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학생회관 전경. 초대 학생회관장 반피득은 하늘로 치솟은 고딕식 아치창이 신과 인간의 관계를, 횡으로 결속된 창들의 연쇄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표상한다고 했다. 이 건물은 건축의 어휘로 번안된 종교적 상징, 십자가였다.이세영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을 계기로 긴 침체기에 접어든 학생운동은 1978~79년 반유신 투쟁과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잠시 숨통을 틔우는 듯하더니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로 된서리를 맞고 다시 한번 물밑으로 잠복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학생회관 3층의 서클룸들은 이런저런 ‘언더 패밀리’의 은거지였다. 그들은 광주에서 들려온 학살의 풍문에 경악했고, ‘살아남은 자’의 수치심을 함께 나누며 끈끈한 연대의식을 다져나갔다. “나는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 부끄럽다”(김남주, ‘혁명은 패배로 끝나고’)는 시인의 옥중 절규야말로 죽음 앞에 몸 사린 ‘비겁한 먹물’들의 참회 섞인 고해문이었다. 전투적 급진주의자들의 인큐베이터 이 건물이 활력을 회복한 건 1983년 학원 자율화 조치가 단행되면서부터다. 교정에 상주하던 경찰력이 철수하고 자치기구인 총학생회가 부활했다. ‘동아리방’으로 이름 바뀐 서클룸에선 ‘매스’(Mass·학생대중)를 상대로 한 반공개 의식화 교육이 성행했다. 앞선 세대의 실패가 과학적 세계관과 정교한 전략·전술의 부재 탓이라 확신했기에, 이 아비 없는 후레자식 세대는 권력이 설정한 금서들의 목록을 들춰 폭력과 참상으로 얼룩진 현행 질서를 뒤엎을 치명적 무기를 벼리고자 했다. 그들이 훔쳐본 금서들의 색인록에는 마르크스·레닌·트로츠키·김일성 같은, 오랜 세월 봉인돼온 불온한 고유명사들이 곳곳에 박혀 있었다.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기형도, ‘대학시절’)던 강퍅한 시절이었으니, 그들의 가슴팍에 찍힐지 모를 배교의 낙인 따위는 괘념할 일이 아니었다. 그 시절 이 건물은 세계에서 가장 전투적인 급진주의자들의 인큐베이터였다. 첨두아치에 구현됐던 신의 존엄성은 ‘혁명’이란 이상(理想)의 지고함으로 간단없이 대체됐다. 수평 결속된 연속 아치에 담아내려 한 인간의 상호의존성은 추상적 인간이 아닌 노동자·농민이라는 현실 속 인간(민중)과의 연대로 구체화됐다. 당연한 귀결이었다. 한 건축물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건립 주체의 의지나 의도가 아닌, 그곳을 점유하고 이용하는 자들의 ‘공간적 실천’이란 사실을 건축가와 건축주는 간과했던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식으로 말하면 ‘공간의 의미’는 그것의 ‘용법’에 다름 아니었다. 1980년대 이 건물을 지배하던 주된 정조는 ‘진정성’이었다. 건축가와 건축주가 구현하려던 ‘신실성’은 1974년 건물 후방에 신축된 학교 예배당에 격리 연금됐다. 라이오넬 트릴링의 정의에 따르면, 신실성은 “자신에게 거짓되지 않은 동시에 타인도 진실하기를 원하는” 종교적 품행과 관련된다. 반면 진정성은 “참된 자아 실현의 열정을 가로막는 사회적 힘과의 대결을 마다하지 않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태도다. 생존자의 죄의식과 피억압자와의 동일시를 통해 마련된 1980년대식 진정성은 불의하고 부도덕한 현실 권력과의 집단 투쟁을 통해 적극적으로 표출돼야 했다. “나는 다만 이 시대에 감전된 것이다./ 새까맣게 타버린 오장육부,/ 이건 한 시대에 헌납한 아주 작은 징세에 불과하다.”(황지우, ‘나는 너다 33.’) 해마다 봄이면 ‘광주’를 호명하는 검은 만장이 건물 전면에 내걸렸고, 1층 로비와 4층 소극장에선 회합과 농성, 단식이 줄을 이었다. 학생들에게 이공간은 국가권력과 대학 관료들의 손길이 상대적으로 덜 미치는 일종의 ‘안가’ 같은 곳이었다. 수배자 검거나 시위 용품 압수를 명분 삼은 공권력의 ‘침탈’이 주기적으로 반복되긴 했지만, 웬만한 동아리방의 캐비닛 뒤편엔 공사장 지지대로 쓰이던 자위용 쇠파이프 서너 개쯤은 늘 은닉돼 있었고, 박스에 담긴 연푸른 유리병들은 언제라도 투명한 인화물질을 담고 허공을 비상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한열·강경대… 만개한 진정성의 시대 하지만 연세대는 당시까지도 학생운동의 중심은 아니었다. 이론과 전략의 생산 능력은 ‘관악’에 뒤졌고, 조직력과 활동의 전투성에선 ‘안암’에 못 미쳤다. 이런 이유로 학생회관이란 공간의 의미 역시 신촌이란 공간의 국지성을 뛰어넘어 폭넓게 공유되진 못했는데, 이곳이 한국 학생운동의 상징 공간으로 떠오른 건 1987년 6월항쟁과 이한열의 죽음을 겪으면서부터다. 이 건물 3층 모서리방에서 짧은 젊음을 불태우던 이한열은 1987년 6월9일 교문 앞 시위 도중 경찰이 쏜 폭동진압용 총유탄에 머리를 직격당해 쓰러졌다.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던 6월 한 달, 그가 20대의 대부분을 보낸 학생회관은 내·외신의 핵심 취재 포스트였고, 그가 떠난 뒤 1층 로비에 차려진 빈소에는 학생과 시민들의 끝 모를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이한열의 ‘의로운 죽음’은 동료들에게 ‘시대의 부름에 진실하게 응답한 결과’로 받아들여졌는데, 이같은 분위기는 1980~90년대를 거치며 수많은 ‘열사의 신화’가 탄생한 배경이기도 했다. 그러나 체제의 견고한 방벽 앞에서 실존의 결단 위에 도모된 ‘진정성’의 추구는 사실상 실패가 예고된 프로젝트였다. 진정성의 실현을 위해선 그것이 비루한 현세의 논리에 오염되기 전 “가장 순수하고, 강렬하고, 진지하고, 아름다운 극점에서 운동을 멈추는 운명적 정지”(김홍중)가 요구됐는데, 이 점에서 ‘요절’이란 삶-죽음의 형식은 실로 진정한 ‘아우라의 실현’이자 ‘진정성의 완성’이었다. 시인 기형도는 썼다.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는 추악하다”(‘노인들’). ‘죽음’의 사건화는 1991년 봄, 다시 한번 비극의 절정에 도달했다. 비극의 주 무대는 이번에도 역시 연세대 학생회관이었다. 시위 도중 경찰에게 맞아 숨진 명지대생 강경대의 주검이 세브란스 영안실로 들어오며 시작된 그해 5월은 한국 학생운동사의 정점이자, 1980년대를 관통한 전투적 급진주의의 클라이맥스였다. 건물 3층에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등 전국 단위 운동조직들의 결합체인 범국민대책회의가 꾸려졌다. 그들이 조직한 시위는 전국적으로 20만~50만 명의 참가자를 동원했으나,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해 5월을 지배한 죽음의 형식은 자살, 그것도 자기 몸을 불사르는 분신자살이었다. 그러나 50여 일에 걸친 11명의 연쇄 분신은 그 싸움을 ‘무겁고 지루한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함께 낳았다. 자살이라는 극단의 저항을 유발한 것이 국가폭력의 야만성인지, 맞서 싸우던 세력의 ‘생명 불감’인지도 모호해졌다.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 간부였던 소설가 김별아는 기록한다. “사람들은 서서히 진저리를 쳤다. 싸움의 목표나 대안에 대한 고민보다는 언제쯤 이 불가해한 죽음의 투쟁이 끝날 것인가를 궁금해했다.”(<개인적 체험>) 성당으로 도피한 지도부의 고립으로 거칠었던 싸움판의 호흡이 잦아들고, 6월 광역의원 선거 참패로 ‘열사들’이 확인사살당하고, 7월의 폭염과 함께 소비에트 제국의 부고장이 날아들었을 때, 광주의 순교자들이 열어젖힌 한국의 1980년대는 비로소 하나의 순환을 마무리했다. 운동 진영을 휩쓴 것은 “운명과 싸우는 짓은 순간의 환희와 평생의 상처라는”(김중식, ‘중력은 나는 새도 떨어뜨리고’) 돌연한 깨달음이었다. ‘학생 권력’은 빠르게 쇠락했고, 진정성의 시대도 마침내 막을 내렸다. 멸실된 가치들의 빈자리에 똬리 튼 소비주의 그로부터 20년. 한때 건물 외벽을 사시사철 가로지르던 격문과 만장들은 대학 응원단의 경박한 구호들에 자리를 내줬다. 대형 현수막이나 걸개그림을 제작하던 2층 옥상정원엔 ‘글로벌 라운지’란 이름의 무국적 소비 공간이 들어섰고, 복도 바닥에 어지럽게 남아 있던 페인트흔도, 3층 통로를 메웠던 시너 냄새도 말끔히 세척됐다. 기념품숍이 입주하고, 승강기가 설치되고, 아귀 안 맞던 미닫이 철제 창호는 정교한 알루미늄 여닫이 창틀로 ‘전면 업그레이드’됐다. 건물을 감싼 아치들의 우아함에는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그것은 의미의 소실점 너머로 사라진 텅 빈 기호들의 무한수열에 불과한 까닭에, 영겁회귀하는 후기자본주의의 상투적 일상처럼 허무와 권태감만 양산한다. 신이 추방되고 사상이 멸실된 빈자리에 똬리 튼 소비주의란 이름의 물신(物神) 앞에서, 지나간 옛 시절의 열정을 추억하는 자는 우울하다. 이 덧없는 삶의 권태를 살해할 광기의 순간은 영원히 유예되고 마는가. 권태의 시대를 앞서 살았던 한 영웅적 멜랑콜리스트의 고백이 더없이 가슴을 후벼파는 계절이다. “내 청춘 한낱 깜깜한 뇌우였을 뿐/ 여기저기 눈부신 햇살이 뚫고 비쳤네./ 천둥과 비 무섭게 휘몰아쳐 내 정원에는/ 빠알간 열매 몇 안 남았네.”(보들레르, ‘원수’) 이세영 monad@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