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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역사에 폐수를 방류하는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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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2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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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학사관 극복을 외치는 일본 우익과 왜곡으로 점철된 일본 역사교과서
한중일 공동의 역사교재 2권이 동아시아 자민족 중심주의를 해체한다

▣ 장정일/ 소설가

2001년. 비록 채택률 0.039%에 그치긴 했지만,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 펴낸 후소샤판 역사 교과서는 동아시아를 소란하게 했다. 일본군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백인의 식민지 지배에 시달리던 현지 사람들의 협력 때문이며, 일본의 전쟁 목적은 자존자위와 아시아를 구미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였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로 주변국의 반발을 샀다.

‘전쟁할 수 있는 나라’ 만들기


또한 그 교과서는 임나일본부설과 임진왜란, 대한제국 병합과 식민통치 등에서 무려 25군데의 왜곡과 누락으로 한국 정부와 시민단체의 항의와 수정 요구를 받았다. 이에 일본의 한 신문은 새역모의 역사 교과서 검정과 채택을 반대하는 한·중 정부와 여론에 대해, ‘교과서 검정과 채택은 일본 국내 문제며, 교과서 채택 저지 운동을 하는 것은 내정간섭’이라는 사설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한 나라의 국사(國史)는 자국의 정체성이나 ‘국민 만들기’와 직접 관련된다. 때문에 타국의 국사 교과서에 간섭하는 것은, 내정간섭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사기술의 자민족 중심주의가, 여러 나라의 기억이 얽혀 있는 역사적 사건을 자의적으로 구성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여러 나라를 관통하는 하천이 그 강을 함께 쓰는 여러 나라의 공공재인 것처럼, 공공의 감각과 상식 또는 국제적 소통과 합의를 얻지 못한 역사적 재구성은 유독물질을 하류에 방류해 분쟁을 일으키는 짓이다.

(일러스트레이션/ 황은아)

바로 그런 염려 때문에 1982년 최초의 교과서 파동 때 일본은 ‘근린 제국 조항’을 역사 교과서 검정 기준 가운데 하나로 설정했고, 그 조항을 근거로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일본에 항의할 수 있었다. 거기엔 “이웃한 아시아 여러 나라간에 근현대사의 역사적 현상을 언급할 때는 국제 이해와 국제 협조의 견지에서 필요한 만큼의 배려를 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새역모와 그 주변에 포진한 우익 인사와 자민당 내의 강경보수 인사들이 후소샤판 역사 교과서를 통해 획책하는 것은, 자학사관의 극복을 통해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이미 일본은 국외 파병을 감행해 방어 목적의 자위대 원칙을 파기했으며, 전쟁을 금지하는 평화헌법을 고치기 위한 시도도 심심찮게 외신을 타고 있다. 더욱 섬뜩한 것은, 러일전쟁 100돌이던 지난해의 일본 분위기였다. 대중소설이긴 했지만, 러일전쟁을 모델 삼아 국가전략을 짜나가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100년 전에는 일본이 조선을 놓고 러시아와 싸웠다면, 이제는 자기 목을 겨누고 있는 흉기(한반도)를 놓고 중국과 일전을 해야 한다는 거다.

근현대사부터 차근히 맞추자

일본 우익의 자학사관 극복 원년이, 역설적이게도 동아시아의 자민족 중심주의 역사를 해체하는 원년이 되어버렸다. 참여 주체나 필진은 다르지만 한달 간격으로 나란히 출간된 한일공통역사교재 제작팀의 <조선통신사>(한길사, 2005)와 한중일3국공동역사편찬위원회의 <미래를 여는 역사>(한겨레신문사, 2005)는, 2001년 새역모 파장에 대응하고자 자발적으로 모인 한·중·일 역사 학자와 교사들의 공동 결과물이다.

앞의 책은 조선통신사가 조선의 조공사절이 아니라 문화사절단이었음을 분명히 하면서, 일본이 조선통신사를 불필요하게 여기게 된 시점과 개국 직전의 선택을 분석한다. 한편 뒤의 책은 근대 국가의 역사에서 중요시되는 민족이나 근대화 담론에서 벗어나, 인권과 평화 같은 인류 보편의 가치를 동아시아 연대 앞에 제시하고자 한다. 하지만 예를 들어 중국의 6·25 참전 같은 문제 앞에서는 중국의 일국사를 철저히 보호하고 있다. 고대와 전근대사가 아예 생략된 것을 약점으로 여길 독자도 있겠지만, 시간이 먼 과거의 역사일수록 근대 국민 국가관이 조작적으로 투영되기 일쑤라는 고대사의 상식을 알기에, 근현대사부터 차근히 맞추어가는 것이 오히려 괜찮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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