어른들도 두꺼운 옷을 입습니다. 벌써 가게마다 손전등이 다 팔렸다고 합니다. 집에 물이 들어오면 소용 있을지는 모르지만 물건을 될 수 있는 대로 선반 위 높은 곳에 얹었습니다. 아들만 둘인 수호 아빠는 자기네는 중요한 물건과 이불 보따리를 챙겼다고 합니다. 아빠가 이불 보따리 위에 큰아들을 지고 중요한 물건을 들고 갈 거랍니다. 엄마는 작은아들을 업고 비상 양식을 들고 간답니다.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키우자’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수호 아빠는 역시 아이를 둘만 낳은 게 아주 현명한 일이라고 합니다. 6남매나 둔 소영이네는 할머니가 낮에 아이들을 데리고 미리 살구실(지명) 집으로 피난을 가셨다고 합니다. 집집에 자가용이 없어서 다들 걸어다니던 세월이었습니다. 우리 집은 아이가 셋이니 아무리 보따리를 챙겨도 무엇을 가져갈 수 없습니다. 남편이 큰아들을 업고 막내딸을 안고 가기로 했습니다. 나는 큰딸을 업고 앨범과 집문서와 통장과 돈이 든 가방을 들고 가기로 했습니다. 수호네처럼 비상 양식도 이불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남편이 “뭔 놈의 여편네가 닭장의 닭알 낳듯이 해마다 무슨 애를 낳아서 피난도 못 가게 생겼다”고 소리칩니다. 남편은 큰 강이 없는 제천 고암리 출신이라 낮에 평창강이 차오른 걸 보고 와서 더 겁먹은 것 같습니다. 어른들은 시루목 고개에 물이 넘치는지 줄지어 망봅니다. 여름이지만 밤공기는 썰렁해서 이불이 없으면 곤란할 것 같습니다. 다행히 시루목 고개에 물이 넘지 않아 모두 다 짐을 풀었습니다. 다음날 오랜만에 날씨가 활짝 개었습니다. 세상을 집어삼킬 듯이 사납던 날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지고 눈부신 해가 비춥니다. 사람들은 오랜만에 마당을 쓸면서 어제 시루목 고개에 물이 넘치지 않아 다행이라고 합니다. 막냇동생의 예쁜 친구는…
수마는 세상을 할퀴고 많은 슬픔을 남겼습니다. 친정 동네에서 스무 살도 안 된 남자애 셋이 강가에서 물 구경을 하다가 한 아이가 서 있는 발밑이 뚝 떨어져 흙탕물에 휩쓸려 떠내려갔답니다. 너무 기막혀서 이웃 사람들도 할 말을 잃었습니다. 학교에 간 막내 여동생이 울면서 왔습니다. 왜 우느냐고 물어도 너무 서럽게 울면서 대답을 못합니다. 막냇동생에겐 예쁜 친구가 있었습니다. 얼굴도 예쁘게 생겼는데 목소리는 더 예뻤습니다. “너는 이다음에 아나운서를 해라” 하니, 학교 선생님도 그런 말씀을 하신다고 합니다. 아이가 아주 밝고 예뻐서 어렵게 사는 줄 몰랐습니다. 그 친구는 아무도 없이 할머니랑 산 밑 오두막집에서 살았답니다. 할머니가 엄격해서 절대 다른 데서 자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밤에 숙제 때문에 친구네 집에 갔다가 비가 와도 굳이 늦게 집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할머니와 같이 자는데 산사태가 나서 손녀 자는 자리까지만 쓸고 지나갔답니다. 날이 밝아 찾아보니 저 마을 끝까지 떠내려가 흙더미 아래 발이 보여서 끌어내니 그 친구였답니다. 약수초등학교 아저씨는 얼굴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절름거리며 왔습니다. 산사태로 흙더미가 집을 덮쳤는데 아내와 큰딸은 살아나오고 자기는 떠내려가다 나뭇가지에 걸려 살아났는데, 막내딸은 주검도 찾지 못했답니다. 가끔 장날이면 보던 순박하고 맑은 네 가족은 우리와는 친척 같은 사이였습니다. 아저씨가 울면서 하는 이야기를 같이 울면서 들었습니다. 뭐라 위로할 말이 없습니다. 세상에 무슨 말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냥 남은 가족 입으라고 옷을 사고 우선 한 상을 차릴 만큼의 그릇과 양은솥, 큰 냄비, 작은 냄비를 사서 주며 힘내시라고, 남편이 아저씨를 버스부(터미널)까지 모셔다드렸습니다. 평소 정이 있는 사람 자부했는데
살구실 산비탈에 33살 생일 선물로 받은 조그만 원두충 밭이 있습니다. 남편이 정성을 다해 가꾸던 밭입니다. 장마가 지난 뒤 잠깐 가보기로 했습니다. 밭 가운데 제일 실하고 좋은 부분을 산사태가 쓸고 지나갔습니다. 세상 어떤 슬픈 소식보다 가슴이 싸하고 저렸습니다. 남의 죽음이 내 고뿔(감기)만 못하다는 속담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평소 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자부하며 살았는데, 원두충 밭을 보자마자 그것은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생각이었습니다. 세상 어떤 슬픈 사건보다 내 손해를 가장 슬프고 가슴 저려하는 속물스러운 나를 보았습니다.전순예 1945년생·<내가 사랑한 동물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