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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순두부] 허무한 ‘헌팅’을 달래주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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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2-0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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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풍전호텔 손수레순두부의 뜨끈한 김… 미국에서 간신히 ‘부킹’ 성공!

성석제/ 소설가

언젠가 소설 속에 ‘새벽 4시에 나이트클럽이 끝나고 난 뒤 그들은 밖으로 나와 노점에서 순두부를 사먹었다’는 구절을 쓴 적이 있다. 이 구절은 내 경험과 직결되어 있다. 경험했으므로 그 장소, 시간도 대략 기억하고 있다. 기억을 되살려 보면 서울 을지로4가쯤에 있는 풍전호텔하고도 ‘나이트’(본디 나이트클럽이겠지만 금석(今昔)을 막론하고 나이트라고 부르는 듯하다) 앞의 손수레에서 팔던 순두부이며, 때는 1980년에서 81년으로 넘어가던 겨울이었다. 순두부의 맛은 뜨겁고 매콤하여 화끈했다. 그리고 매끄러웠다. 입 안에서 씹을 것도 없이 잠시 입속을 배회하다가 목구멍으로 슬슬 넘어가는 그런 느낌이었다. 당시 그들, 아니 우리 셋 중 둘은 그때까지 나이트에서 만날 만한 여자친구 하나도 없는 신세였다. 대략 밤 10시쯤 호텔 앞에서 만난 우리는 나이트 안에서의 술값을 아끼기 위해 근처 선술집에서 소주를 한두병 마신(당시 용어로는 ‘깐’) 다음, 11시쯤 나이트에 입장했다.

일러스트레이션 | 이정은
그때부터 통금이 해제되는 새벽 4시까지 요즘 말로 ‘부킹’을 하거나, 그때 말로 ‘헌팅’(누가 누구를, 누가 짐승이고 누가 인간인데?) 또는 ‘배팅’(춤추면서 배를 부딪친다고 이런 이름이 붙었던가?)을 해야 하는데 도대체 성공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무대 위에서는 ‘현철과 벌떼들’이라는 그룹사운드가 트로트에서 디스코, 블루스까지 자유자재로 연주하며 장내를 휘어잡았다. 얼마나 많은 노래를 불러댔는지 현철의 목소리는 푹 쉬어서 곧 은퇴할 것처럼 들렸는데, 그 뒤에 오히려 그때 단련된 허스키한 목소리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 같았다.

하여튼 돈은 없어 테이블당 ‘기본’인 마른안주와 맥주 ‘대짜’(640ml) 두병만 시켜놓고 아끼고 아껴 마시며 어쩌다 한번 블루스라도 ‘땡길’ 상대를 물색했으나 언제나 퇴짜, 거절이었다. 화장실에라도 갈라치면 머리에 기름을 바른 웨이터가 달라붙어 먼지를 떼준다, 구두를 닦아준다, 손 씻은 뒤 수건을 건네준다 하며 얼마 남지 않은 차비까지 팁으로 빼앗아가곤 했다.


그러다가 신이 점지한 새벽 4시가 되면 ‘현철과 벌떼들’이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을 아무런 사심 없는 천사처럼, 무정하게 연주하여 우리를 나이트 밖으로 몰아내는 것이었다. 나이트 밖 캄캄한 새벽, 허기는 허기대로 지고 갈증은 갈증대로 나며 찬바람이 코가 아리게 몰아쳐와 눈물이 다 나려고 할 때 문득 눈에 들어오는 순두부 수레의 카바이드 등불. 그 불빛 아래에서 김이 펄펄 날리는 순두부를 한 그릇씩 먹고, 내일은 내일의 나이트가 있을 거라고 위로하면서 새벽 버스를 기다리곤 했다. 그게 두번이었던가, 세번이었던가.

그런데 그 나이트 앞 순두부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근래에 내가 먹어본 ‘무농약 우리콩 순두부’라고 하는 권위 있는 순두부들에서는 그 맛이 나지 않았다. 옛날식, 손으로 만들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대부분의 순두부는 입자가 거칠고 쓴맛이 약간 돌았다. 몸에 좋다는 건 알겠는데 이건 새 순두부지 옛날 순두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몇달 전 미국에 간 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는 순두부집에 들렀다가 바로 그 맛, 1980년대 초의 ‘나이트 바로 앞 새벽의 순두부 맛’을 재발견했다. 그 식당 주인은 20년도 훨씬 전에 이민을 오는 바람에 그동안 한국에서 순두부(또는 내 혀 내지는 우리 사회)가 겪은 격렬한 변화를 거의 경험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의 말투가 이민온 시절 그대로 남아 있듯. 근래 서울 강남 어딘가를 지나다가 미국에서 역수입된 듯한 순두부집을 보았는데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이름도 내가 가본 곳과는 아주 달랐다.

그런데 왜 옛날 순두부는 매끄럽게 잘 넘어갔는데 요새 것은 입안에서 오래 돌까. “대량으로 싸게 순두부를 파는 데는 콩을 방앗간에서 빻아다가 재료로 쓰기 때문에 입자가 곱다. 요즘 소량으로, 집에서 하는 순두부는 기껏 믹서기로 갈 뿐이니 입자가 거친 것이다.”

두달 전쯤 강원도에서 들었던 이야기다. 그 집 안주인이 직접 순두부를 만들어주면서 한 말이니(그 순두부 맛은 환상적인 속도로 발전해왔는데 지난번 맛은 거의 완성된 맛이었다)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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