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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월드컵 유치전략의 유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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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2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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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스포츠 외교 무대에서 ‘한반도 역사’ 들먹인 한국을 비판하다
김흥국의 ‘여론조사 조작’ 주장을 보며 떠올린 <2002 월드컵 전쟁>

▣ 장정일/ 소설가

올해 2월과 5월, 어쩌다 두 차례에 걸쳐 도서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축구 관련 서적을 모두 찾아 읽은 적이 있었다. 종독한 십여 권의 책 가운데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다케우치 히로시의 <2002 월드컵 전쟁>(청한, 1997). 일본이 2002년 월드컵 유치 준비에 덤벼든 것은 1989년부터였고, 한국이 2002년 월드컵 유치위원회를 발족시킨 것은 1994년부터였다. 아프리카의 축구 발전을 위해 물질적 지원을 하거나, 두 개의 세계 청소년 선수권 대회를 개최하면서 일본은 국제축구연맹(FIFA) 내에서 상당한 표를 얻어놓았다. 하지만 후보지를 평가하는 조사보고서에서 늘 앞섰던 일본은, “개최국은 한 나라에서”라는 FIFA 규정에도 어긋나는 달갑지 않은 공동 개최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애초부터 공동개최 마음에 뒀나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 비사를 상세히 추적하고 있는 이 책은 FIFA를 비롯한 국제 스포츠 무대의 정치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한편, 공적인 외교 무대에서 한국이 어떤 ‘수사적 전략’을 통해 일본을 ‘이지메’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냉철하고 감정 없이 쓰였기에 일본인이 가진 ‘혐한의 근거’가 섬뜩하게 실감되는 이 책의 요점은 명료하다. 월드컵을 유치하겠거든, FIFA가 요구하는 여러 가지 기준을 완비한 다음, 다른 후보지와 표 대결을 하면 그만이 아닌가?

비단 스포츠 무대에서만 아니라, 온갖 외교 무대에서 한국의 유일무이한 경쟁 후보가 일본일 때, 한국은 한국 쪽 입장에서는 너무나 쉽고, 일본 쪽이 바라보기에는 ‘아픈 다리 내놓고 장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야비한 전략을 구사한다. 일본이 “월드컵 개최국 결정이란 스포츠 문제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견해를 펼 때, 한국은 월드컵이 “한반도의 긴장 완화와 평화 구축”에 기여한다면서, “일본은 한반도의 불행한 역사에 책임”이 있기 때문에 뭐든 양보해야만 한다고 압박한다.

(일러스트레이션/ 황은아)

한국인은 일본의 과거사 청산이 완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반면, 일본인은 65년에 이루어진 청구권 실행으로 불행했던 과거사는 모두 청산됐다고 믿는다. 이런 이견을 감안하더라도, 일본인이 보기에 한국의 월드컵 유치 전략은 “결코 공정한 싸움”이 아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추악했던 것은, 한국은 애초부터 단독 개최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몽준 회장이 가능하지도 않은 “북한과의 공동 개최라는 애드벌룬”을 띄웠을 때부터, 한국은 “한-일 공동 개최 외에는 길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은 16개 도시에서의 개최를 계획했으나, 그것이 무리일 뿐 아니라 과잉투자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실제로 한국 쪽의 월드컵 준비가 얼마나 과장된 것이었는지는, 2002년에 완공된다던 서울~부산 간 고속철도가 2004년에 와서야 불완전한 상태로 개통된 사실을 보면 안다.

정몽준 후보의 ‘노 페어플레이’

올해 초에 읽고 나서 장문의 독후감을 써놓았지만, 몇 달 동안 써둔 온갖 문서와 함께 컴퓨터 조작 실수로 사라진 <2002 월드컵 전쟁>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오로지 가수 김흥국의 공이다. 최근에 출간된 <김흥국의 우끼는 어록>(보고사, 2005) 가운데 한 장은, 2002년 대선 때 정몽준 대통령 후보 문화예술 담당 특별보좌관이란 직함을 달고 활약했던 경험담이다. 거기서 그는, 투표일 며칠 전에 이루어졌던 단일화 여론조사를 “거의 조작”이라고 주장한다. 잔뜩 흥미를 끄는 대목이라 서점에 나가 그 부분을 읽어보니, 똘똘 뭉친 노사모들이 “몇 시에 여론조사를 하니 그 시각에는 일반 전화가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있어라, 외출하지 말고 집에 있어라”는 게 조작의 전부였다.

공동 개최가 결정난 직후, 취리히의 그랜드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서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의 일성은 뜬금없게도 “오늘의 진짜 승자는 민주주의이다”였다. 하지만 이 책을 숙독하고 나면, 애초부터 월드컵 단독 개최가 한국의 목표가 아니었듯이, 정몽준 또한 독자적으로 대통령에 입후보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는 가정에 이른다. 민주당을 접수하기 위해 국민통합21을 만들었을 뿐, 단일화 여론조사에서 패하자 공조 파기를 선언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2002 월드컵 전쟁>으로 번역된 이 책의 원제는 ‘2002년 노 페어플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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