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 독서일기]
너른 만주땅을 버리고 휴전선에서 싸우는 것은 그에게 이해되지 않는 풍경
재야 데뷔 전 청·장년기 ‘은둔 속의 참여’까지 보여주는 <문익환 평전> ▣ 장정일/ 소설가 인터넷 서점을 검색하다가, 지난 한 해에만 5종의 역도산 평전과 4종의 최배달 평전이 출간된 것을 알고 새삼 놀랐다. 이런 사태 배면에는 영화 <역도산>의 제작·개봉이 놓여 있고, 출판계에 대한 영상매체의 영향력이 실감된다. 지난해와 올해 사이, 10여 종이나 무더기 출간된 체 게바라 관련 서적 역시 영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에 힘입은 것이고 보면, 영상매체에 대한 출판의 예속이 심각하게 느껴진다.
나운규·윤동주를 낳은 이상 사회 하지만 근 몇 년간의 출판 경향을 보면, 굉장히 다양한 종류의 평전이 신간 소개란을 차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 직후부터 아져나온 링컨 전기는, 평전 장르가 한 시대의 중요 관심사와 민감한 동태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세계 여러 나라의 환경운동가들이나 중국 근현대 정치가들의 평전 또는 이순신이나 해방공간에서 이름 없이 사라져간 좌익 혹은 중도 민족주의자들의 전기는 우리 시대의 복잡한 풍향을 가리키려는 노력이다.
김형수의 <문익환 평전>(실천문학사, 2004)은 지난해 출간된 평전 가운데 꼭 읽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책을 다 읽기 전에는 800여 쪽에 이르는 분량이 벅차게 느껴졌지만, 종독한 소감은 다르다. 문익환은 러시아혁명이 성공한 이듬해인 1918년, 북간도 명동촌(지린성 허룽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에 새겨진 시간과 공간은 문익환이라는 인물을 문익환이라는 고유명사로부터 떼어내 ‘20세기’라는 일반명사로 화하게 한다. 제국주의 열강 간의 식민지 쟁탈전, 자본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 간의 체제전쟁, 제국주의에 대한 식민지의 민족해방전쟁. 문익환은 20세기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이 세 가지 성격 속에서 살았고, 계급과 민족이 서로 피를 흘리며 싸우는 한반도의 모순도 덤으로 짊어져야 했다.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내면에는 고향이 있다. 1899년 2월, 문익환의 고조부를 비롯한 함경도 내의 여덟 가문이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향했던 이유는 세 가지다. 하나, 간도는 비옥한 곳이다. 둘, 계속 방치하면 남의 땅(중국)이 된다. 셋, 그곳에 공동체를 만들어 이 나라를 일으킬 인재를 기르자. 이제껏 북간도라면 그저, 윤동주의 ‘별 헤는 밤’에 나오는 한 구절을 아스라이 떠올릴 따름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한국인들에게 북간도는 생활공간이자 해방의 전초기지였고, 아직까지 만주를 우리 땅이라고 여기는 마지막 조선 백성이 살고 있는 역사의 땅이었다.
안중근이 문씨 집안의 식객으로 있으면서 사격 연습을 했다는 일화가 웅변해주듯, 어떤 계파를 막론하고 무슨 일 하나, 북간도 구성원들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망명자들의 공동체는 20년 만에 엄청난 사회를 구축해버렸다. 이 강렬한 이상 사회 속에서 나운규와 윤동주 같은 인물이 줄줄이 나왔다. 문익환은 평생 “북간도 명동촌의 아들”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김형수가 “정서적 조국은 고구려였으며, 영혼적 혈통은 유목민”이라고 이름 붙인 그에게, 너른 만주땅을 두고 휴전선에서 대치하는 남과 북은 이해되지 않았다. 이것이 문익환을 이념적 투사가 아닌 통일 운동꾼으로 매진하게 했던 원풍경이다.
죽은 이들로부터 콤플렉스를…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내면에는 고향이 있고 또 콤플렉스가 있다. 문익환이 재야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76년, 유신 철폐를 위한 ‘3·1 민주구국선언’의 작성자로 나서면서부터이다. 그때 나이 59살. 이 사건으로 ‘재야 데뷔’를 하기 전까지 문익환의 운동 경력은 전무해 보였다. 그래서 “해방 전까지는 윤동주와 친구였고 해방 후부터는 장준하와 교분이 두터웠는데 그 둘의 죽음으로부터 늘 콤플렉스를 느꼈던 것이 노년에 발현됐다”는 천진난만한 해석도 나오지만, 문익환 스스로가 입에 달고 다녔던 그 콤플렉스는 실은 문익환이 “자랑해 마지않는 콤플렉스”였으며, 역설적으로 “자신의 내면을 들키지 않”으려는 가면이었다. 문익환은 자신의 콤플렉스를 방패막이 삼아 청·장년기 동안 은둔 속의 참여를 행했다. 다만 사람들이 “소란하지 않을 때는 알아먹지 못”했던 것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1989년의 방북은 열매 안에 꽃 감추고 있던 무화과의 결실이었다.
재야 데뷔 전 청·장년기 ‘은둔 속의 참여’까지 보여주는 <문익환 평전> ▣ 장정일/ 소설가 인터넷 서점을 검색하다가, 지난 한 해에만 5종의 역도산 평전과 4종의 최배달 평전이 출간된 것을 알고 새삼 놀랐다. 이런 사태 배면에는 영화 <역도산>의 제작·개봉이 놓여 있고, 출판계에 대한 영상매체의 영향력이 실감된다. 지난해와 올해 사이, 10여 종이나 무더기 출간된 체 게바라 관련 서적 역시 영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에 힘입은 것이고 보면, 영상매체에 대한 출판의 예속이 심각하게 느껴진다.
나운규·윤동주를 낳은 이상 사회 하지만 근 몇 년간의 출판 경향을 보면, 굉장히 다양한 종류의 평전이 신간 소개란을 차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 직후부터 아져나온 링컨 전기는, 평전 장르가 한 시대의 중요 관심사와 민감한 동태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세계 여러 나라의 환경운동가들이나 중국 근현대 정치가들의 평전 또는 이순신이나 해방공간에서 이름 없이 사라져간 좌익 혹은 중도 민족주의자들의 전기는 우리 시대의 복잡한 풍향을 가리키려는 노력이다.

(일러스트레이션/ 황은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