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전태관 형님, 잘 계시죠?

형님 가신 지 한 달, 봄여름가을겨울
30주년 기념공연이 끝난 뒤 하늘에는 거짓말 (같은) 눈이…

1249
등록 : 2019-02-02 01:34 수정 : 2019-02-12 12:10

크게 작게

‘봄여름가을겨울 30주년 콘서트’ 무대에 선 김종진은 세상을 떠난 친구 전태관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했다. 봄여름가을겨울 제공

“사진을 보았죠/ 그댄 웃는 모습이네요/ 거울에 비친 나는/ 아무 표정이 없어” 노래하는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 뒤로 흑백사진들이 흘렀다. 거기엔 앳된 얼굴의 김종진과 전태관이 있었다. 1988년 첫 앨범을 발표한 이후 어느덧 30년. 사진 속 두 남자의 모습에는 봄여름가을겨울의 지난 30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거꾸로 흐르는 시간은 없다 하네요/ 그건 고장난 시계라 하네요/ 그럼 내 시계는 망가졌나봐/ 자꾸 뒤로만 자꾸 뒤로만/ 거꾸로 흘러만 가네”

노래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돌아갈 수 없는 건가요/ 그때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우린 할 수 있을 거예요/ 못한다는 말은 말아요/ 다시 돌이킬 수 있어요” 후렴을 반복하던 김종진이 북받치는 슬픔을 삼키지 못하고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목이 메어 노래를 이어가기 힘들어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뒤에서 든든하게 받쳐줬을 전태관은 그 자리에 없었다. 전태관이 늘 지켰던 드럼 세트 앞에는 다른 드러머가 앉아 있었다. 봄여름가을겨울 데뷔 30돌 공연은 그렇게 김종진 혼자 서는 무대가 됐다.

주요 음원 사이트에서 음원을 거둬들인 그들

김종진과 전태관은 1962년생 동갑내기 친구다. 음악에 푹 빠진 둘은 1980년대 중반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에 몸담으며 음악인의 길을 걸었다. 김현식의 백밴드로, 김종진(기타)·전태관(드럼)·유재하(건반)·장기호(베이스)가 초대 멤버였다. 유재하와 장기호가 잇따라 밴드를 나가자 남은 김종진과 전태관은 1988년 봄여름가을겨울 이름으로 데뷔 앨범을 발표하며 자신들만의 음악세계를 펼쳐나갔다.

모두 8장의 정규 앨범을 통해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 <어떤 이의 꿈> <아웃사이더> <브라보 마이 라이프> 등 수많은 히트곡을 냈다. 퓨전재즈, 블루스록, 펑크 등을 아우르는 세련된 작법으로 한국 대중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지난해 한겨레·멜론·태림스코어 공동기획으로 선정한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에서 봄여름가을겨울 1집과 2집이 각각 35위와 86위를 차지했다.

내가 두 사람을 처음 만난 건 2012년 가을이었다. 봄여름가을겨울이 <브라보 마이 라이프> 10주년 기념 앨범을 발표한 직후였다. 하지만 이들의 음악을 주요 음원 사이트에선 들을 수 없었다. 스스로 자신들의 음원을 모두 거둬들였기 때문이다. “온라인 음원 시장도 엄연히 ‘시장의 원리’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데, 국내 시장은 가격을 공급자 뜻과 무관하게 일률적으로 매기는 방식이잖아요. 게다가 무제한 실시간 듣기에 곡당 다운로드 가격이 60원까지 떨어지는 정액제 상품에 강제로 편입돼야 하죠. 이에 반대하는 뜻으로 음원을 뺐어요.” 전태관은 차분하면서도 힘있게 말했다.


이들은 당시 음악인 스스로 가격을 정하고 판매가의 80%를 돌려받는 음원 사이트 ‘현대카드 뮤직’과 앨범 단위로만 내려받을 수 있는 네이버뮤직 ‘뮤직 플러그’에만 음원을 공급하기로 했다. “음원이 많이 팔리면 좋겠지만, 안 팔려도 상관없어요. 얼마 안 팔려도 세상을 바꾼 물건은 많으니까요. 이번 사례를 계기로 음원 시장 트렌드가 바뀔 수도 있다고 봐요. 인디밴드를 비롯한 후배 음악인들이 음악만 하고도 먹고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면 우리 같은 선배들이 깃발 들고 나서야 합니다.” 김종진이 말했다. 이들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지만, 문제의식에 적잖은 이가 공감했다. 이후 디지털 음원 시장은 느리지만 조금씩 개선됐다.

“1996년 전태관은 코스닥을 사랑했죠”

존경하던 음악인과 깊은 얘기를 나눈 뒤로 나는 둘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갔다. 공연을 찾아다니고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2012년 그해 전태관이 신장암 발병으로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나는 뒤늦게 알았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암 초기였고 수술도 성공적으로 잘 끝났다 했다. 하지만 2년 뒤 암세포가 어깨로 전이됐고, 좀처럼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전태관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김종진에게서 소식을 전해들을 뿐이었다. 점차 좋아지고 있다는 말에 한때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그는 우리 곁을 떠났다. 2018년 12월27일 밤이었다.

봄여름가을겨울은 지금 데뷔 30돌 공연을 하고 있다. 1월16~27일, 2월13~24일 서울 서교동 구름아래 소극장에서 모두 30차례 ‘봄여름가을겨울 30주년 소극장 콘서트’를 한다. 해당 기간에 월요일과 화요일을 빼고 매일 열리는 장기 공연이다. 나는 지난 1월24일 9회 공연을 찾았다.

김종진은 첫 공연에선 데뷔한 해인 1988년 얘기를, 두 번째 공연에선 1989년 얘기를 했다고 했다. 9회 공연에선 1996년 얘기를 할 차례였다. “응답하라 1996, 그해엔 코스닥이 처음 개장했어요. 전태관이 코스닥을 그렇게 사랑했죠. 틈만 나면 단말기 열고.”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해 우린 아주 펑키한 곡을 발표했어요. 《바나나 쉐이크》 앨범, 망했어요. 케이스를 은색 알루미늄으로 주문 제작했는데, 납품가가 비싸서 팔릴수록 손해였어요. 방송국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 출연하러 갔다가 사운드 체크 후 시간이 남아 아무도 없는 대기실에서 태관이와 둘이서 카드를 쳤는데, 그게 높은 사람 귀에 들어가 그다음 주 방송 정지 먹었어요. 폭망했죠.” ‘웃픈’ 이야기에 나는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그래도 살아남았어요. 23년을 더 버텨 오늘까지 왔어요. 우리가 이렇게 음악을 연주하고 여러분이 그걸 감상하는 것 자체가 기적 같아요.” 그제야 박수 치며 웃을 수 있었다. 순간, 전태관의 빈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함께 있었더라면….

공연이 절정에 이를 무렵, 김종진이 말했다. “전태관을 위한 곡을 준비했어요. 마지막으로 태관과 함께 작업한 곡입니다. 지난 공연 때마다 너무 울어서 제대로 못 불렀어요. 울지 않기로 약속했는데 오늘도 지키기 힘들 것 같네요.” 그는 <고장난 시계>를 불렀다. 2013년 발표한 25주년 베스트 앨범 《그르르릉!》(GRRRNG!)에 수록한 신곡이다. 스스로 예언한 대로 김종진은 울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나도 가슴으로 함께 울었다.

지키지 못한 ‘울지 않겠다’는 약속

앙코르곡 <브라보 마이 라이프>까지 부르고 난 뒤 김종진이 말했다. “공연을 하고 나니 막혔던 게 쑥 내려갔어요.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밖에 나가면 함박눈이라도 펑펑 내릴 것 같군요.” 공연장을 나오는데, 거짓말처럼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늘에서 전태관이 내려준 선물이 아닐까, 생각했다. 알고 보니 인공으로 뿌린 눈이었다. 그러면 어떤가. 난 그냥 전태관의 선물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형님, 선물 고맙습니다. 잘 계시죠?

서정민 <한겨레> 기자 westmin@hani.co.kr

독자 퍼스트 언론, <한겨레21>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