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둥에서 건너온 증평 복성원 자장면에 두 손 든 이유… 그저 먹을 수 있을 때 실컷 먹어둬야지
충북 증평은 군인들이 많은 소도시이다. 증평 읍내에는 중화요리 식당(내가 무심코 ‘중국집’이라고 하자 복성원의 주은준 사장이 ‘중화요리 식당’이라고 정정해주었다)이 열 몇 군데가 있다. 군인들은 첫 휴가를 나오면 무조건 자장면 곱빼기부터 먹고 보는데 군인들이 많이 올 듯한 곳이 바로 복성원이다. 그리 크지 않은 증평의 중심부 네거리에 있어서 찾기도 쉽다. 주 사장은 “외지 분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군인들이 많이 오지는 않는다. 비율로 치면 5% 미만일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다른 지방과 비슷한 정도이고 내 선입관이 틀렸다는 것이 된다.
그가 말한 ‘외지 사람’이자 선입관으로 살아가는 내가 복성원에 간 것은 PC통신의 음식동호회에 ‘증평 자장면’이 최상위권에 올라 있다면서 전화번호를 입수해온 이가 있었던 덕분이었다. 대여섯해 전쯤의 일이다. 그때는 사실 음식동호회에서 추천을 받을 만큼 맛있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다. 계절은 여름이었고 서향집인 식당 내부는 기울어가는 햇살이 길게 안까지 뻗쳐들어오고 있어서 의자가 뜨뜻했다. 그 의자에 앉아 자장면을 기다리자니 주방 안쪽에서 누군가 땀을 뚝뚝 흘리며 면을 뽑고 있을 거라고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허기져 있지를 않았다.
그런데 함께 갔던 이는 그때 먹었던 자장면의 맛이 아주 좋았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그 뒤로도 꾸준히 증평에 가서 자장면을 먹었고 주변 인물 상당수를 증평 자장면 예찬자로 만들었다. 이를테면 삶이 무덤덤하고 밋밋하게 느껴질 때 소풍을 가듯 옆집 사람에게 “우리 증평 가서 자장면이나 먹고 올까?” 하게 된 것이다. 이번에 새로 가보니 리모델링을 해서 전혀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뭐랄까. 얼마나 깔끔한지 파티를 해도 좋을 정도였다. 산에서 막 내려온 터라 배가 고팠고 계절은 겨울이라 냉정하게 맛을 평가할 수 있었다.
증평 자장면, 아니 복성원 자장면은 면의 굵기가 약간 가늘다 싶게 균일하다. 물론 기계로 뽑은 면이다. 예전에는 사람이 직접 뽑았는데 그게 사실 ‘사람 잡는 일’이어서 면 뽑다가 “어깨 빠진 사람이 많다”고 주 사장이 말했다. 근래 ‘옛날자장면’이라는 이름으로 면을 직접 뽑는 것을 시연하면서 지나치게 굵은 면, 극단적인 경우 어린아이가 목에 걸려 토할 정도의 굵기를 가진 면을 태연히 내놓는 곳을 더러 가보았는데 그것보다는 차라리 기계 면을 택하는 게 나을 듯싶었다. 복성원의 면은 탄력이 강하고 쉽게 붇지 않는다. 면에 끼얹는 소스는 약간 양이 적은 듯했는데 결국 적당하다는 걸 알게 됐다. 면을 다 먹고 난 뒤 접시에 남은 소스만 먹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짜지 않은 소스에 들어 있는 돼지고기, 양배추와 양파의 질감도 좋았다. 특히 야채가 신선하게 느껴졌는데 그것 때문에 간자장처럼 막 만들어낸 소스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개성이 느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디가 잘 되면 다 따라하는 스테레오 타입이 아니라 증평하고도 복성원에서나 있을 법한, 사람이 만드는, 세상에 둘이 아닌 그런 맛이었다. 복성원에서는 또 삼선짬뽕을 추천했는데 그 맛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고상한 품위’라고 하겠다. 이런 맛이 어디서 나왔을까.
“재료를 좋은 걸로 씁니다. 비싸더라도 재료에는 돈을 아끼지 않지요.”
계산대에 앉아 있던 뇌(雷)씨 성을 가진 사장 부인이 말했다. 뇌 부인은 산둥 출신인 그의 시아버지가 6·25 언저리에 식당을 연 이래 50여년을 운영하다 지난해 돌아가셨다는 것, 주 사장이 음식을 배운 곳은 바로 그 식당의 주방이라는 것 등등을 이야기했다. 옆에 있는 태화장은 시아버지와 동업하던 분이 차린 식당이고 그 역시 그만큼 오래된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두 식당의 전화번호는 한 자리만 달랐다. “앞으로 10년쯤 지나면 대를 이어 중화요리를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지금 세대는 공부를 많이 마치고 나서는 식당을 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10년 뒤에는 어디 가서 이런 자장면을 먹을 것인가. 먹을 수 있을 때 실컷 먹어두자. 당장은 그 수밖에 없겠다. 글 성석제 | 소설가
사진 김학민

계산대에 앉아 있던 뇌(雷)씨 성을 가진 사장 부인이 말했다. 뇌 부인은 산둥 출신인 그의 시아버지가 6·25 언저리에 식당을 연 이래 50여년을 운영하다 지난해 돌아가셨다는 것, 주 사장이 음식을 배운 곳은 바로 그 식당의 주방이라는 것 등등을 이야기했다. 옆에 있는 태화장은 시아버지와 동업하던 분이 차린 식당이고 그 역시 그만큼 오래된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두 식당의 전화번호는 한 자리만 달랐다. “앞으로 10년쯤 지나면 대를 이어 중화요리를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지금 세대는 공부를 많이 마치고 나서는 식당을 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10년 뒤에는 어디 가서 이런 자장면을 먹을 것인가. 먹을 수 있을 때 실컷 먹어두자. 당장은 그 수밖에 없겠다. 글 성석제 | 소설가
사진 김학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