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의 수백 가지 냄새 중에는 고향 냄새도 있다제1471호 기습이다. 지난여름 프랑스 파리의 한 일본식당에서 막 라면 그릇을 받아들었는데 갑자기 눈에서 물이 떨어졌다. 아무런 통증도 감정도 없이 라면 국물에 눈물이 후두두 쏟아졌다. 후각은 시각보다도 빨리 뇌에 도달한다는 말은 정확하다. 생선으로 라면 육수를 내는 집이었다. 유럽에선 좀체 맡기 힘든 비릿한 냄새에 ...
갱년기 엄마와 사춘기 딸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제1468호 “나는 우리 엄마가 상당히 특이한(번역: 아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형적인 한국 엄마였더라고(번역: 한국 엄마들은 다 그 모양인가).”딸이 책 <h마트에서 울다>를 읽고는 이렇게 말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고 했다간 ‘토황소격문’에 버금가는, 듣는 엄마 거품 물고...
못 찾겠다 스노우…고양이는 보이지 않는다제1465호 스노우가 사라졌다. 스노우는 전날 우리 집에 온 고양이다. 친구 이자니의 가족이 여름방학을 맞아 팬데믹 이후 3년 만에 고향인 모로코를 다녀오면서 우리 집에 맡겨졌다. 모로코 사람답게 고양이를 너무나 사랑하는 가족이었다. 스노우는 이자니의 남편이 데리고 왔다. 이자니는 이별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렇...
독일에 ‘카공족’이 없는 이유…도서관에 답이 있다제1462호 오전 10시, 베를린 미국기념도서관 문이 열리면 단골인 노인들이 컴퓨터 앞에 자리를 잡는다. 슈퍼마켓 카트에 담요·취사도구 같은 살림살이를 싣고 다니는 노숙인들도 이곳의 단골이다. 에밀리오 에스테베즈 감독의 영화 <더 퍼블릭>에서는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 이상 한파가 덮치자 따뜻한 도서관으로 밀려...
“아시안들은 말썽을 부리지 않지?”제1459호 “특별반에서는 가난과 소외의 냄새가 났다. 이곳은 마치 뒤뜰이나 무대 뒤, 보기 흉하거나 남에게 보여선 안 될 물건들을 숨기는 장소 같았다.”이란에서 태어나 6살 때 엄마 아빠를 따라 프랑스로 망명했던 작가 마리암 마지디는 프랑스 첫 학교 경험을 이렇게 적었다. 프랑스는 프랑스어를 하지 못하는 이민 배경의 아이…
비서, 기자, 캐셔...그런데 이 직업도 아니라면?제1456호 얼마 전 한 아시아 이주민 단체에서 여는 ‘이주 노인과의 대화’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1세대 아시아 출신 이주자들은 반세기 넘도록 독일에서 살았지만 여전히 주변부의 삶에 머물러 있다. 2·3세대와의 문화적 차이, 단절로 인한 소외의 경험은 반복되고 확장된다. 그룹별로 모여 노인 이주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아프간 여성 난민, 한 달 새 2천 명 임신?제1452호 2021년 8월 미군이 갑작스레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고 한 달 뒤 우리 언론에 ‘아프간 여성 난민, 한 달 새 2천 명 임신’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당시 아프간을 탈출한 사람들이 독일에 있는 미 공군기지에 임시 수용됐는데 그 기지에서 한 달 만에 임신한 여성이 2천 명에 이른다고 미 <시엔엔&...
왜 독일인은 목이 쉬면 내 말을 알아듣지?제1448호 4년 전 독일어를 처음 배웠을 무렵, 베를린에선 연극으로 외국어를 배우는 모임이 유행했다. 몸으로 익힌 언어는 절대 잊지 않는다는 취지다. 나도 한 번 가봤는데 그날 우리는 가구 역할을 하나씩 맡아 열연했다. 선생님이 “왜 이렇게 어두워?” 하면 램프 역할을 맡은 학생이 전구처럼 머리 위에서 손을 동그...
한밤중 쓰레기를 줍는데 사방의 전등불이 켜졌다제1445호 12월의 어느 늦은 밤, 뒷마당으로 쓰레기를 버리러 갔다가 여우를 만났다. 시 공식 통계로 ‘베를리너 여우’가 1천 마리다. 베를린에서 여우를 보는 일은 드물지 않지만 대부분의 여우는 고양이처럼 겁이 많거나, 새처럼 사람에게 무관심했다. 그런데 지금처럼 깜깜한 어둠 속에 눈을 번득이며 내게 달려오는 여우라니...
낙제하지 않고 망하지 않고 졸업할 수 있겠니제1442호 “불합격입니다. 확실한 불합격이에요.”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에서 주인공 영문학과 교수 스토너는 워커라는 학생의 박사학위 심사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스토너가 학과장의 총애를 받는, 배경 좋은 워커를 단죄하는 이 장면에 많은 독자가 박수를 보내지만 조금 전 스토너 같은 깐깐하고 성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