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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트로트, 국악을 잡아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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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1-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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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색에 찌든 그 음악을 ‘국민가요’로 만든 식민지 근대성과 오리엔탈리즘
70년대 근대화의 그늘 속에 대중의 ‘향수’를 자극하며 전성기 누려

▣ 장정일/ 소설가

여러 지면에 발표된 국악평론을 한데 모았던 <갇힌 존재의 예술, 열린 예술>(북코리·2004)과 달리, 연년생으로 출간된 전지영의 <근대성의 침략과 20세기 한국의 음악>(북코리아·2005)은 한 권이 통째인 본격 평론이다. 앞의 책에서 저자는 창작국악의 허구성과 국악의 섣부른 세계화가 초래할 정체성 상실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두 비판을 합하면 예를 들어 황병기가 해답이 될 수 없다는 얘기가 아닌가? 저자는 새 책에서 서구 추종을 선으로 삼았던 식민지 근대성과 전통을 악으로 여겼던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이 어떻게 국악을 고사(枯死)시키고, 왜색에 찌든 트로트를 국민 가요로 각광받게 했는지를 고고학적으로 캔다.

트로트는 선진 문물이었다


(일러스트레이션/ 황은아)

일본에서 양악을 배운 유학생들에 의해 트로트가 창작되기 시작한 1930년대 초, 트로트는 왜색 혹은 일본풍 음악이 아니라, 조선이 개화하기 위해 답습해야 할 여러 가지 선진 문물 가운데 하나였다. 많은 지식인들이 전통음악을 하루빨리 청산하거나 양악에 의해 보완돼야 할 원시적인 음악으로 인식했다. 유행가(트로트)와 함께 일본의 음반사에 의해 활발하게 레코딩된 판소리는 아직 대중적인 힘이 있었고 임방울 같은 스타도 있었지만, 당시 사람들을 지배했던 근대의 이념이나 근대를 향한 욕망을 충족시켜주지는 못했다.

식민시대의 트로트는 창법과 표현력 등에서 형식적으로는 도시적이고 새로운 것, 즉 근대의 외양을 풍겼으나 내용은 자유와 저항으로부터의 도피로 가득했다. 역설적이지만, 이 시절에 유행했던 애상적 트로트가 모순의 음악이었다는 말은, 여느 예술 장르에 비해 추상적이고 순수하다고 여겨온 음악이 깊은 층위에서 시대와 역사를 반영하고 사회적인 맥락에서 생산·소비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당대의 트로트는 식민성을 극복하기 위해 근대를 모방하고자 했던 “식민지 근대화의 그늘”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1965년 말 한-일 국교 정상화의 후유증을 무마하기 위해 박정희 정권이 빼든 칼이 왜색가요 정화였다. 하지만 일제 식민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민족적 아픔을 함께한 거의 유일한 음악 장르가 된 트로트는, 이미자와 배호 같은 걸출한 가왕(歌王)을 낳으며 ‘섬마을’이나 ‘삼각지’, 또는 ‘흑산도’든 ‘장춘단’이든 가리지 않고 울려퍼졌다. 트로트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때는 1970년대. 까닭은 급격한 산업화 과정과 연관되므로, 또 한 번 음악 관련 서적을 뒤적이는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준다.

1960년대부터 가속된 근대화 드라이브는 이농 현상과 도시 노동자들의 애환을 낳았고, ‘근대화의 그늘’은 고향과 가족에 대한 향수를 요구했다. 유신 정권은 예전과 달리 이번에는 버르장머리 없는 포크 가수들의 음악을 줄줄히 금지하는 대신, 복고적이고 피동적인 트로트를 어여삐 여겼다. 그런 사정과 상관없이, 대중이 흔히 ‘뽕짝’이라고 비하하는 트로트에 열광한 이유는 거기에 “당대의 리얼리티”가 농축돼 있었기 때문이다. 명절 연휴 때 휴가조차 제대로 찾아먹지 못했던 ‘공돌이·공순이’들은 당시에 자주 열렸던 극장 ‘리사이틀’에 가득 모여, 나훈아가 <고향역>을 부르면 함께 따라 부르며 목놓아 울었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송기원의 소설 <여자에 대한 명상>(문학동네·1996) 가운데 위의 장면이 있을 것이다.

국악은 사회변혁의 이념적 도구

유신 체제의 종말과 함께 ‘근대화의 그늘’은 갑자기 사라진 걸까? 80년대 중반부터 트로트는 주류에서 밀려나면서 중년의 향락적 유흥문화를 대변하는 음악이 되었다. 그렇다면 근대의 침략 앞에서 국악은 어떤 고단한 운명을 겪었을까? 저자에 의하면 트로트와 달리 국악은 식민 상황에 놓이면서부터 전근대와 동일시돼 대중의 외면을 받았다. 그 뒤, 박정희 군사 정권에서는 조국 근대화의 기치에 걸맞게 국악의 형식과 내용을 혁신하라는 압력을 받았으며, 현재는 국악의 세계화라는 미명 아래 거의 형해화될 지경이라고 진단한다.

근대성이란 합리나 발전이라는 이데올로기로 포장된 침략성이거나 폭력에 불과하다고 단언하는 저자는, 국악이 단순히 우리 것이기 때문에 소중한 게 아니라, 근대성과의 싸움에 필요한 절대적 가치며 사회 변혁의 이념적 도구이기 때문에 소중하다고 한다. 다음 책이 기다려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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