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남북한 유엔(UN) 동시 가입은 국제법상으로 한반도에 두 국가 체제가 있다는 걸 인정한 것이다. 근데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서는 ‘남과 북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했다. 두 국가로 가는 것과 특수관계로 가는 것 사이에 긴장관계가 있다. 이번 정상회담은 두 길 중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결정하는 계기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문 대통령의 발언은 ‘2국 2체제’, 즉 남북연합제 가능성을 암시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북한의) 체제 안전을 위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한-미 동맹은 굳건히 하되, 남과 북은 평화협정을 맺어 (북한이 우려하는) 체제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북한은 그동안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것과 북한의 비핵화 협상은 북한과 미국 간의 의제라고 주장해왔다. 이것과 별개로 남북은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6·15, 10·4 공동선언을 배경 삼아 별도의 평화협정, 다시 말해 종전을 선언하고 남북 교류와 협력을 활짝 열어가자는 합의를 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북-미 회담을 위한 선제적 의제화 과정이기도 하고, 북한과 미국이 통 큰 결정을 하는 데 징검다리 구실도 할 수 있다.
다만, 북핵 문제에 대해 남북 정상회담에선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원칙적 합의만 하고 구체적인 과정은 북-미 회담으로 넘길 가능성이 높다. 남북 평화협정의 내용은 6·15, 10·4 공동선언을 구체화하는 선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국회 비준 등 절차를 밟아가면서 문재인 정부가 이야기했던 한반도 비핵화, 평화체제, 남북 교류·협력과 번영 세 가지를 동시에 추진해가는 방식이 될 가능성이 크다.
남북이 2국가냐 1국가냐와 관련해 2국가, 즉 투 코리아를 고정하는 식으로 몰아가면 결국은 한국의 역할이 별로 없게 된다. 투 코리아를 강조하는 게 우리에게 실익이 없다고 본다. 한반도에 새로운 공간을 열려면 담대한 교류에 해답이 있는데, 투 코리아를 전제하면 왜 교류를 해야 하는지 모순에 빠진다.
좀 다른 생각인데, 국가연합 같은 이슈를 꺼내지 않은 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오히려 갈등만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화공존 이야기를 해보자. 평화공존의 제도화가 어떻게 가능할지 논의할 필요가 있다.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충분히 고려해 촘촘히 제도화해야 한다. 남북관계는 서독과 동독의 관계와도 다르다. 서독하고 동독은 내전도 없었고 구조화된 대결도 없었다. 유럽과 동아시아 냉전의 성격은 상당히 다르고 한반도 문제가 훨씬 더 복잡하다. 나는 문재인 대통령 등 행위자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한반도가 어떤 구조나 구도 위에 있는지, 이런 게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대비하지 않으면 언제든 역전될 수 있다. 또 남북이 직면한 특수 상황의 하나로 중국을 배제하면 안 된다. 지금의 상황 전개가 기존 시스템에서 속도를 내고 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구갑우 1970년대 동독과 서독이 맺었던 기본조약 같은 것을 체결해야 한다고 본다. 동·서독 기본조약을 보면,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이라는 표현을 쓴다. 나는 남과 북이라고 쓰지 말고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써야 한다고 본다.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에서 민족과 통일을 이야기하지 않은 채 서로를 정상 국가로 인정하고 기존 경계선을 인정했다. 만약 이 상태로 계속 가면 북방한계선(NLL)이 국경선이 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보수도 국경선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나? 동·서독은 1972년에 기본조약을 체결하고 1991년에 통일됐다. 어쨌든 10년이 걸렸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쿨한 이야기가 아닌가. 이런 이야기를 정상회담에서 나눌 수 있다면 어떨까?
이기호 남북기본합의서를 도출했던 1991년 상황과 2018년의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당시엔 이산가족도 많이 생존해 계셨고 남북이 교류와 협력을 통해 ‘통일’을 지향하는 것을 비교적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곧 통일이 목표였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다. 분단정부 체제가 70년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통일로 가는 길이 험하고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뜻한다. 지금의 청년세대는 통일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지만 교류·협력은 이루어지길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그만큼 통일의 조건이 까다로워졌다는 뜻이다. 어떤 의미에서 통일은 목표라기보다 교류와 협력의 결과로 다가올 수 있는 선택으로 바뀌어가는 듯하다.
다소 모순될 수 있지만 남북관계를 여전히 국가와 국가의 관계는 아닌 것으로 규정하면서, 서로의 정치제체를 인정해주는 특수관계로 확고히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당장 협상 테이블의 의제를 모두 풀려 하지 말고 교류·협력을 해나가는 가운데 신뢰를 쌓아야 한다. (6·15 선언 때 남북이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한) ‘남북연합’이든 ‘낮은 수준의 연방제’든 형식보다 평화체제를 확립하고 교류와 협력으로 신뢰를 쌓고, 평양과 서울에 서로 대표부를 설치하고 자유롭게 왕래하고 협의하는 프로세스를 만들 필요가 있다.
이일영 남북 정상회담에서 좀더 집중해야 할 목표, 특히 비핵화에 대해 말씀해달라.
이기호 트럼프의 외교문법이 달라졌다. 과거 미국 외교는 ‘가치동맹’이라는 명분 아래 군사협력뿐만 아니라 정치·외교·경제에서도 우방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진영외교를 전개해왔다. 그러나 트럼프의 외교는 가치동맹을 완전히 해체한 것으로 보인다. 군사동맹, 경제 문제, 정치·외교 문제를 모두 해체해 ‘국익’의 문제로 재구성하는 셈이다. 이렇게 달라진 트럼프의 외교문법 때문에 남북과 북-미가 대화할 수 있는 틈이 생겼다고 본다. 지금까지 북한의 태도로 보아 비핵화에 합의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본다.
주의할 것은 북한 비핵화가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라는 점이다. 문재인 정부도 명확히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을 쓴다. 한반도 비핵화 문제는 문재인 대통령도 선언적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구체적·실질적 논의는 북·미 사이에 이루어질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반도 비핵화 방안으로 통상적인 한-미 군사훈련은 유지하되 미국의 핵전략자산이 한반도에 들어오지 않도록 해, 북한을 군사적으로 자극하거나 위협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하는 선에서 북한을 설득할 가능성이 크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일본의 역할이다. 일본이 북한의 비핵화와 개방에 적극적으로 나온다면 미국을 설득하기 훨씬 쉬워질 수 있다. 한국이 일본을 ‘패싱’하기보다 일본을 설득할 수 있는 장·단기 구상을 함께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번 비핵화 회담의 결과 미군이 아시아에서 유지해온 역할과 위상 등이 재고되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북한의 비핵화는 아시아의 냉전체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새로운 아시아 질서를 만드는 전환점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구갑우 세 가지를 고려해봐야 한다. 먼저 평화 정착인데, (냉정하게 봐야 할 것이) 북한의 체제 안전을 최대한으로 보장해주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남북 기본협정 형태를 공유할 것 같고, 가능하다면 조약 정도를 만들어내야 한다. 국내 정치적으로 동의를 얻어내야 하는데 그게 비준 방식이라고 본다. 어쨌든 남한 정권이 바뀌거나 세월이 흘러도 이 기조가 변하지 않으리라는 점을 보장해줘야 한다. 비핵화와 관련해선 정의용 안보실장이 3월 초 북한에 특사로 갔을 때 김정은 위원장이 핵과 재래식 무기로 남한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더 나올 것이 없다. 그래서 내가 보기엔 담대한 남북교류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대북제재와 연관된다. 미국은 제재를 해제할 생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한국 정부를 포함해 아무도 제재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담대한 교류로 북한과 손잡고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도 가고 아시아개발은행(ADB)도 가야 한다. 그러려면 미국 국내법이 바뀌어야 한다. 또 하나 말하고 싶은 것이, 담대한 남북교류를 한반도에 국한해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다자적 입장을 지지한다. 그게 오히려 북한을 안심시키는 데 도움이 되고, 한국 경제에도 좋다. 만약 개성공업지구에 중국과 일본의 자본이 들어왔다면 북한이 절대로 문을 닫지 못했을 것이다. 담대한 남북교류라는 것을 한반도라는 좁은 틀로 가두지 말자는 것이다.
“북한 손 잡고 AIIB·ADB도 가야”
4·27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는 판문점의 모습. 한반도의 분단 현실을 가장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이일영 구 교수님 말씀처럼, 담대한 남북교류가 중요하다고 본다. 선언, 협정, 조약 등 형식을 실체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은 한반도 경제를 형성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노무현 정부 때 10·4 공동선언에서 합의했던 것, 박근혜 정부가 언급했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등도 포함해야 한다고 본다. 개성공단을 확대해 서해안에 클러스터 만드는 것 등도 의미 있다. 남북한을 넘어 다자간 협력틀에 의해 추진하면 된다. 기존 논의, 전임 정부가 구상했지만 실행 못했던 것을 담담히 실천해야 한다.
이기호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 메시지 이후 김 위원장이 외교 무대에서 주목받는 듯하다. 특히 유럽에서 북한 관광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북한에 서양 관광객이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관광객이 많아지면 시장도 변하고, 외자도 들어오면서, 개혁·개방으로 이어진다. 북한을 방문하는 유럽인과 미국인들에 의해 북한이 위험한 국가가 아니라는 인식이 퍼지고, 국제사회에 정상적인 국가로 인정받길 바란다.
이일영 마지막으로, 남북 정상회담을 어떻게 전망하는지 들으면서 정리하겠다.
안병진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과 5월이나 6월에 획기적인 정상회담을 성공시킨 뒤, 이 사안을 잊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그러고 나면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나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내정자 손에 갈 텐데 굉장히 위험스러운 상황이 예상된다. 일각에서 이야기하듯이, 2021년에 비핵화가 완료될까 굉장히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최종적으로 한반도가 비핵지대화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북한이 언제든 역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모두 대성공할 것이다. 그다음부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관리해나갈지가 중요하다. 문재인 대통령의 능력을 벗어나는 문제다. 한반도 비핵지대화에 대한 근본적 논쟁이 이어질 테고 매우 지리한 싸움이 될 것이다. 기도가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실질적 성과보다 분위기 만들어야”
구갑우 폼페이오가 북한에 가서 “북한이 종이뭉치만으로는 체제 안전이 보장된다고 느끼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는 보도가 있다. 평화협정만으로는 부족하고 실질적으로 체제 안전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가 북-미 접촉에서 논의되는 핵심 의제인 듯하다. 남북 정상회담에서 우리가 주고 싶은 것도 그것일 거다. 그렇다고 미국이 북한에 핵우산을 제공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은가. 지금 나온 것을 종합하면 핵전략자산을 빼달라는 정도가 될 것이다.
이일영 남북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정부는 비핵화에 초점을 두자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비핵화에 초점을 두면 만족스러운 결론이 나기 어렵다. 그건 북-미 문제일 수밖에 없다. 비핵화 문제에 한국이 균형자 구실을 할 가능성은 약하다. 대화 분위기를 대세로 가져가는 것이 중요하다. 단번에 비핵화 성과를 거두겠다는 기대는 금물이다. 오히려 ‘스텝바이스텝’(점진적)으로 가면서 경제 네트워크를 만들어가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번에는 실질적 성과를 내려 하기보다 분위기를 만들면 된다. 이후 실질적 조처는 경제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데, 한국이 그걸 적극적으로 준비해야 한다고 본다.
정리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