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가 고개를 숙이면 가을이 온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여름에 살 녹이고, 겨울에 살 찌우고 전남 보성 득량 사는 농부가 다녀갔다. 지난겨울 다녀가고 여덟 달 만에 다시 보는데 얼굴은 청동빛으로 그을리고 눈이 퀭하다. 몸은 마르고 머리카락은 검은머리 반, 흰머리 반이다. 그를 처음 만난 건 재작년 딱 이맘때였다. 득량만 방파제에서 어정거릴 때 농부는 건들거리며 나에게 다가왔었다. 봄부터 이맘때까지 농사지어놓고 나락 모가지 꺾어지자 안심한 거다. 부인과 함께 바닷바람을 쏘이러 나온 그의 낯빛은 편안해 보였다. 올해는 그해보다 무더워서였는지 수척하고 지쳐 보였지만 식당을 찾은 그의 눈빛은 그해와 다름없이 편안해 보였다. 군산 사는 어미도 며칠 전 다녀갔다. 득량 농부나 다름없이 그을리고 마르고 볼품없다. 안 그래도 작은 사람인데 살 빠지고 그을리자 꼬부랑 할매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눈빛은 편안하다. 농사 다 지어놓은 거다. 여름내 풀 매고 북돋워주고 거름 지어 날라 키워냈을 것이다. 더위에 녹아내린 몸이 거름 되고 뜨거운 해 받아 반짝반짝 윤기 흐르는 참깨, 콩, 호박 되었을 것이다. 그것들 거둬들이기 전에 잠시 쉬어가는 참에 친구 보러, 자식 얼굴 한번 보러 다녀가신 게다. 그렇게 쉬고 몸에 기운을 담아 수확을 마치면 그것으로 다시 살을 찌운다. 자신의 살을 녹여 키운 것들을 먹고 살을 찌워 이듬해 봄을 대비한다. 어미는 70년을 그리 살아왔다. 여름이면 살이 빠지고 겨울이면 살이 오르는 모습을 평생 지켜봤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올해는 유난히 수척하고 말랐다. 그만큼 무더웠던 날들을 견디며 키워내느라 살이 녹고 머리가 쇠었을 것이다. 가을이라 부르기 무색하지 않을 들판에 서서 두 농부를 떠올렸다. 그렇게 몸을 녹여가며 농사지었을 사람들이지만 부럽고 또 부러웠다.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반드시 결실을 맺는, 진리에 가까운 명징함을 눈으로 확인하고 안심하며 쉬어갈 수 있는 그들이 부럽기 그지없었다. 5분이 지났다.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전화기를 열어 시간을 본다. 늦었다. 겨우 5분에도 조바심이 난다. 조바심에 겨우 하루도 쉬어가지 못하고 조바심에 겨우 5분도 지체할 수 없다. 차에 오른다. 속도를 높인다. 속도로 지체한 5분을 만회하려 애쓴다. 헐레벌떡 도착한 나는 안심 대신 허무를 느끼며 의자에 앉아 냉수 한 컵을 들이켠다. 안심과 허무는 어쩜 그리도 닮은 반대꼴일까. 느려터져도 잘 견딘다 고향 친구가 도시에서 살아가는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반평생을 도시에서 살았으면서 우리는 어쩌자고 그렇게 약삭빠르지 못하고 느려터진 게냐. 착해빠져가꼬….” “태생이 촌노메 새끼들이라 그렇지. 촌것들이 다 그렇지.” 겨우겨우 견뎌낸다. 촌것들이 참고 견디는 건 또 잘한다. 전호용 식당 주인·<알고나 먹자> 저자 ※‘어정밥상 건들잡설’ 연재를 마칩니다. 좋은 글 보내주신 전호용님과 칼럼을 아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독자 퍼스트 언론, <한겨레21>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