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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조광조의 좌절된 ‘과거사 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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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0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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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와 반정이 꼬리를 물던 시대에 개혁정치의 깃발 들고 관료들에 맞서다
‘도덕적 정당성’이라는 유일한 힘이 약화되자 훈구파의 반격으로 무너져

▣ 장정일/ 소설가

조선 중기에 속하는 중종 시절, 34살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왔던 조광조는 훈구세력이 일으킨 기묘사화(1519년)로 목숨을 잃었다. 그는 죽고 난 뒤 유교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순교자’로, 조선 왕조의 유교 문화를 발전시킨 ‘초석’으로 추앙받지만 당대의 평가는 상반되었다. 이이는 “학문이 채 대성하기도 전에 갑작스레 요로에 올라, 자신도 죽고 나라도 어지러워졌다”고 혹평한 반면, 이황은 “그로 말미암아 선비들의 학문이 지향해야 할 바와 정치의 근본이 드러났다”고 고평한다.

‘정국공신’들은 아첨꾼이었다


조광조가 ‘공자로 되돌아가자!’는 취지의 개혁정치를 벌인 까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살았던 시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가 수학하던 청년 시절에는 연산군이 벌인 두 차례의 사화(무오·갑자)가 있었고, 중종반정이 꼬리를 물었다. 게다가 세조가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것도 겨우 50여년 전의 일에 지나지 않았다. 유교가 국시인 조선에서 이런 파천황적인 일들이 벌어지게 된 까닭은 왕과 신하가 성리학적 이념을 옳게 터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그는, 유교 근본주의 운동을 일으킨다.

조광조는 ‘공자 말씀’을 무기로 사사건건 왕과 훈구세력을 함께 압박했다. 중종은 조광조를 이기지 못해 조선 왕조 건국 때부터 있어왔던 소격서(昭格暑·기우제를 지내는 도교 관련 사당)를 폐지할 수 밖에 없었고, 중종반정으로 조정의 주류가 된 훈구세력은 위훈삭제(僞勳削除) 공세를 받고 전전긍긍했다. 중종반정으로 정국공신이 된 117명 가운데는 아무런 공도 없으면서 서로를 추천하거나 뇌물에 의해 공신에 봉해진 자가 많았다. 하지만 조광조가 정국공신의 65%에 달하는 96명의 녹훈을 박탈하고자 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과거사 청산’과 관련된 도덕성 회복 문제였기 때문이다.

(일러스트레이션/ 황은아)

중종반정에 참가했던 대부분의 정국공신들은 연산군에게 올바른 간언은커녕 비굴하게 아첨했던 “개나 돼지”들이었다. 세력을 불리기 위해 마구잡이로 정국공신을 참칭한 이 무리는 “자신들의 군주가 올바른 정치를 하도록 이끌었어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한 채 자신들이 섬기던 군주를 스스로 몰아낸 사람들”로,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도덕적인 자책을 온 나라에 보여주는 성숙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50결(結) 이상의 토지 소유를 금했던 조선시대의 토지공개념인 한전법(限田法=均田制)은 민생을 위한 개혁이었으나 주장에만 그쳤다. 조광조가 남긴 유일무이한 제도적 개혁은 시험이 아닌 추천에 의해 관리를 뽑아쓰는 현량과(賢良科). 수험자의 학식 여부만 가릴 뿐인 과거시험으로는 덕행의 유무를 알 수 없고, 덕행이 없는 관리로는 수신(修身)·수양(修養)이 바탕된 유교적 지치정치(至治政治)를 펼칠 수 없다는 게 조광조식 인재등용의 요체였다.

현실정치의 ‘힘’ 싸움을 감당하지 못해

그러나 조광조의 현량과 설치는 조정의 대다수를 차지한 훈구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인위적 ‘물갈이’의 목적도 컸다. 훈구파의 반격이 시작된 지점이 여기다. 정치의 바깥에 있을 때는 도덕적 정당성을 앞세워 기득세력을 공박할 수 있었으나, 중종의 총애로 사간원의 장(長)이 되자 그도 ‘힘’ 싸움을 동반한 현실정치를 감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광조가 지닌 힘은 그의 도덕적 순수성이었으며, 당시 조선 왕조의 핵심적 지배 세력은 이러한 도덕적 비평 앞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그들이 보기에 조광조도 자기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편법을 동원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면 적어도 조광조를 그렇게 몰고 갈 충분한 명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조광조에겐 훈구세력이 무진장으로 가지고 있는 그 힘, 권력기반이 없었다. 위훈삭제로 정치적 승리를 맛본 나흘 만에 훈구세력의 쿠데타가 일어났고, 중종은 연산군의 운명을 떠올리며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렸다.

2000년 대우학술총서로 일찌감치 출간되었으나 이제야 도서관에서 찾아 읽은 정두희의 <조광조 - 실천 지식인의 삶,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아카넷, 2001, 증보신장판)는, 이 책이 꼭 필요한 현재는 절판되고 없다. 재간되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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