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노랜 못 지운다
[서정민의 뮤직박스 올드 & 뉴] 머틀리 크루의 <닥터 필굿>
등록 : 2008-10-16 11:23 수정 :
내 MP3 플레이어 용량은 1GB다. CD 스무 장 안팎이 들어간다. 남들의 2~8GB 제품에 비하면 넉넉한 형편이 못 된다. 새 음반을 넣을라치면 기존 음반을 지워야 한다. 그럴 때마다 뭘 지울지를 놓고 머리칼을 쥐어뜯는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다는 심정, 자식 여럿 둔 부모만 느끼는 게 아니다.
수없이 많은 음반들이 내 MP3 플레이어에 족적을 남겼다 사라지는 동안, 항상 그 자리를 지키는 터줏대감이 하나 있다. 머틀리 크루의 <닥터 필굿>(1989). 고등학생 때 어렵사리 수입 CD를 구한 뒤로 죽어라 들었던 헤비메탈계의 명반. 당시 국내 라이선스로도 발매됐는데, 어이없게도 타이틀곡 <닥터 필굿>은 금지곡으로 잘려나갔다. 마약을 미화해서라나. <닥터 필굿> 앨범에 <닥터 필굿>이 없다니, 영화 <슈퍼맨>에서 슈퍼맨 장면이 모두 잘린 격이라고나 할까?
황당해하던 이들에게 그나마 위안이 된 건, 다른 주옥같은 곡들이 넘쳐났다는 사실. <킥스타트 마이 하트> <돈트 고 어웨이 매드>처럼 신나게 내달리는 곡뿐 아니라 <위다웃 유> <타임 포 체인지> 같은 감미로운 발라드도 매력적이다.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LA 메탈의 결정체인 이 앨범은 알코올기 돌 때 들어야 제맛. 1GB 안에서의 막강한 경쟁력이다. 한적한 골목길에서 이어폰 꽂고 술기운을 빌려 큰소리로 따라 부르다 갑자기 마주친 행인의 이상한 눈길을 받게 되는 부작용도 있다. 그래도 창피하진 않다. 술과 음악에 흠뻑 취했으니까.
서정민 <한겨레> 기자
westm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