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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9첩반상에 담긴 한국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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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2-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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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7첩~9첩반상 규모의 겸상차림.

성북동 한옥 골목에 있는 미진(02-745-0046)은 서울의 반가 상차림이 그대로 이어져오는 전통한식집이다. 궁중 진찬과 양반집 연회상에 오르는 것으로 7첩 또는 9첩반상 규모의 소박하면서도 멋스러운 상차림을 차려내 고유한 한식의 진면모를 제대로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이같은 상차림은 그 내력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미진을 창업한 이문옥(작고) 할머니는 처녀 시절 궁중 나인이던 고모로부터 궁중한식과 상 괴는 법을 익혀 젊었을 때부터 서울의 이름난 큰 상차림을 도맡아 차리러 다녔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경무대와 이화장은 물론 역대 대통령의 가사모임의 상차림을 맡는 등, 90년대 초까지도 국빈을 접대하거나 서울 명문집들의 큰 상차림에 이씨의 손맛이 닿지 않은 곳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지금은 80년 봄부터 시어머니의 말년을 그림자처럼 뒷바라지했던 며느리 이영주(43)씨와 장남 신영균(48)씨가 대물림해 가업으로 잇고 있다. 이씨가 괴던 명가의 상차림들을 그대로 이어오는 것은 물론 포철 영빈관과 대한항공 영빈관의 귀빈 접대와 현대 영빈관에 초대되는 월드컵 임원들의 상차림도 맡고 있다고 한다.

이들 부부가 차려내는 상차림의 특징은 최근 유행하고 있는 코스요리 형식의 한정식이 아니고, 5첩, 7첩, 9첩반상에 해당하는 식사 중심의 연회상을 한번에 차려 한식 고유의 격식을 그대로 지켜오고 있다는 것이다. 재료의 선택과 조리과정도 옛 방식대로 화학조미료나 향신료를 일체 사용하지 않고 간과 양념을 우리 장과 천연소재로 직접 만들어 사용해 담백하고 뒷맛이 깔끔하다. 살림집과는 별채로 오랜 한옥에 쪽간판이 하나 걸려 있을 뿐 가정집이나 크게 다를 것이 없는 식당은 대청을 비롯해 크고 작은 방이 6개, 4∼5인 기준 25만∼30만원인 겸상차림이 주고, 점심에는 임금님 수라상에서 유래했다는 돌솥밥을 청송 신천약수를 길어다 지어 교자상차림으로 1인분 1만원에 낸다.

큰상차림에는 예약시 선택이 가능한 호박죽, 흑임자죽, 은행죽 등, 죽을 시작으로 쇠고기 구이와 찜, 너비아니, 떡갈비, 편육이 있고, 생선류는 도미와 민어, 조기 등을 계절에 맞춰 구이와 찜으로 올린다. 또 삼색나물과 철따라 나는 각종 산채와 야채류를 숙채나 생채로 무쳐 내고, 김치도 물김치, 배추김치, 깍두기를 기본으로 3∼4가지, 밑반찬으로 젓갈과 장아찌, 조림과 초, 포, 자반, 부각, 튀각, 무침, 장류 등이 짜임새 있게 갖춰져 있다. 여기에 신선로와 구절판, 냉채류와 전복구이, 산적, 모듬전 등 일품요리가 상 가운데를 장식해 그윽한 상 분위기가 볼 만하다. 식후 소반에 받쳐 내는 다과상도 찹쌀 경단이나 송편을 식혜와 과일을 곁들여 내는데 이 역시 인상적이다.

가까운 대학가의 교수들과 시내에서 예약하고 오는 단골고객들이 주를 이루고, 전철 한성대 입구인 삼선교에 내려 4∼5분쯤 걸어 오르는 한적한 골목길도 옛 모습 그대로다. 연말연시에 조용한 식사모임 자리로 한번쯤 문을 두드려볼 만하다.


나도 주방장|찹쌀경단과 식혜

쫄깃한 경단, 식혜로 마무리

최근 시내 한정식집들에서 내는 코스요리 형식의 한정식이 웬만하면 1인 10만원대를 넘어서고 있고, 심지어 두당 36만원대의 한정식까지 등장해 화제를 모은다. 이런 곳일수록 한식은 물론 양식, 중식, 일식 등 지구촌 산해진미와 퓨전요리까지 차례로 올라 세계화로 가는 한국의 위상을 보는 듯하다고 한다.

이에 비하면 미진의 상차림은 소박하기 이를 데 없다. 보기에도 그렇고 맛도 그러하다. 하지만 담백하면서 나무랄 데 없는 기품과 크게 꾸민 데가 없으면서도 짜임새 있고 자연스럽다. 특히 식사가 끝날 무렵 소반에 차려 나오는 다과상의 모습은 말 그대로 반가 여인의 자상하고 깔끔한 여심을 그대로 닮고 있다.

이같은 다과상은 누구나 손쉽게 만들 수 있어 가정에서도 옮겨볼 만하다. 곱게 빻아 온 찹쌀가루와 콩고물을 냉동실에 저장해놓고, 필요한 만큼씩 꺼내 약간 된 듯하게 반죽해 동글동글 빚는다. 이를 팔팔 끓는 물에 삶아내 즉석에서 콩고물을 발라 식기 전에 접시에 담고 식혜와 과일을 곁들여 내면 어떤 상차림에도 손색이 없다. 쫄깃하면서 부드러운 맛이 인절미와 또다른 맛이 있다. 고소하고 쫀득한 경단이 시원하고 달착지근한 식혜맛과 어우러지며 기분 좋게 식사를 마무리해준다.



글·사진 김순경/ 음식 칼럼니스트 www.OB-gre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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