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소프트 랜딩’하고 싶다

365
등록 : 2001-06-27 00:00 수정 :

크게 작게

하종강의 휴먼포엠

미국유학생간첩단사건 ‘최후의 1인’ 강용주, 컬러머리 의대생 되어 새로운 세상 속으로

사진/ 전남대 의대 교정에서 후배들과 함께. 현재 본과 2학년인 마흔의 늦깎이 대학생 강용주의 교수들 중엔 후배도 있다.
80년 5월, 강용주는 광주 동신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도청이 함락되기 하루 전 5월26일, 저녁밥을 먹은 강용주는 교련복으로 갈아입고 어머니 조순선 여사에게 큰절을 올렸다.

“어머니, 나가봐야겠어요.”

“어디로 가려는데?”


“도청으로 가겠어요.”

“가지 마라. 지금 나가면 넌 죽는다.”

항쟁의 길을 허락한 어머니

시내 도처에서 콩볶듯이 총소리가 들리는 상황이었으니 어머니는 당연히 강용주를 말릴 수밖에 없었다. 강용주는 어머니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어머니마저 저를 말리시면, 민주주의는 누가 지킵니까? 그렇게 모두 나가지 않으면, 광주는 누가 지킵니까?”

그러자 어머니는 용주의 교련복 품에 담배 한갑을 넣어주시며 말했다.

“그럼, 가거라.”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죽을 것이 뻔한 길에 “그럼, 가라”고 아들을 보낼 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20년도 더 지난 지금 강용주의 어머니에게 물어보았다.

“그 말 한마디에 아들을 죽으라고 내보냈어요?”

어머니가 예사롭게 편한 얼굴로 답하신다.

“그때 용주 얼굴을 보니까, 더이상 말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말려야 소용없다는 판단이 들더라고… 그리고, 나는 여태껏 그런 일에 아이들을 말린 적은 없어요.”

85년 전남대 의예과에 재학하며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강용주는 미국유학생간첩단에 휘말려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검찰이 주범이라고 구속시켰던 사람들은 조금씩 풀려나갔지만 그는 준법서약서를 쓰지 않아 사면대상에서 제외됐다. 매년 특사를 앞두고 있을 때마다 강용주를 걱정하는 수많은 선후배와 친구들이 “준법서약 까짓거 한장 갈겨주고 제발 나오라”고 신신당부했지만 강용주는 한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전향과 준법서약은 인간이 자신의 양심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유를 침해하는 제도이다. 나는 그 제도에 반대하는 것”이라면서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사람들은 결국 “용주의 생각이 옳은 것인지도 몰라”라고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앞에 적은 80년 5월26일 저녁의 이야기는, 99년 3·1절을 앞두고 강용주가 준법서약서에 서명하지 않은 채 당당하게 석방되었을 때, 내가 사회를 맡았던 ‘강용주석방환영토론회’에서 그가 했던 어머니에 관한 긴 이야기의 짧은 한 토막일 뿐이다.

지난 6월8일, 문화방송(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미국유학생간첩단사건’편을 보면서 나는 강용주의 인터뷰장면을 기다렸다. 끝내 전향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징역을 살았던 ‘미국유학생간첩단사건’ 최후의 1인- 강용주의 인터뷰가 당연히 나왔어야 했으나, 없었다. 며칠 뒤에 광주매일신문사의 박영란 기자와 그에 대한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박 기자가 말했다.

“강용주 선배는 지금까지 계속 말해왔거든요. 사람들은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하지만, 강용주 선배는 감옥에 갇혀 있던 14년 세월 동안, 그리고 그 뒤로 지금까지 계속 말해왔거든요.”

그는 지금까지 계속 말해왔다

사실, 강용주는 이 얘기를 빼자고 했다. “인터뷰의 초점을 그렇게 맞추는 것은 지금까지 호의적으로 양심수문제를 다뤄왔던 MBC 제작진에게 실례가 되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강용주가 다시는 나를 만나지 않을 것을 각오하면서라도 굳이 이 얘기를 하고 싶다.

사람들은 새삼스럽게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그 세월 동안 줄기차게 말해온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었노라고… 십수년 또는 수십년 세월 동안 감옥에서 줄기차게 자신의 양심을 지키려고 애썼던 수많은 ‘강용주’들이 우리 주변에 있었노라고….

강용주는 현재 전남대 의대에 복학해서 본과 2학년에 재학중인, 나이 마흔의 늦깎이 학생이다. 후배들이 교수가 되어 강용주를 가르친다.

“출옥한 뒤, 여러 갈래의 길 중에서 다시 복학을 하기로 한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강용주는 벌써 의사처럼 세련된 영어를 섞어 답했다.

“오래 떨어져 사는 동안 세상은 너무 많이 변했고, 나는 그 익숙하지 않은 세상에 적응할 필요가 있었어요. 단절되었던 삶에 ‘소프트 랜딩(soft landing)’하기에는 학생이라는 신분이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의사라는 직업이 갖는 사회적 의미도 전혀 없지는 않았고요.”

강용주의 어머니 조순선(76) 여사에게 물었다.

“용주가 앞으로 어떤 의사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가난한 사람들에게 특별히 관심을 가지는 의사, 아무리 늦은 밤에 환자가 와서 병원 문을 두드려도 선뜻 문을 열어주는, 그런 의사가 되어야지.”

강용주가 최근에 귀를 뚫고 머리 염색을 해서 사람들을 기절초풍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그랬느냐?”고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상의 모든 권력과 싸우는 일을 감옥 안에서 평생 하겠다던 사람이 밖에 나와 책상머리에 앉아서 책만 읽으니까, 사는 게 너무 자극이 없고 심심했어요.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남의 눈 의식하지 않고 해보고 싶기도 했고… 사람이 마음결 가는 대로 살아야지.”

어머니는 “염색하니까 나는 보기 예쁘데요. 뭐”라고 넘어가신다. 하긴 14년 세월 동안 옥바라지를 했던 아들을 이제는 밤마다 옆에 데리고 잘 수 있으니, 그 아들이 무엇을 한들 예쁘지 않을까….

우리 용주 손목 잡고 금강산 구경일세

강용주가 징역을 사는 동안 사람들이 조촐하게 마련했던 칠순잔치에서 어머니는 <늙은 군인의 노래> 가사를 다음과 같이 바꿔 불러 사람들을 눈물짓게 했다.

“내 평생 소원이 무엇이더냐∼ 우리 용주 손목 잡고 금강산 구경일세∼.”

그때 그 노래를 들으면서 그 간절한 어머니의 소원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짐작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용주는 석방되었고 금강산은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다. 세상은 이렇게 수많은 강용주들과 그 어머니의 힘으로 진보한다. 어머니가 하루 빨리 용주의 손목을 잡고 금강산에 오를 수 있는 날을 위하여… 위하여!

하종강 / 대학에서는 응용물리학을 공부했으나, ‘노동상담’이라고 불리는 일을 20년 넘게 해오고 있다. 요즘은 ‘한울노동문제연구소’에 소장으로 있고, 서울지방노동위원회의 심판담당 공익위원이기도 하다. 1994년 ‘전태일 문학상’을 받았고 <항상 가슴 떨리는 처음입니다> <노동자는 못 말려> <한울노동법강좌> 등의 책을 내는 데 참여했다.

종강의 다짐 / 많은 사람들이 올라섰다가 내려선 길에 아직도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나 역시 일찍이 그 길에서 내려섰으나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직도 그 길 위에 있는 사람들이고, 그 만남 속에서 나는 거의 매번 감당할 수 없는 소중한 느낌을 받는다. 그렇게 길 위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 물 한잔 떠다주는 일이라도 성의껏 하며 살자는 것, 그래서 최소한 ‘길을 막는 사람’이 되지는 말자는 것, 그것이 길가에라도 남아 있기 위한 나의 다짐이다.

사람들을 가르친다는, 참으로 부끄럽고 건방진 생각을 가졌던 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아픔에 동참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일이었다. 함께 아파하는 것, 우선 그것만이라도 제대로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을 깨닫는 데만도 10년 넘는 세월이 걸렸다. 이 기록조차 다른 많은 매체들에 넘치는 것처럼 “우리는 이렇게 행복하게 산다우” 따위의 자랑이거나, 가족이기주의의 세련된 포장이라고 판단된다면, 그날로 집어치우겠다.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