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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약소국 민중투쟁은 깡패짓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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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1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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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할 수 있는 권리를 국가에게만 부여한 것은 제국주의의 악법
국민교육이 ‘병사 만들기’였음을 증명한 책을 읽다가 분이 치솟다

▣ 반이정/ 소설가

이치석의 <전쟁과 학교>(삼인, 2005)를 읽는 도중에 서점에서 존 키건의 <전쟁과 우리가 사는 세상>(지호, 2004)을 발견했다. 두서없이 책갈피를 넘겨가며 읽다가 프랑스혁명 이후 “의무교육이 도입되면서 신병으로 충원될 자원(학생)들은 규율과 징계에 익숙해졌고, 군사훈련에 적합하도록 훈육되었다”라는 구절을 보고서 책을 샀다. 인용된 대목은 이미 반쯤 읽은 <전쟁과 학교>의 주장과 부합했다. 프랑스혁명이 점화해놓은 민족주의적 열정은 내부의 질서를 유지하고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방위하기 위해 상비군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근대적 공교육을 떠맡은 학교가 ‘국민 만들기’와 ‘병사 만들기’를 동시에 수행했다.


제네바협약, 그들만의 리그

집으로 돌아와 한 시간 만에 읽어치운 이 책에 대한 소감은, ‘분(糞) 밟았다’고밖에 더 할 말이 없다. 전쟁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서구식 민주주의가 정착된 국가에만 부여하면서 그들만이 평화의 일꾼으로서 전쟁을 할 자격이 있다는 어조와, 민중이 주체가 된 모든 투쟁을 ‘페어플레이’가 실종된 공명정대하지 못한 ‘방해행위·암살·학살’로 몰아붙이는 논리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일러스트레이션/ 황은아)

전쟁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국가(정부)에만 부여하는 것은 원래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만든 악법이다. 근대 이전의 전쟁은 왕이 항복하는 것으로 종전이 됐다. 하지만 민족 단위의 국민국가가 생겨나면서, 왕은 항복을 해도 민중이 계속해서 저항하는 일이 생겨났다. 게릴라 혹은 파르티잔이 탄생한 것이다. 유럽의 공법은 그런 귀찮은 일을 막기 위해, 전쟁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국가에 한정했고 정규군만이 교전의 주체라고 못박았다.

흔히 전쟁포로에 대한 인도적 보호장치라고 알려진 제네바협약은, 이를테면 정식으로 군복을 입고 견장을 갖춘 정규군만을 전쟁포로로 예우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부당한 외세의 무력에 굴복한 나라에서 벌어지는 민중투쟁이 모조리 범죄자에 의한 범죄행위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강대국들끼리 정해놓은 ‘그들만의 리그’ 속에서 약소국가 민중투쟁은 한낱 불량배의 그것으로 격하된다.

2003년 미국이 벌인 제2차 걸프전에서 개전 초기에 미군의 포로가 된 이라크군은 현재 유엔이 정한 국제 전쟁포로재판소가 아닌 쿠바에 있는 관타나모 미군기지에 구금돼 있다. 미 국방성에 따르면 이들은 전쟁포로가 아니라, 범죄자들이다. 까닭은 교전 당사국이었던 미국에 의해, 이라크가 ‘국가’로 인정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국의 편의주의는 이라크를 국가가 아닌 범죄집단, 즉 ‘악의 축’이라고 명명했던바, 이라크 포로들에 대한 인권침해가 끊이지 않는 것은 애초부터 이들이 포로의 지위를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존 키건의 담론화된 제국주의

“국제협약을 통해 우주는 비군사화되었다” “미국과 구소련은 핵무기 수를 줄여왔고 계속해서 줄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또는 “거의 모든 국가가 대인 지뢰 사용을 금지하는 데 서명했다”와 같은 언명은 지나치게 설명이 부족하다. 저자는 미국이 방금 거론된 세 가지 국제협약을 지속적으로 어겨왔으며 준수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전혀 지적하지 않는다. 영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한번도 추악한 전쟁에 가담한 적이 없었다고 공표하는 이 책은, 놀랍게도 영국이 자랑한다는 라디오의 강연물이라고 한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라는 말을 비틀어 “국민교육은 정치의 연장이요, 전쟁은 국민교육의 연장”이라는 것을 증명한 <전쟁과 학교>를 읽다가, 갑자기 분(噴)이 치밀어 쓴 이 독후감은 “내가 말했던 것은 ‘내가 생각한’ 것이 아니다”라던 푸코의 말을 떠올려준다. 25년간 영국 육군사관학교에서 강의했던 존 키건은 영미 제국주의 담론에 사로잡힌 가엾은 복화술사일 뿐이다. 존 키건의 담론화된 제국주의 또는 제국주의화된 담론이 불러온 재앙이 7·7 런던 테러였다고 믿는 사람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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