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국방부 구청사는 1970년 완공됐다. 당시만 해도 중앙청 규모와 맞먹는 초호화 건물이었다. 건물의 정면이 정확히 청와대를 바라본다.이세영
서울 용산에 있는 국방부 구관은 1970년 완공됐다. 대지 조성 공사가 시작된 것은 1966년 4월. 박정희의 통치 기간 사실상 유일했던 군사반란 사건에 대해 사법 처리가 마무리된 직후였다. 1965년 5월 적발된 이른바 ‘원충연 반혁명 사건’이다. 5·16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대변인으로 활약하기도 했던 원충연(당시 대령)은 권력에서 소외된 육사 5~8기 비주류와 이북 출신 30~40대 영관 장교들을 중심으로 박정희의 미국 순방 기간을 틈타 정권을 전복할 계획을 세웠지만 내부자 밀고로 실패했다. 적발 당시 이들은 병력 동원과 유엔군사령부와의 접촉 방안까지 마련한 상태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군부 내 박정희 비토 세력은 완전히 뿌리 뽑히게 된다. 중앙청 규모와 맞먹었던 초호화 건물 군 장악이 완성된 직후 들어섰다는 점에서 국방부 청사는 통치자 박정희의 무력 기반을 상징하는 건물이기도 했다. 규모와 시설 수준부터 남달랐다. 완공 직후인 1970년 11월26일 국회 예산결산위원회에서 “새 국방부 청사가 미국 펜타곤을 뺨칠 정도로 호화 청사”(최치환 공화당 의원)라는 지적이 나왔을 정도다. 건평 8300평은 당시 중앙청(건평 1만 평) 규모와 맞먹었고, 13억원이 투입된 공사비는 비슷한 시기 완공된 세종로 정부종합청사(21억원)보다 적지만 단일 청사로는 최고액이었다. 시공사인 대림산업 사사(社史)는 이렇게 기록한다. “고속 엘리베이터, 자가발전 설비, 냉난방 및 환기 시설, 전자동 제어장치, 화재 경보 장치 등 최신 설비를 갖춤으로써 최고급 빌딩이라는 평판을 들었다. 특히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무량판공법에 의해 시공된 복도를 고급 대리석으로 마감하여 건물 내부의 중후함과 세련미를 갖춘 것으로 평가를 받았다.”(<대림산업 60년사>) 설계는 당시 국내 최대 설계사무소인 종합건축연구소가 맡았다. 1955년 서울 대방동 공군본부를 설계한 바 있는 종합건축은 이즈음 세종로 종합청사 설계도 함께 진행했는데, 국방부 청사 실무를 총괄한 것은 당시 20대 후반의 이호진(현 건국대 명예교수)이었다. 연세대 건축학과 김정수 교수 밑에서 공부한 그는 대학원생 신분이던 1966년, 국방부가 발주한 청사 기본설계 현상공모에 당선돼 화제를 뿌렸다. 이호진은 “당시로선 최대 규모 현상설계여서 쟁쟁한 건축가들이 대거 참여했는데, 예상을 깨고 대학원생인 내 작품이 덜컥 당선되니 여기저기서 말이 많았다. 실시설계를 위해 과거 몸담았던 종합건축에 다시 들어가 기획팀장으로 일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건축주가 요구한 것은 사무빌딩의 기능적 편의성과 군사시설로서의 보안성, 민원업무 처리의 용이성이었다. 경사지라는 지형 특성을 활용해 민원시설은 아래쪽 이태원로변으로 내리고 보안이 필요한 메인 건물은 대로변과 이격된 언덕으로 올려 엄격한 출입 관리를 가능케 했다. 그러나 건축주의 주문은 기능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았다. 이호진은 “시절이 시절인 만큼 국민을 호령하는 군부의 권위를 외형으로 표현해야 했다. 견고하고 웅장한 인상을 주는 좌우대칭의 박스형 건물을 고지대에 앉힌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라고 했다. 장방형 입방체의 사면에 수평띠 형태로 창을 두르고 최상층의 벽면을 다른 층보다 높게 처리한 것 역시 안정감과 중량감을 강조하기 위한 고려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건물 중앙에서 정면으로 가상의 선을 그으면 서울의 중심가인 세종로를 지나 대통령의 거처인 청와대와 만난다는 점이다. 국민 위에 군림하면서도 그 시선은 오로지 최고권력자에게 고정하겠다는 완강한 의지처럼 읽힌다. 통수권자를 향한 일편단심일까, 언제든 권력의 중핵으로 육박해 들어가겠다는 합법적 무력집단의 숨길 수 없는 욕망일까. “국민 호령하는 군의 권위 표현했다” 건물이 탄생한 박정희 시대는 사회 전체가 거대한 병영이었다. 군부는 무력만 쥐고 있는 게 아니었다. 청와대뿐 아니라 행정과 입법, 사회의 각 부문까지 군 출신이 장악했다. 군인 천하가 된 것은 단지 통치자의 출신 배경이 군이어서가 아니었다. 전쟁과 분단이라는 역사적 배경과 냉전이란 지정학적 요인 역시 결정적이었는데, 군사반란이 터진 1960년대 초 한국의 군부는 이미 최대 사회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정부 수립 당시 5만 명 수준이던 병력 규모는 전쟁 직후인 1954년 72만 명까지 늘어난 뒤 1959년 이후 60만 명 수준을 유지했다. 예산 역시 군부에 집중돼 있었다. 당시 군이 운용하는 예산은 국가 예산의 50.7%를 차지했고, 미국으로부터 연평균 2억3천만달러의 군사원조금이 들어왔다. 이런 연유로 군은 집권당의 가장 확실한 정치자금 확보 통로로 활용됐는데, 이 과정에서 권력 핵심부와 연계된 군부 실력자들의 ‘정치화’ 경향도 노골화됐다. 문제는 군의 이같은 ‘과잉 성장’과 수뇌부의 ‘정치화’가 정권에서 소외된 비주류 장교 집단의 야심가들을 자극해 무력을 동원한 정권 찬탈을 꿈꾸게 했다는 점이다.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이후 꾸준히 군사반란을 도모하던 박정희는 결국 1961년 5월 이를 실행에 옮긴다.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는 위기가 닥칠 때마다 계엄령과 위수령을 발동해 군을 정치사회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였다. 1964년 한-일 협정 파동 국면과 1971년 대학가의 교련 반대 시위에 군이 투입됐고, 1972년 친위쿠데타(유신) 이후에는 비상군법회의를 설치해 사법부마저 무력화했다. 군인들의 정부·정치권 진출도 활발하게 이뤄져 3공화국 기간 중 군 출신의 국회의원과 각료의 충원율은 각각 16%와 29.2%에 달했다. 물론 근대화 과정에서 군이 담당한 기능에는 긍정적 요소도 있었다. 미국의 대규모 원조 덕에 1950년대의 군은 가장 첨단화된 기술과 장비를 보유한 집단이었다. 대규모 군사 유학을 통해 미국의 정교한 행정관리 기법을 전수받은 것도 군이었다. 따라서 군부정권의 수립은 군이 갖고 있던 장비와 기술, 근대적 조직관리 기법을 사회 부문으로 이전시킴으로써 산업화의 초기 국면에 무시 못할 성장 동력을 제공한 것도 사실이었다. 군이 국가·사회의 전 부문을 압도하던 시기, 군부 집단의 위세를 상징하는 건물이지만, 이곳에도 말 못할 비애가 있었다. 무엇보다 국방부는 군의 실질적 통제기관이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통치자 박정희의 용병술 때문이기도 했다. 명목상 국방부 장관은 통수권자인 대통령을 보좌해 군령(지휘권)과 군정(인사·행정권)을 통괄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지만, 박정희는 국방부를 제쳐둔 채 군 수뇌부를 직접 관리·통제했다. 박정희가 선호한 것은 권력 분산을 통한 분할지배였다. 육군참모총장을 정점으로 한 지휘 라인과 보안사령관이 관할하는 정보통제기구로 계통을 이원화함으로써 실질적 2인자의 출현을 봉쇄하고 상호 견제와 충성 경쟁을 유발했던 것이다. 12·12 당시의 치욕은 고스란히… 국방부의 수모는 1979년 박정희의 친위 장교집단인 전두환의 하나회가 주도한 12·12 반란 때 극에 달했다. 당시 국방장관인 노재현은 신군부의 계엄사령관 연행 소식을 듣고 미8군 영내로 대피하는 등 상황 수습을 못한 채 갈팡질팡했다. 이후 집무실로 복귀한 그는 국방부를 장악하려고 진입한 공수부대 병력과 청사 경비부대의 총격전에 놀라 지하벙커로 피신했다가 반란군에 붙들려 보안사로 연행된 뒤 군사반란을 승인하고 만다. 이날 총격전으로 청사에서는 3명이 죽고 20여 명이 다쳤다. 군에 대한 민의 통제가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1987년 민주화를 거쳐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이후였다. 이로써 한국의 군부는 정치적 상수 집단의 지위를 상실했다. 그러나 군 전체의 위상 조정은 군에 대한 국방부(정부)의 장악력을 상대적으로 높여놓은 것도 사실이었다. 군에 대한 관리와 통제가 정상성을 회복하게 되자 늘어난 행정·지휘 기능을 수용할 새 청사 건립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결국 2003년 국방부 경내에 새 청사를 마련해 장관실을 포함한 대부분의 주요 부서들이 옮겨갔다. 신청사가 개관한 뒤 한동안 국방부 별관으로 사용되던 이 곳은 현재 리모델링 공사를 위해 건물 전체를 비워둔 상태다. 공사가 끝나면 국방홍보원과 전산원 등이 입주할 계획이라고 한다. 군인들은 병영으로 돌아갔지만, 박정희 통치 18년이 남긴 병영사회의 유산은 그가 죽고 35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익집단을 형성한 퇴역 군인들은 어느 순간 ‘아스팔트 우익’의 주력으로 성장했고, 기억에서 사라진 예비역 정치장교들이 떼지어 목청 높이는 일도 빈번해졌다. 전두환 사조직의 맹원이었던 인물이 입법부 수장에 오르는가 하면, 군 출신 강경파가 정보기관장과 안보 라인 핵심을 장악하는 상황까지 치달았다. ‘재군사화의 초기 징후’라는 진단이 나오는 것도 근거 없는 기우는 아닌 듯하다. 그러나 믿는 것은 역사가 그렇듯 쉽게 역진할 리 없다는 경험칙이다. ‘늙은 제복들’에게 절실한 건 말년의 자존감을 지탱해줄 세간의 인정과 경제력이지, 사반세기 전 잃어버린 정치권력은 아니잖은가. 이세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