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내부로 돌아가는 시간제978호[밤] “인체의 내부는 언제나 밤이다”라고 말한 것은 캐나다의 시인 크리스토퍼 듀드니였다. 시적인 통찰로 가득 찬 <밤으로의 여행>은 밤에 관한 정밀한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눈부신 햇빛도 몸의 내부에 다다르지 못하며, 우리 모두는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육체의 밤’에서 태어났다....
엄마보다 나은 건 ‘젊음’뿐제976호미성숙한 존재를 완전한 인간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교육이라고 말하지만, 모든 교육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어떤 교육은 살아남는 법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타인에 대한 적의와 자기 학대를 가르친다. 가족 간에 이뤄지는 일상적인 ‘교육’이 결핍과 폭력의 대물림이라는 ‘나쁜 교육’의 사례가 되기도 한다. 게오르크…
망설임 없어도 7분44초제974호‘거리’가 다만 공간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광대한 우주적 거리를 계산할 때는 빛의 속도라는 단위를 동원해야 한다. 절대로 닿을 수 없을 만큼 누군가와 떨어져 있다면, 죽음처럼 건너갈 수 없는 곳에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은 다른 시간 속에 있는 것이다. 아득 한 거리는 아득한 시간이다...
가벼운, 빛나는, 사소한제972호삶은 매 순간 빛처럼 가볍게 스쳐지나가지만, 삶의 결과가 그 런 것은 아니다. 삶의 디테일 안에서 장면들은 가볍게 흐르지 만, 최종적인 무의미 앞에서 삶은 끔찍한 무거움이 될 수 있다. 밀란 쿤데라의 <참 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것을 배 경으로 ...
시간과 자기 사이, 운명의 장치제970호기억이 고통과 행복 중 어느 편에 속하는지 묻는 것은 무기력한 일이다. 기억은 어둡고 뻑뻑한 시간 속에 현재를 감금하기도 하 며, 무의미한 현재를 견디게 하는 축복이 되기도 한다. 기억은 아름다움의 형식 이 되기도 하며, 미지의 타인들과 연결되어 있는 시간의 지층들을 감각하게 한 다. 그것을 기억의 미학적 차원과…
‘아무것도 아닌 자’들의 마주보기제966호우정 없는 삶에서, 여전히 우정을 말하는 것은 공허해 보인다. 쉽게 ‘우정’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학연과 지연으로 얽힌 맹목적 인 가족주의이거나, 서로의 이해관계가 만나는 교환가치의 세계일 가능성이 높 다. 좀더 싸늘하게 말한다면, 인간들 사이의 무한경쟁 체제를 도입한 신자유주 의 세계에서 진정한 우정은 불가…
잊는 건 있음의 가장 강력한 증거제964호시인에 대한 소박한 정의의 하나는 ‘언어에 예민한 사람’일 것이다. 그들의 언어가 지나치게 무겁거나 혹은 가벼워 보일 때조차 그것은, 언어의 가능성과 한계의 끝 간 데서 탄생한 언어다. 젊은 시인 오은에게도 언어에 대한 자의식은 시쓰기의 주요한 동력이 된다. 그의 시는 어떤 느낌을 붙들거나 혹은 붙들지 못하는 …
당신에게 꼭 어울리는 이름은 없어요제962호자신의 등기된 이름을 들여다볼 때가 있다. 주민등록증이나 여권을 다시 만들었을 때, 혹은 오래된 학창 시절의 성적표 따위를 들여다볼 때, 거기 등재된 이름이 기이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그 이름은 ‘나’라는 사람의 공적인 기호이지만, 그 이름은 ‘내’가 통과한 시간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름은 …
“더 깊은 잠을 자도 돼요, 당신”제960호햄릿이 ‘죽는 것은 잠자는 것’이라고 말한 이후, 잠은 죽음과 같은 시간으로 생각돼왔다. 꿈꾸는 일이 없다면, 죽음과 잠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의식의 중지와 망각으로서의 잠은 죽음에 대한 은유이며, 죽음의 예비적인 체험이다. 그런데 이런 장면이 반복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잠들어 있다. 그 잠든 사람을 ...
불현듯 마감되리라는 차디찬 예감제958호어떤 여행은 계속 미뤄지고, 어떤 여행은 다음 장면을 알 수 없으며, 어떤 여행은 그 끝을 짐작할 수 없다. 여행은 완결되지 않는 동경이고, 그 대상을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이다. 현대의 여행은 영웅의 모험도 아니고 낙원의 탐색도 아닐 것이다. 살아 있는 한 여행자는 언젠가 일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