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열여덟, 쇠를 깎고 돈을 벌었다
죽음 아니면 보이지 않는 ‘2020년 전태일들’의 삶 담담히 적은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
등록 : 2020-12-13 20:13 수정 : 2020-12-17 10:01
특성화/마이스터고를 졸업했다. 현장실습생으로 중소기업에 취업했다. 같은 회사에서 산업기능요원(병역 대체)으로 3년7개월을 보냈다. 또래들이 요약노트·암기노트를 만들며 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 열여덟 살 청춘은 선반, 밀링·드릴링 머신, 고속절단기, 그라인더, 용접기 등 낯선 기계로 쇠를 깎고 업무일지를 썼다. 욕설과 폭력이 일상인 관계 속에서 억울함을 참으며 돈을 벌었다. 죽어라 일해도 늘 팍팍했다.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호밀밭 펴냄)를 펴낸 허태준 이야기다.
2020년 지금도 ‘청년 전태일’은 수없이 많다. 도시 바깥에 있는 공업단지처럼 평소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존재들.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없는데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비극이 있고 나서야 잠깐 그들의 이야기가 소비됐다가 금세 다시 잊혔다. 공장 기숙사엔 유령이 산다는 썰렁한 괴담도 돌았다. 20대 청년이 된 허태준은 회사를 나온 뒤 “모든 삶은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지나온 시절을 글로 옮기기 시작했다. 일하는 청(소)년, 대학생이 아닌 20대, 군인이 아닌 군복무자로 살아온 지은이가 어느 쪽에도 완전히 넘어가지 못한 채 ‘경계의 시간, 이름 없는 시절의 이야기’(부제)를 풀어놓은 방백이다.
버겁고 아득한 현실에서 누구를 원망하거나 비난할 법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추억이 너무 선명할 때는 글을 쓸 수가 없다. 감정이 금세 부풀어 오르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지은이는 담백한 에세이처럼 차분히 자신과 주변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우리는 모두 연결돼 있다고 말한다.
책은 크게 3개 장으로 짜였다. 책 제목이 된 1장은 10대의 감정과 치기까지 담긴 고교 시절 이야기다.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고 기계나 전자 과목을 배우지만, “여전히 시를 보면 가슴이 뛰고 공책 빈자리엔 수많은 문장”을 적어두던 때다. “하루 세 번 하늘 보기”는 답답한 일상의 숨통이자 나은 미래의 다짐이었다.
2장 ‘나는 그들을 외롭게 두지 않을 것이다’에선 산업기능요원으로 일하던 회사에서 겪은 크고 작은 사건과 갈등, 주변의 편견과 차별을 돌아본다. 청년 노동자들의 사망 소식에 가슴이 찢어지고,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아름다운 귀향을 바라던 마음이 오롯하다.
3장 ‘누구의 삶도 함부로 버려지지 않기를’에서 지은이의 눈은 개인적 경험에서 사회적 자각으로 확장된다. 한국에서만 매년 2천여 명의 목숨이 산업현장에서 꺼져가고, 300여 명은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한다. 지은이는 “숫자가 표현하지 못하는 삶의 질량”을 생각한다. “그래서 매일같이 마음이 무거워지는지 모르겠다”는, “글을 쓸수록 약해지고 작아진다”는 고백이야말로 독자와 우리 공동체의 가슴을 무겁게 누른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21이 찜한 새 책
가치 전쟁박승억 지음, 사월의책 펴냄, 1만6천원‘공정’이 사회적 화두다. 계급, 세대, 성별 등 저마다 다른 기준이 충돌하면서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는 현실은 역설적이다. 철학자인 지은이가 자유-평등, 개인-공동체, 현재-미래, 개인주의-이타주의 등 서로 경쟁하는 가치들을 둘러싼 딜레마를 사회사상사 맥락에서 살피고 새로운 공동체 규범을 모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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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물에 대하여안드리 스나이르 마그나손 지음, 노승영 옮김, 북하우스 펴냄, 1만7천원2019년 8월, 빙하의 나라 아이슬란드에서 ‘빙하 장례식’이 열렸다. 거대한 얼음땅 오크 빙하의 사망 선고는 상징적 시위이자 절박한 현실이다. 빙하 장례식의 비문을 쓴 지은이가 ‘물’을 소재로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말한다. 북유럽 신화, 과학자 인터뷰, 달라이 라마와의 대담 등을 곁들인 문학적 논픽션.
한없이 사악하고 더없이 관대한리처드 랭엄 지음, 이유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2만2천원인간은 남을 위해 목숨을 내주기도, 수백만 명을 학살하기도 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미국 진화인류학자가 천사와 악마 두 얼굴을 가진 인간 본성의 수수께끼를 풀어간다. 고생물학·신경생리학·뇌과학부터 고고학·형법학·사회사상까지 자연과학과 인문사회학을 넘나들며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