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움’을 목숨과 바꿔 지켜낸 이들의 혼과 넋이 깃든 곳, 절두산 성지를 찾아
글 · 사진 윤승일/ 여행전문기고가 nagneyoon@empal.com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찬바람이 여전한 2월 중순. 일기예보는 황사 소식을 전하는데 하늘은 오히려 유난히 맑습니다. 기온조차 평년에 비해 4~5도가 높다고 합니다. 청한 하늘과 따뜻한 날씨는 겨우내 가둬둔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습니다. 결국 한강 절두산에 나왔습니다. 한국 천주교 사상 가장 참혹한 박해가 이뤄졌던 곳입니다.
돌계단에 앉아 여의도를 바라보며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는 이곳까지 올라왔다고 합니다.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가 파헤쳐지고, 1871년에는 미국 함대의 침입까지 더해지면서 절두산에서 칼춤은 6년여나 계속됐다고 합니다. “양이로 더럽혀진 한강을 서학쟁이들의 피로 씻어라”라는 구호 아래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목이 잘리거나 절벽에서 밀쳐져 죽임을 당한 수가 수천에서 1만에 이르렀다고 하니, 당시의 광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래서 누에머리(잠두봉)라는 이름까지 머리가 떨어진 산(절두산)으로 바뀌어야만 했던 참혹한 곳입니다. 그런데 아름답습니다.
한강변 주차장에서 절두산으로 오르는 길목에 세워진 순교기념비에 새겨진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표정. 절벽의 작은 동굴 안에서 두 손 모은 성모상과 그 앞에 놓인 꽃 두 송이. 그리고 가물거리며 빛을 발하는 색색의 봉헌초…. 김대건 신부의 동상과 이 동상을 감싸고 난 오롯한 길, 그 길에 세워진 기념물, 한복을 입고 있는 또 다른 성모상…. 그리고 뜰 안에 능청스럽게 서 있는 석탑까지…. 수천명이 목숨을 빼앗긴 장소. 당연히 장엄하거나 비장하거나 엄숙할 것이라는 선입견은 절두산 성지를 한 바퀴 도는 동안 산산조각 나버렸습니다.
한강변으로 난 돌계단에 기대어 앉았습니다. 강 건너 여의도, 모래밭이라 쓸모가 없어 ‘너나 가져라’라는 뜻이 담긴 여의도로 불리던 섬입니다. 절두산이 잠두봉으로 불리던 그 옛날 밤섬과 여의도, 그리고 양화진 등 한양의 한량들을 불러모았다는 아름다운 주변의 풍광은 빼곡한 건물들과 국회의사당, 강가에 줄지어 선 아파트에 빼앗긴 지 오래입니다. 다만, 초콜릿빛으로 더렵혀졌음에도 여전히 흐르는 한강이 위안일 뿐입니다.
엉덩이를 기댄 돌계단의 작은 틈에는 벌써 초록이 찾아들었습니다. 국적을 알 수 없는 국회의사당 건물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온갖 만행’들 생각에 찾아든 우울함이 초록의 생명력에 순식간에 꽁무니를 감춥니다.
분노가 아닌 미소를 만났다
매년 봄은 이름조차 갖지 못한 여린 풀들과 작은 꽃들의 힘으로 시작됩니다. 여린 초록이 겨울이 남겨놓은 황량함을 지운 뒤에야 온간 화려한 봄꽃들은 피어납니다. 기억되지 않아도, 잡초라는 이름으로 뿌리가 뽑혀도, 제 자리에 시멘트가 뒤덮혀도 늘 때가 되면 찾아오는 초록.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신앙을 부인하지 않았던 150여년 전의 사람들도 초록을 닮았던 것 같습니다.
먼저 목을 베고 본다는 선참후계 방식에 따라 재판도 없이 죽임을 당해야 했던 탓에 수천명에서 1만여명이 죽임을 당했다는데, 이름이나마 남길 수 있었던 이들은 고작 30여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서양 오랑캐에 팔아먹으려 했던 반역자’로 죽었던 그들은 사랑과 평화를 실천한 성인의 자리에서 기억되고 있습니다. 한강에서 시작되는 절두산 들머리 순교기념비에서 그들을 만납니다. 돌에 새겨진 그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그러나 한결같은 것은 그들의 표정이 고통스럽거나 분노에 차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미소는 충남 서산 백제 마애불의 미소와는 또 다른, 그러면서도 닮은 미소로 가슴 한쪽에 불도장을 찍습니다.
절두산 어디에서도 격정이나 분노나 체념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다만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있다는 듯한 미소가 주는 위안을 만났을 뿐입니다. 절두산에 가득한 미소가 비록 후대에 꾸며진 것이라 할지라도 150여년 전 그들이 남겨놓은 절대의 신념이 없었다면 미소 또한 다시 살아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신념을 지킨다는 것. 이는 ‘나다움’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절두산이 아름다운 이유는 ‘나다움’을 목숨과 바꿔 지켜낸 이들의 혼과 넋이 깃든 곳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3층으로 세워진 절두산 순교 기념관. 접시 모양의 지붕은 갓을, 구멍이 뚫린 지붕 위 수직 벽은 순교자들의 목에 씌워졌던 칼을 의미한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는 이곳까지 올라왔다고 합니다.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가 파헤쳐지고, 1871년에는 미국 함대의 침입까지 더해지면서 절두산에서 칼춤은 6년여나 계속됐다고 합니다. “양이로 더럽혀진 한강을 서학쟁이들의 피로 씻어라”라는 구호 아래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목이 잘리거나 절벽에서 밀쳐져 죽임을 당한 수가 수천에서 1만에 이르렀다고 하니, 당시의 광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래서 누에머리(잠두봉)라는 이름까지 머리가 떨어진 산(절두산)으로 바뀌어야만 했던 참혹한 곳입니다. 그런데 아름답습니다.

순교기념비. 새겨진 인물들의 미소가 아름답다(위). 김대건 신부의 동상 뒤편으로 난 산책로. 성경 구절과 그 구절을 형상화한 기념물들이 놓여 있어 사색하며 걷기에 좋다.

한복을 입은 성모상. 천주교 성지임에도 한국의 전통이 담긴 기념물을 쉽게 만날 수 있다.
[ 가는 길 ] 절두산은 서울지하철 2호선과 5호선 합정역에서 10여분 거리로 가깝다. 승용차로는 강변북로로 들어간다. 마포대교에서 양화대교 못 미쳐 안내판이 있다. 성산대교 방향에서 길을 찾을 때는 양화대교 아래에서 합정동 방향으로 좌회전하면 안내 간판이 보인다. 절두산 성지는 노량진 새남터와 서소문 공원과 함께 한국 천주교의 3대 성지로 꼽힌다. 현재의 건물은 병인순교(1866년) 100주년을 기념하여 1966년 3월에 착공해 1967년 10월 완공되었다. 절두산의 지세를 그대로 살리고 한강과의 조화를 꾀한 건물은 문화사적으로도 중요한 의의가 있다. 천주교 박해와 관련한 수많은 유적과 19세기 사회와 문화, 삶을 느낄 수 있는 많은 유물과 자료들을 보관, 전시하고 있어 자녀의 현장교육을 염두에 둔 수도권 인근의 가족 나들이로도 적당한 곳이다. 양화대교 중간의 선유도 공원,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등과 연계하면 하루 나들이 코스로 후회없는 선택이 될 것이다. 절두산 아래 한강 둔치에는 인라인스케이트도 즐길 수 있는 자전거 도로가 상암동 월드컵 공원과 연결된다. 인근의 외국 선교사들이 묻혀 있는 외국인 묘지도 둘러보도록 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