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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사회주의적 인간’을 두들겨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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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2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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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체제가 노동자를 미숙 상태로 만들어 통일을 저해했다는 연구자들
왜 ‘보이지 않는 손’이 ‘더러운 손’이 된 사실은 이야기하지 않나

▣ 장정일/ 소설가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통일정책연구팀의 <남과 북, 뭉치면 죽는다>(랜덤하우스중앙, 2005)를 세 시간 남짓 만에 정독했다. 이 책의 공동 저자들은 통일 독일의 경제적 몰락과 정부의 탈북자 정착 지원 정책의 실패 사례를 근거로, 자본주의 체제하의 남한과 사회주의 체제하의 북한이 ‘뭉치면 죽는다!’고 말한다. 저자들을 그렇게 믿도록 만든 통일 독일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고, 탈북자들의 남한 정착은 왜 실패했을까?


북한에 자본주의 인성을 이식하라?

통일 15년째를 맞은 독일 경제는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지만, 정작 심각한 것은 동서간의 사회적·문화적 갈등이라고 한다. 통일 국가 내에서 “우리는 같은 민족이 아니다!”라고 선언할 정도로 새로 부상하고 있는 동서독 주민간의 심리적 분단은, 두 지역간의 경제적 격차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 문제를 연구한 독일의 사회학자와 정신과 의사는 동서독인들의 인성은 “근본적으로 달라도 너무 다르다”면서 ‘사회주의적 인성’을 간과했기 때문에 독일이 시행한 모든 경제정책과 동독민 동화정책이 실패했다고 말한다.

구 동독 사회와 동독인을 자세히 연구한 마츠와 엥글러는 동독인들이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국가가 했던 역할을 이렇게 분석한다. 즉 국가는 주민에게 각종 ‘시혜적 사회보장’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체제에 순응’시키기 위해 ‘공포와 위협’을 사용했고, 개인은 국가가 베푸는 시혜에 오래 의존하면서 ‘미성숙 상태’에 머무르게 되었다. 때문에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의식과 스스로의 처지를 개선하려는 도전정신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이런 미성숙한 사회 인자들은 노동 현장에서 그저 되는 대로 ‘소극적으로 무관심’하게 보내게 되며, 한량(閑良)과도 같은 노동자 상(相)을 만든다. 이 ‘노동자인 척’하는 노동자 상이 통일 독일 체제, 더 정확하게는 자본주의 체제에 동독인들이 적응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시장경제에서 낙오된 동독인들은 자신들의 노력과 책임 부족을 서독인들의 탐욕에 전가하며, 자신들의 열악한 처지를 국가에 하소연한다.

(일러스트레이션/ 황은아)

“동독처럼 오랫동안 노동자를 체계적으로 미숙 상태에 빠트린 국가도 없었고, 노동자를 사회적 온실 속에 살게 한 곳도 없었다”는 마츠와 엥글러는 “한마디로 극단적인 이기심과 노동을 기피하는 사고가 뼛속 깊이 박혀 있으면서 국가에는 모든 것을 요구하는 인간이 사회주의적 인간”이라고 말한다. 선행자의 연구를 복창(復唱)하는 한국인 공동 연구자들은, 통일 이후의 체제 문제와 새로운 지역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재 진행 중인 북한의 시장개혁이 성공”하도록 도우면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인성도 이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통일 논의는 많을수록 좋다

이 책은 인간은 그렇게 선한 존재가 아니거니와 경쟁이 없는 사회에는 정체와 퇴보만 있을 뿐이라는 반사회주의 교의를 되풀이하면서, 개인의 이익 추구가 공동선(共同善)을 가져온다던 ‘보이지 않는 손’이 오래전에 ‘더러운 손’이 되었다는 사실은 쏙 빼놓는다. 자본의 무제한적 독점과 전횡이 이루어지는 신자유주의 광풍 속에서, 퇴출의 칼날을 맞는 피고용자들은 언제나 ‘노력과 책임이 부족하며 도전정신이 없는 미성숙한 사회 인자’로 치부된다. 그것이 기세 좋게 ‘사회주의적 인간’을 두들겨팬 저자들의 흰 손에 묻은, 핏자국이다.

시인 고은은 언젠가 ‘통일이 되기 위해서는 남과 북에서 통일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모두가 동시에 사라지면 된다’는 시구를 남겼다. 기억이 자세하지 않아 간접인용 부호 속에 넣을 수밖에 없는 그 참언은, 이 땅의 통일 논의가 남북 위정자의 독재를 연명하고 당리당략을 건사하려는 반통일 논의였다는 것을 통렬하게 지적하는 한편 ‘우리는 같은 민족’이니까 체제나 이념의 장애만 걷어내면 즉시 합칠 수 있다는 감상적 통일론마저 품고 있어 무척 흥미롭다. 하지만 이 책의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무력 통일론만 아니라면, 통일에 관한 논의는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 그게 요즘 유행하는 '안티'풍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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