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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영국·캐나다 등 본격 도입 논의… 지역화폐 결합땐 경제도 활성화

[왜 기본소득인가] 생활 위한 수입… 지급 조건 없어야 부패·수치심 없애 경제적 자립뿐만 아니라 정치적 자유 찾는 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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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5-24 17:13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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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16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등이 개최한 ‘기본소득 총선의제화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기본소득 실현을 위한 법적토대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4·13 총선에서 노동당, 녹색당은 기본소득으로 각각 30만원, 40만원을 조건 없이 지급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기본소득이라 이름을 붙이지 않았지만 새누리당·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정의당에서도 사회적 약자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 정책을 약속했다. 정부가 약자의 삶을 도와야 한다는 점에는 다들 동의하지만 기본소득에는 동의가 흔쾌히 이루어지지 않는 분위기다. 그렇다면 선거에서 시민들에게 더 다가서야 할 정당들이 왜 기본소득이라는 다소 낯선 개념을 들고 나왔을까?

기본소득(Basic income)은 어떠한 조건도 걸지 않고 일정한 금액을 시민에게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정책이다. 프랑스 경제학자 바티스트 밀롱도(Baptiste Mylondo)가 <조건 없이 기본소득>(바다출판사, 2014년)에서 주장하듯 기본소득은 자유주의 우파부터 좌파까지 이미 다양한 형태로 추진하던 정책이다. 한국에서도 기초노령연금제도가 실시되고 있고, 박근혜 대통령도 지난 대통령선거 당시 만 65살 이상 노인에게 매월 20만원씩 지급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그러니 기본소득이 꼭 낯선 정책이라 여길 이유는 없다.

외국에서 미래의 대안으로 부상

왜 조건 없이 소득을 보장할까? 일하지 않는 사람이 왜 소득을 받아야 하나? 한국처럼 ‘무노동 무임금’ 논리가 깊이 뿌리내린 사회에서 ‘시혜가 아닌 권리’로서 기본소득은 거부반응을 부른다. ‘소득’이라는 표현 때문에 이런 오해가 생기는데, 사실 소득보다 ‘수입’이 더 가까운 표현이다. 기본소득의 취지는 노동에 따른 소득이 아니라 생활을 위한 수입을 보장하는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꼭 필요한 일이지만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거나 낮게 평가되는 일이 많다. 예를 들어 가사노동은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지만 반드시 필요한 노동이고, 도시가구에 먹거리를 제공하지만 소득은 그들의 절반 정도에 불과한 농민의 삶도 그러하다. 돈은 안 되지만 꼭 하고 싶은 일이나 공동체에 필요한 일을 기본소득은 꾸준히 할 수 있도록 돕는다. 특정 활동을 의미 있는 것이라 규정하는 순간, 다른 활동은 배제되거나 박탈감을 느끼기 쉽다. 그러니 조건 없이 지급해야 하는 게 맞다.

사실 조건 없이 받아야 부패나 수치심도 사라진다. 어떤 조건을 거는 순간 그 조건을 검증할 기관이 필요해지고 기관 내부의 이해관계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노동을 중심에 놓고 설계된 지금의 복지체계는 수혜받을 조건의 ‘증명’을 요구하고, 무능함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수혜자는 자존감에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 재정이 부족해질수록 더더욱 그렇게 된다. 엄연히 한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임에도 자신을 ‘잉여’로 정의해야 한다면 그것이 참된 복지일까? 소득이나 자산의 양극화만이 아니라 이런 차별도 연대의식을 파괴한다. 모든 사람이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있으니 무상(無償)이라고 여기는 건 잘못된 발상이다. 세상에 잡초는 없다고 하듯 말이다.

외국에서는 이미 기본소득이 미래의 대안으로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다. 스위스는 기본소득 도입을 위한 국민투표를 준비 중이고, 핀란드는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예비 단계를 실험 중이다. 네덜란드와 뉴질랜드, 캐나다, 영국 등지에서도 기본소득이 논의되고 있다. 그동안 한국에서도 기본소득과 관련해 많은 논의가 있었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나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같은 단체도 있고, 인터넷에 자료도 많다. 특히 올해부터 경기도 성남시가 3년 이상 거주한 만 24살 이상 청년에게 1년에 50만원(4회 분할)의 지역상품권을 지급하는 청년배당사업을 실시하고 있고, 서울시도 청년수당을 준비 중이다.


이렇게 기본소득이 화두가 되자 기본소득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일하지 않아도 소득을 지급한다면 누가 일을 하겠느냐는 목소리부터 누가 그 막대한 재정을 부담할 것인가, 기본소득이 기존 복지체계를 무너뜨린다, 복지를 상품화시킨다는 목소리까지 다양하다. 실제로 핀란드가 기본소득과 복지체계의 축소를 연계시키자 우려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지역 내에서 승수효과 발생

그렇지만 기본소득을 전면 실시한 나라가 별로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비판은 아직 ‘우려’에 가깝다. 물론 무조건 낙관할 이유는 없다. 다만 좌파, 우파를 떠나서 경제성장이 아니라 지속 가능성이 중요한 화두인 지금 시점에서 사회의 전환은 피할 수 없다. 과연 경제성장 없이 복지체계가 유지될 수 있을까? 생태계가 석유문명에 기반을 둔 우리의 복지를 감당할 수 있을까? 자기 삶의 규모를 스스로 정하려는 노력 없이 삶이 지속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질문은 ‘재정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에서 ‘있는 자원을 어떻게 쓸 것인가?’로 바뀌어야 한다. 그럴 경우 기본소득의 강점이 드러날 수 있다. 비슷한 제도로 그 가능성을 점칠 수 있는데, 주민참여예산제도의 연계 가능성을 타진해볼 수 있다. 지방정부가 스스로 기획한 예산이 거의 바닥난 상태에서 적은 돈이나마 주민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돕기 위해 등장한 제도가 주민참여예산제였다. 당연히 우려도 많았다. 하지만 주민들의 전문성이 떨어져 예산이 낭비되거나 주민참여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초기 예상과 달리 주민참여예산제도는 전세계 여러 곳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주민참여예산제도는 허투루 낭비되거나 부적절하게 쓰여온 예산을 꼭 필요한 곳에 알맞게 집행되는 예산으로 바꾸었다. 스스로 기획할 수 있다면 다른 가능성이 생기지 않을까?

특히 기본소득이 지역화폐와 결합될 경우 ‘지역경제’의 동력이 만들어질 수 있다. 기본소득과 관련된 많은 논의가 복지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경제와의 연관 고리는 비교적 약했다. 한국처럼 화폐가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사회에서는 복지·경제·정치·문화 모든 면에서 불균형이 생길 수밖에 없다. 기본소득이 똑같이 지급되더라도 삶의 질은 달라진다. 물가와 생활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즉 기본소득은 비수도권으로의 이주와 생활을 가능케 하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 또 기본소득의 일정 비율이 지역 내에서 유통되는 지역화폐로 지급된다면 지역 내에서 승수효과(Multiplier effect)가 발생할 수 있다. 즉, 지역 내에서 돈이 돌고 돌면 화폐의 액면가보다 몇 배나 많은 경제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00원이 있다면 100원 중 80원을 지역에서 쓰고, 80원 받은 사람이 60원을 지역에서 쓰고, 60원 받은 사람이 40원을 쓰면, 100원을 가지고 실제로는 280원의 효과를 볼 수 있다.

성남시의 실험을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이런 경우 기본소득은 경제의 지역화와 지역 강화를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은 저서 <나는 국가로부터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한티재, 2015년)에서 공유재를 지키고 공공성을 확장하려는 정신이 한국의 제헌헌법 제87조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에 이미 담겨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기본소득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갈 ‘공유지’를 보존하는 역할도 한다. 사실 기본소득 구상은 천하에 온전히 나만의 것이 없다는 점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이 타당한 지적에 나는 ‘시민의 자유’를 덧붙이고 싶다. 한국 사회에는 강자가 약자를 폭력으로 대하는 ‘갑을 문화’나 부당하게 노동자를 괴롭히는 ‘일터 괴롭힘’이 널리 퍼져 있다. 임금을 받는 노동이니 자유가 제약을 받을 수 있다지만, 그렇다고 노동이 자유를 파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청소년 알바부터 일용직, 비정규직, 정규직, 일을 배워가는 과정 하나하나가 인간에게 굴종을 강요하고 자존감을 파괴한다.

물론 이런 문제는 구조적으로 해결되어야 하지만 문화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기본소득은 한국 사회의 갑갑한 문화에 숨통을 틔울 수 있다. 강자의 말을 순순히 따르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여유가 생기니 말이다.

삶의 속도 늦추고 생명 돌아보게 해

이제 기본소득이 한국 사회를 조금은 자유롭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기본소득의 의미는 경제적 자립만이 아니라 정치적 자유에서도 찾을 수 있다. 다음달 집세가 있고 밥값이 있으면 부당한 명령이나 지시에 한 번쯤 버틸 수 있지 않을까?

나아가 기본소득은 잠깐 멈춰 서서 생각하고 돌아보고 손잡을 여유를 마련해줄 수 있다. 지나치게 많은 것을 생산해서 많이 소비하는 시대는 서서히 지나가고 있다. 자신에게 꼭 필요한 만큼 적정하게 소비하지 않으면 모두가 그 혜택을 누리기 어렵다. 기본소득의 효과는 삶의 속도를 늦춰서 주위 사람들과 생명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충청북도 옥천군 안남면 주민들은 상수도 보전지역이라는 제한의 보상으로 자신들에게 지급되는 주민지원 사업비를 모아 마을 기금으로 만들어 도서관을 세우고 마을 계획도 세운다. 무조건 성장하고 파괴하 고 지배하지 않아도 된다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생태계도 다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기본소득으로 얼마를 지급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지는 정부가 가진 몫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아무리 취지가 좋아도 방법이 분명하지 않으면 도루묵이 되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있다. 꼭 그렇지는 않다. 이명박 정부는 수십조원의 돈을 4대강 사업과 자원외교에 쏟아부었다. 이를 두고 합리적인 정책이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미 엄청난 예산을 낭비했을 뿐 아니라 생태계를 복원하는 데 더 많은 자원과 노력,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기본소득이 풀어야 할 과제는 재정의 숫자가 아니라 시민들의 합의와 이를 실현할 정치적인 힘을 만들 방법을 찾는 데 있다.

하승우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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