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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칭기즈칸은 아메리카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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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9-2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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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축을 흔들고 섞어놓은 몽골 제국의 패망에 대한 다른 분석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의 모델로 삼기 위해 몽골을 미화했는가

▣ 장정일/ 소설가

칭기즈칸이 고작 10만에 불과한 몽골 전사를 거느리고 중국은 물론 아랍과 유럽의 일부까지 정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사냥과 유목으로 다져진 전투 기술과 군사적 기율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칭기즈칸은 정보전(情報戰)과 이간계(離間計)에 능했다. 흔히 한족과 같은 정주 농경민이 즐겨 쓴다고 알려진 전술이 실제로는 유목민들의 전매특허였다는 사실은 무척 새롭다. 목초지를 찾아 끊임없이 이동해야 했던 몽골인들은 타고난 ‘정보 마인드’의 소유자들로, 그들의 전통적인 인사말은 “소닝 새항 요 밴?”(무슨 새로운 소식 없느냐?)이다.

과연 페스트가 패망의 원인일까


자신의 제국을 한 세대는커녕 살아 생전에도 옳게 건수하지 못했던 여느 정복자들과 달리 칭기즈칸이 세운 제국은 150년 넘게 지속됐다. 모두가 경이롭게 지적하고 있지만, 특히 잭 웨더포드가 쓴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사계절·2005)에 나오는 종교에 관한 재미난 일화들은 칭기즈칸의 제국이 장기 지속될 수 있었던 저력을 보여준다. 몽골의 수도에는 기독교·이슬람교·불교·도교 등 온갖 종교가 공존하고 있었고, 그 다양성만큼 칭기즈칸의 자식들과 며느리·손자들은 제각기 종교가 달랐다. 샤머니즘을 신봉하면서 스스로 큰 무당이기도 했던 칭기즈칸은 피정복민들에게 완전한 종교적 관용과 보호책을 베풀었다.

(일러스트레이션/ 황은아)

칭기즈칸과 몽골 제국을 모르고서는 12·13세기의 세계사는 물론 유럽에서 벌어진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를 이야기할 수 없다. 왕권이 종교 위에 있는 몽골의 세속정치는 유럽 세계를 뒤흔들어 종교개혁을 불러왔고, 중국·아랍의 선진 문명을 유럽에 수혈한 덕에 르네상스가 일어날 수 있었다. 실크로드의 최성기를 당나라 때로 잡고 있지만, 칭기즈칸과 몽골 시대로 수정돼야 한다. 칭기즈칸은 물품만 아니라, 마치 카드를 섞듯이 여러 문명의 축을 뒤섞었다. 그럼에도 우리의 세계사 학습은 원나라에 너무 짜다.

미국인 인류학자 잭 웨더포드의 책은 매우 훌륭하지만, 몽골 제국의 쇠망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삑사리’를 낸다. 모든 제국의 흥망을 설명하는 가설은 원래 의견이 분분하다. 그렇더라도 ‘유럽에서 창궐한 페스트가 교역 국가였던 몽골 제국을 고립시켰기 때문’이라는 분석은, 몽골을 너무 이상화했다. <칭기스칸>(지식사업사·1992)의 저자인 라츠네프스키는 몽골 제국의 자체적 결함에서 원인을 찾았다. 첫째, 몽골 제국이 중앙집권 국가였다고는 하지만 천호제(千戶制, 군사·사회 조직)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천호제 위에는 칭기즈칸 씨족을 일컫는 ‘황금씨족’이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고, 칭기즈칸이 죽자 중앙집권 국가의 일반적인 형태와 달리 자식들에게 제국의 영토를 나누어 다스리게 함으로써 훗날 극심한 내부 분열 전쟁을 불러왔다. 둘째, 몽골은 군사국가였고 그들의 경제는 약탈경제였다. 세계 정복이 중단되자 무수한 친위대와 역참을 유지하기 위해 제국의 등골이 휘었다는 것이다.

1995년 12월31일,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1천년 동안 가장 중요한 역사적 인물로 칭기즈칸을 선정하며 장문의 논평을 게재했다. 그 전문이 김종래의 <밀레니엄맨, 칭기스칸>(꿈엔들·2005)에 실려 있는데, 결론부의 마지막 두 번째 문단은 이렇다. “우리가 선택한 ‘천년의 인물’은 그 시대의 박애자도 뛰어난 사상가도 위대한 해방가도 아니었다. 사실 그는 깡패였다. 그러나 역사는 때때로 깡패에 의해 만들어진다. 역사는 성인이나 천재, 해방가들의 이야기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인류학의 정체를 다시 의심하다

위의 논평은 미국이 정복과 교역을 통해 역사상 최초로 세계화를 이룬 몽골을 미화하면서 자신의 역할모델로 삼으려는 듯이 보인다. 언제부터인가 미국화가 곧 세계화인 듯 말해지고 있지만, 미국의 세계화 정책은 이중적이다. 경제 분야에서는 무제한의 자유를 관철하면서도 종교나 이념은 폐쇄적이다. 그래서 <호모 노마드-유목하는 인간>(웅진닷컴·2005)을 쓴 자크 아탈리는, 미국은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정주 국가이면서 유목적인 사고에 극력히 저항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페스트 때문에 몽골이 망했다는 잭 웨더포드의 관점은, 제국주의에 봉사한다는 혐의가 무성했던 인류학의 정체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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