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육강식의 우주를 폭파시킨다”는 박열의 허무주의는 전향으로 끝나
무정부주의자 가네코 후미코는 왜 그의 연인과 달리 자결을 선택했을까 ▣ 장정일/ 소설가
1923년 9월1일 정오, 대지진이 간토 일대를 엄습하고 난 뒤인 오후 세시부터 “조선인이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약을 푼다”는 유언비어가 도쿄에서 요코하마 지역에 넓게 퍼져나갔다. 그날 저녁 무렵부터 정부와 군경은 “불령선인”을 주의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다음날부터는 “조선인으로 보이면 끌고 오고 저항하면 죽여도 좋다”는 지시가 하달되었다. 그 결과 관민일체의 학살이 자행되어 총 6618명의 조선인이 죽었다.
간토대지진과 박열의 ‘테러 계획’ 조선인 학살은 대재난 앞에서 고통을 전가하고 국민적 일체감을 누리게 해줄 희생양이 필요했기 때문에 저질러졌지만, 일본인들이 ‘조센징 사냥’이란 광란에 빠져든 진짜 이유는 그들의 무의식 깊이 ‘도저히 조선인을 길들일 수 없다’는 공포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은 조선인 폭동이라는 ‘환상의 위협’을 일본인들 뇌리에 심어주었다. 천황제의 주술이었을까? 일본인들에게 “조선인 학살은 국가 비상시국하에서 보여줄 수 있는 충성의 증거”이기도 했다. 흔히는 박열이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장에 폭탄을 투척하려고 모의를 하다가 발각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좀더 복잡하다. 간토 대지진이 일어난 지 이틀 뒤인 9월3일 밤, 요시찰 인물이었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두 사람이 동거하던 집에서 보호검속되었다. 애초에 일본 경찰은 박열과 그가 속했던 조선인과 일본인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단체인 불령사(不逞社)를, 진재(震災)를 틈타 폭동을 일으키려고 했던 배후 조직으로 만들려고 했다. 조선인 학살 사건이 “민족적 박해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조선인 폭동을 사실로 날조하여 국가의 책임을 완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간토 대지진이 일어나기 한해 전부터 박열은 여러 차례 폭탄을 구하려고 했고, 그해 5월 무렵부터는 목표를 황태자의 결혼식장으로 구체화하긴 했지만 “가능성이 희박한 계획”이었다. “대역죄를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랐지만, 간토 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한 재료를 찾고 있던 예심판사에게 우연히 얻어낸 진술은 ‘대박’을 터트렸다. 혁명적 낭만주의자로 테러를 신봉했던 박열은, 치밀한 조직가나 냉철한 혁명가는 못 됐다. 그는 “강자와 약자의 투쟁, 약육강식 관계가 결국 우주의 대원칙”이라고 믿었는데, 서구 열강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 앞에 속수무책이었던 당대의 조선과 중국 지식인들에게 사회진화론만큼 영향을 미친 것도 없었으니 새삼스러울 건 없다. 문제는 그런 사관(史觀)과 논리를 신봉하면 할수록, 강자의 지배가 정당화된다는 거다. “가네코 후미코라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까?”
무정부주의자 이전에 민족주의자였던 박열에게 사회진화론은 주박이자 장벽이었다. 무정부주의의 귀중한 가르침인 상부상조론을 뻔히 놓고도, 사회진화론을 떨칠 수 없었던 박열은 ‘우승열패와 생존경쟁이 우주와 자연의 원리라면, 우주 자체를 폭파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가 닿는다. 이름하여 우주만물절멸론(宇宙萬物絶滅論). “인간성은 모두 추악할 따름”이니 진화론을 껴안고, “우주의 만물을 멸망”시킬 수밖에! 그를 무정부주의자가 아닌 허무주의자로 부르는 까닭이다.
일전에 읽은 <미래를 여는 역사>의 한 페이지는,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조선 식민통치와 천황제에 항거해 조선인과 연대했던 인물로 가네코 후미코가 소개되고 있다. 그래서 읽기 시작한 게 야마다 쇼지의 <가네코 후미코>(산처럼, 2003). 동지이자 연인이었던 두 사람이, 일본 황실에 폭탄을 투척하려다가 발각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것은 일찌감치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네코 후미코(1903~26)라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까?”라고 시작되는 <미래를 여는 역사>의 첫 구절을 읽었을 때, 내 가슴은 크게 소리내며 주저앉았다. 겨우 스물셋. 천황의 은사(恩赦)를 받고 사형을 면한 박열은 전향을 하고, 가네코 후미코는 자살을 택했다. 왜 그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는지는, 직접 읽어볼 일이다.
무정부주의자 가네코 후미코는 왜 그의 연인과 달리 자결을 선택했을까 ▣ 장정일/ 소설가

간토대지진과 박열의 ‘테러 계획’ 조선인 학살은 대재난 앞에서 고통을 전가하고 국민적 일체감을 누리게 해줄 희생양이 필요했기 때문에 저질러졌지만, 일본인들이 ‘조센징 사냥’이란 광란에 빠져든 진짜 이유는 그들의 무의식 깊이 ‘도저히 조선인을 길들일 수 없다’는 공포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은 조선인 폭동이라는 ‘환상의 위협’을 일본인들 뇌리에 심어주었다. 천황제의 주술이었을까? 일본인들에게 “조선인 학살은 국가 비상시국하에서 보여줄 수 있는 충성의 증거”이기도 했다. 흔히는 박열이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장에 폭탄을 투척하려고 모의를 하다가 발각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좀더 복잡하다. 간토 대지진이 일어난 지 이틀 뒤인 9월3일 밤, 요시찰 인물이었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두 사람이 동거하던 집에서 보호검속되었다. 애초에 일본 경찰은 박열과 그가 속했던 조선인과 일본인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단체인 불령사(不逞社)를, 진재(震災)를 틈타 폭동을 일으키려고 했던 배후 조직으로 만들려고 했다. 조선인 학살 사건이 “민족적 박해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조선인 폭동을 사실로 날조하여 국가의 책임을 완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간토 대지진이 일어나기 한해 전부터 박열은 여러 차례 폭탄을 구하려고 했고, 그해 5월 무렵부터는 목표를 황태자의 결혼식장으로 구체화하긴 했지만 “가능성이 희박한 계획”이었다. “대역죄를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랐지만, 간토 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한 재료를 찾고 있던 예심판사에게 우연히 얻어낸 진술은 ‘대박’을 터트렸다. 혁명적 낭만주의자로 테러를 신봉했던 박열은, 치밀한 조직가나 냉철한 혁명가는 못 됐다. 그는 “강자와 약자의 투쟁, 약육강식 관계가 결국 우주의 대원칙”이라고 믿었는데, 서구 열강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 앞에 속수무책이었던 당대의 조선과 중국 지식인들에게 사회진화론만큼 영향을 미친 것도 없었으니 새삼스러울 건 없다. 문제는 그런 사관(史觀)과 논리를 신봉하면 할수록, 강자의 지배가 정당화된다는 거다. “가네코 후미코라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까?”

(일러스트레이션/ 황은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