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맑은 육수에 혀도 녹겠네
등록 : 2001-03-07 00:00 수정 :
냉면은 메밀로 만든 한국의 고유한 음식이다. 메밀은 본래 차고 달고 독이 없는 곡식으로, 높고 한랭한 산간에서 자란 것일수록 더 찰지고 고소한 맛이 뛰어나다. 70% 이상이 양질의 전분이고 단백질의 함량이 쌀이나 밀가루보다 높을 뿐 아니라, 비타민B1, B2 등은 쌀의 3배에 가깝고 비타민P로 불리는 루틴은 동맥경화와 고혈압, 궤양증, 치질, 감기 등의 예방과 치료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화가 빠르면서 통변효과가 뛰어나 두뇌노동 시간이 많은 젊은 남녀 직장인들에게 선식(禪食)과 같은 건강식품이다.
의정부시 평안면옥(031-877-2282)은 개업 30년이 넘는 평양냉면 전문점이다. 1960년대 초 평양에서 월남한 실향민 홍영남(작고)씨가 문을 열어 지금도 중노년의 실향민 1∼2세대들이 즐겨찾는 평양냉면 원조집이다. 평양냉면의 맛을 결정짓는 메밀과 육수, 고명 등에서 옛 평양냉면 고유의 방법을 고집스럽게 지켜온다.
20년 가깝게 가업을 이끌어 온 주인 홍진권(50)씨는 가을에 사들인 메밀을 겉껍질만 벗긴 채 저장해놓고, 매일 아침 집에 설치해놓은 제분기로 가루를 빻아서 쓴다. 가루를 미리 빻아두면 유분과 수분이 증발하면서 메밀의 향과 질감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반죽할 때도 펄펄 끓는 물을 부어 약간 익은 상태로 반죽한다. 그래야만 국숫발이 잘 빠지고 금방 익어 쫄깃한 질감이 제대로 살아난다는 것이다. 가위로 사리를 잘라주지 않아도 알맞게 쫄깃하고 부드러운 면발은 씹을수록 구수하고 메밀냄새가 입 안에 은은하게 배어드는 묘미가 있다.
육수도 한우 양지살만을 사용한다. 양지살을 삶은 국물을 차게 식힌 뒤 기름을 말끔하게 걷어내 육수로 사용하고 삶아낸 양지살은 곱게 썰어 냉면에 얹는다. 육수에는 양지 삶은 국물 이외에 일체 다른 국물을 섞지 않는다. 냉면국물이 유난히 맑은 것도 이처럼 잡스러운 것이 전혀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홍진권씨는 평양에 있는 옥류관 냉면에는 쇠고기와 돼지고기, 닭고기 삶은 국물 3가지를 섞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역시 옛날 평양냉면의 고유한 육수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육수에 얼음을 띄우는 것도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 고기냄새가 살아나 고유한 맛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고명은 삶은 달걀 반쪽과 동치미 무우, 배, 오이를 계절에 따라 채썰어 얹고, 참기름이나 조미료 대신 고운 고춧가루와 볶은 깨를 살짝 뿌려낸다. 겨자와 식초를 약간 넣고 사리를 푼 뒤, 국물부터 한 모금 죽 마셔보면 평양냉면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서울의 필동면옥과 을지면옥은 모두 이곳에서 가지를 친 냉면집들로, 홍씨의 여동생들이 주인이다. 물냉면, 온면, 비빔냉면 모두 한 그릇 5500원.
나도 주방장/ 양지수육 씹을수록 맛이나는 수육
평양면옥의 양지수육은 다른 냉면집들의 수육과 다르다. 수육용으로 부드럽게 삶아낸 것이 아니고 냉면에 얹는 것을 그대로 썰어낸 것이다.
양지살은 삶을 때 기름이 말끔하게 빠지도록 푹 삶아 채반에 얹어 말린다. 썰어놓은 뒤에 색깔이 다소 짙고, 기름이 전혀 없는 모습이어서 마치 육포를 연상케 할 정도다. 기름과 단맛이 다 빠진 뻣뻣한 고기를 무슨 맛에 먹는가 싶어 그냥 남겨두고 가는 고객이 적지않다.
그러나 이 양지수육의 특징은 입 안에 넣고 꼭꼭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하고 구수한 맛이 살아나 국수를 먹기 전 맛돋움 역할을 재대로 해낸다. 또한 국수를 다 먹고 마지막에 건져먹어도 고기가 부풀어 물러지지 않은 채 제맛을 내기 때문에 마무리하는 맛으로도 그만이다.
가정에서도 양지살을 삶아 각종 육수를 내 조리에 쓰고, 양지살은 기름을 다듬어내고 채반에 얹어 서늘한 베란다에서 대충 굳혀 냉장고에 넣어 두면 겨자장 한 가지만 곁들여도 간편한 안줏감으로 효과있게 사용할 수 있다. |
글·사진 김순경/ 음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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