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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자유방임, 그 속임수 캠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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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1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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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정사’에 도전하는 장하준 교수의 통쾌한 저작들
보호주의 채택해 발전한 영·미가 후진국에 자유무역을 강요

▣ 장정일/ 소설가

자본주의 정사(正史)는 이렇게 말한다. 그 하나. 영국과 미국은 자유방임주의 정책과 자유무역을 앞서 행했기 때문에 최초의 산업국가로 성공할 수 있었고 선진국이 될 수 있었던 반면, 국가 주도의 개입주의 정책을 고수했던 나라들은 산업화에 뒤졌다. 그 둘. 민주주의와 경제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고, 민주주의는 경제 발전의 선행조건이다. 탐독한 장하준의<사다리 걷어차기>(부키, 2004)는, 두개 항의 정사 모두를 부정한다.

국가의 몫을 최소화한다고?


영·미의 주류 경제학자들은 자신이 후진국일 때의 역사적 경험을 기억하려 들지 않을 뿐 아니라, 역사적 접근 자체를 거부한다. 그들은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1776)을 발표한 이래로 줄곧 자유방임주의를 위해 선전(善戰)해온 듯이 왜곡하면서, 그것이 자국의 성공 비결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실은 꽤 다르다. 한 예로 영국의 섬유산업이 유럽 대륙은 물론이고 식민지 인도보다도 낙후했던 18세기 전반, 높은 관세에다 수입 금지 처분까지 온갖 보호 정책으로 국내 산업을 육성했다.

(일러스트레이션/ 황은아)

미국이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한 방법 또한 다르지 않았다. 장하준의 두 번째 저서 <개혁의 덫>(부키, 2004)은, 달러화에 그려진 미국 정치인의 초상을 빌려 자유방임 경제의 수호자인 양하는 미국이 얼마나 위선적이었나를 발본한다. 5달러 지폐에 실린 링컨은 “미국과 같은 후진국의 정부는 관세나 보조금 등을 통해 자국 산업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교시했고, 20달러 지폐의 주인공인 잭슨은 “은행은 군대보다 더 무서운 무기다. 은행은 순수하게 우리 국민이 소유해야 한다”면서 외국인 소유지분이 30%를 차지한 국책은행 허가를 취소했다. 또 50달러 지폐에 등장하는 그랜트는 “영국도 17~18세기에 유럽 산업의 중심지였던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따라잡으려고 보호무역을 했다. 우리도 영국처럼 한 200년쯤 보호무역을 통해 산업을 발전시킨 뒤에는 자유무역을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산업발전기에 높은 관세를 비롯해 유치산업 보호 정책을 썼던 영국과 미국은 발전한 반면, 같은 시기에 극단적인 자유방임을 선택했거나 개방주의 내지 국가 개입을 최소화했던 네덜란드·프랑스·독일 등은 쇠퇴했다. 약 1세기 동안 강력한 보호주의를 행사했던 미국이 자유무역의 효용성을 공세적으로 채택하기 시작한 것은 기껏해야 2차 대전 이후부터이며, 흥미롭게도 바로 그때부터 프랑스 등 서유럽 국가는 개입과 유치산업 보호로 선회한다. 역사와 통계는 보호주의와 경제 성장률 사이의 높은 연관성을 웅변하며, 현재도 선진국일수록 유치산업에 막대한 지원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최근 20여년 동안 경제학계는 추상적이고 연역적인 신고전주의 방법론에 매몰돼 역사적 접근법을 인정하지 않았다. 반대로 지은이는 현 선진국들의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개발도상국의 바람직한 경제발전 정책을 도출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는 이미 정상에 오른 사람이 뒷사람을 올라오지 못하게 “사다리를 걷어차”는 짓으로, 상식과 본능을 가졌다면, 국가의 시장 개입과 각종 산업 지원정책을 금지하려는 선진국의 회유와 강요를 뿌리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매우 안타깝게도, 현 정부의 역점 사업은 경제뿐만 아니라 온갖 부문에서 ‘국가의 몫’을 최소화하는 일이라고 한다.

개발독재에 대한 면죄부 될 수도

<사다리 걷어차기>의 기저는 분명 복거일 같은 사람을 ‘지적’으로 ‘혼란’스럽게 할 것이지만, 또 어떤 결론은 누군가에게 ‘도덕적 불쾌감’을 줄 것이다. “민주주의 자체가 경제 발전의 선행조건이라기보다 결과물”이라는, 자본주의 정사에 해당하는 두 번째 항에 대한 결론이 그것이다. 20세기 초엽까지 이룬 서구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보잘것없었나를 낱낱이 확인하는 일과, 신자유주의의 주축국들이 세계 곳곳에 이식하려는 민주주의가 얼마나 빤한 수작인지 목도하는 것은 통쾌하다. 그러나 이 아픈 결론은 ‘개발독재’에 대한 좋은 면죄부도 된다. 지은이의 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음미하려거든,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정승일과의 대담집 <쾌도난마 한국경제>(부키, 2005)를 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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