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이 맞서겠다고 마음먹자 당황한 건 상대방이었다제1489호 1019년 1월. 겨울밤의 매서운 바람이 수도 개경(현재의 개성)을 둘러싼 성곽에 휘몰아쳤을 때, 분명 스물일곱의 청년 임금은 바람과 맞서고 있었을 것이다. 고려 8대 임금 현종은 바람을 맞으며 성곽 밖, 겨울의 어둠 속에서 가물거리는 불꽃을 봤을 것이다. 그곳에 압록강을 넘어 쳐들어온 거란군이 있었다. ...
무신 최충헌은 왕에 오르지 않았나, 못했나제1486호 1170 년에 시작해 1270 년에 끝난 고려의 무인정권은 고려시대를 관통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 무신이 정권을 잡고 국정을 이끌었다 . 반란과 역모가 빈번했고 , 역적은 들끓었다 . 난세라 부르는 시대였고 출세와 파멸이 어지러이 얽혔다 . 최충헌은 이 무인정권 집권자 11 명 중 네 번째...
명분 없으면 자충수…이재명 영장과 경종 노론의 교훈제1483호 왕은 즉위하자마자 고립됐다. 1720년 음력 6월. 아버지 숙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경종은 걸어온 길만 따지면 ‘준비된 국왕’이었다. 세 살에 왕세자에 올라 29년간 차기 후계자로 교육받았다. 숙종 재위 말년 2년 동안엔 국왕 대신 국가의 크고 작은 일을 결정하는 대리청정(代理聽政...
윤석열 대통령은 현종의 현명함 배울 수 없나제1480호 1659년. 선왕 효종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왕위에 오른 열여덟살의 임금 현종은 첫 정치 현안으로 ‘상복을 입는 기간’을 정해야 했다. ‘예송논쟁’(기해예송·갑인예송)의 시작이다. 자식(효종)의 죽음에 부모(효종의 새어머니 장렬왕후)는 몇 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윤 정부, 카르텔 ‘저격’보다 “왜?” 물어야 진짜 개혁된다제1477호 “정치의 제도와 기강을 바로잡고, 이익을 일으키고 해로운 것을 없애어 이 나라 백성으로 하여금 즐겁게 사는 마음을 품게 한 것은 그의 힘이 컸다.”조선 초기 태조와 태종 때 정승직을 지낸 조준이 죽은 1405년 음력 6월27일 <조선왕조실록>은 그에게 극찬을 남겼다. 여말선초(고려...
지도부 ‘책임 회피’ 일상되면 국가는 무너진다제1472호 1910년 9월10일.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의 한 저택. 중년의 남자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는 막 아편을 탄 술을 스스로 먹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남자는 곁에 있던 동생에게 말했다. “세상일이 이 모양이니 선비가 마땅히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먹기 전) 그릇에서 입을 ...
정조의 ‘깨알 리더십’, 조선 몰락에 영향… 윤 대통령은?제1469호 “왕은 성인(聖人)이셨다.”1800년 음력 10월, 이조참판 윤행임은 그해 여름 사망한 국왕 정조에 대한 묘지문을 지으면서 최종적으로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당대 사람들이 정조를 어떻게 봤는지 알게 해주는 기록이다. 사망한 국왕을 좋게 평가하는 것이 조선왕조의 관례이긴 하나 정조처럼 ‘성인’이라는 ...
민주당, 역사에서 배우는 ‘결정적 경험 극복하지 못하면’제1466호 1519년 음력 11월15일 밤. 조선왕조 제11대 임금인 중종은 승정원 몰래 경복궁의 북문 신무문을 열었다.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이 들어와 왕과 논의한 뒤 조정을 좌지우지하던 조광조와 그의 당여를 숙청하기로 했다. 지난번에 언급한(제1450호 ‘조광조도 피하지 못한 ‘내로남불’…윤석열 정부...
“마, 이게 정치다” 노련한 밀당으로 개혁 이룬 김육제1463호 “한밤중에 자리에 누워 있다가도 그의 죽음을 생각하면 마치 나라의 기둥을 잃은 듯하다.”1659년 윤삼월. 국왕 효종은 신하들과 대화하다 반년 전 죽은 김육(金堉)이라는 신하를 떠올리며 슬퍼했다. 왕의 굳건한 믿음을 엿볼 수 있다. 정작 효종은 생전에 김육을 놓고 ‘고집이 세다’는 불평을 토로하곤 했다...
도감청 의혹…대국의 ‘모욕’에 ‘국가의 자존심’ 어떻게 내보일까제1459호 서기 660년 7월11일(음력).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이 백제 수도 사비성(충남 부여군) 남쪽 당나라군 진영에 도착했다. 신라군은 백제 계백 장군이 이끌던 결사대 5천 명을 뚫고 온 직후였고, 당나라군은 기벌포(충남 서천군 장항읍)에서 백제 수군을 깨뜨리고 상륙했다. 백제의 멸망이 코앞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