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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오멜라스를 떠난 이들은 어디로 갔나?

[좋은 삶과 사회적 경제] 경제성장으로 막대한 부 얻었지만 활용 능력 잃어… 경제 영역 ‘좋은 삶’ 사회적 경제로 만들어나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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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5-18 15:08 수정 : 2016-05-18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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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 대해 생각해볼 때마다 떠올리는 이야기가 있다. 어슐러 르귄의 소설집 <바람의 열두 방향>에 나오는 단편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다. 오멜라스는 왕도 노예도 광고도 주식거래도 원자폭탄도 없이, 모두가 행복한 곳이다. 하지만 이 도시에는 모두가 애써 외면하는 끔찍한 비밀이 있다. 한 아이가 창문도 없는 지하방에서 짐승처럼 살아가고, 이 아이의 불행이야말로 오멜라스의 행복을 담보하는 조건이다.

오멜라스의 사람들은 모두 아이의 존재를 알고 있다. 아이의 비참한 삶을 목격한 사람들은 분노를 느끼지만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아이에게 단 한마디의 친절한 말만 건네더라도, 그들이 누려온 모든 행복과 아름다움과 즐거움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가슴 아파하면서 흘리던 눈물은 현실의 끔찍한 정의를 받아들이고 메말라간다. 하지만 사람들 중에는 오멜라스를 떠나 어둠 속으로 들어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이들도 있다. 작가는 그 사람들이 가는 곳의 모습이 어떨지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들 자신은 가려는 곳을 알고 있을 것이라며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오멜라스의 모습은 한 사람의 완벽한 불행과 나머지 전체의 완벽한 행복이 극단적으로 대비된다는 점에서 우리의 일상과 사뭇 달라 보인다. 하지만 한 아이의 자리에 비정규직, 청년, 외국인 노동자, 영세기업, 자영업자 등의 이름을 넣어본다면 오멜라스와 다르다고 말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지금 우리는 대단히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만 높은 연봉과 평생직장을 약속하는 일자리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그 공백은 고용안정성도 떨어지고 급여 또한 현저하게 낮은 조악한 일자리로 채워진다.

깊어만 가는 행복과 불행 사이 골

좋은 일자리를 운 좋게 확보한 ‘성 안의 사람들’은 자리를 빼앗길까 불안에 떨고,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을 하는데도 턱없이 낮은 월급밖에 받지 못하는 ‘성 밖의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간다. 성(城)의 안과 밖을 가르는 장벽은 갈수록 높아지고, 분열의 골은 더욱 깊어지며, 서로에 대한 신뢰나 연대의 정신도 쇠락한다. 특히 성 밖의 사람들은 과도한 경쟁으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더해 불공정한 현실에 대한 좌절과 분노의 감정으로 고통을 겪는다. 불행하기는 성 안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어렵게 확보한 자리를 빼앗길까 불안에 떨고, 타인과의 계속되는 비교 속에서 더 많은 물질적 부를 얻지만 욕구는 끝내 채워지지 않은 채 갈증만 커진다.

우리 사회는 경제성장에 성공했고 헤아릴 수 없는 부를 얻었다. ‘탐욕은 좋은 것’이라거나 ‘많을수록 좋다’거나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한다’는 믿음 속에서 부를 얻었고 경제성장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과정에서 그렇게 얻은 부를 슬기롭게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잃었다. 부당한 수단이 이익을 위해 정당화되고 개인적 이익의 추구가 다른 가치를 압도하는 사회에서 행복하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약육강식의 불안하고 고단한 삶을 혐오하면서도 변화를 향해 지금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부를 향한 욕망이 대단히 강력할 뿐 아니라 이를 대신할 매력적인 대안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멜라스의 시민들이 정든 도시를 떠난 가장 큰 이유는 타인의 희생 위에 보장된 자신의 안락이 더 없는 행복이 아니라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왔으며, 그들이 가려는 곳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진정한 행복을 찾아 어디로 향했는지 모르지만 우리 사회가 행복한 삶을 위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는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처음 체계적으로 제시되었고 경제학자 케인스에 의해 주목받은 ‘좋은 삶’(good life)의 이상이다. 부를 향한 강력한 욕망이나 타인과 비교 속에서 앞서려는 욕망을 슬기롭게 제어하기 위해서는 더 강력하고 매력적인 삶의 목표가 제시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좋은 삶이다. 좋은 삶이란 우리의 잠재적 역량을 한껏 발휘함으로써 우리를 더 나은 존재로 완성시켜가는 삶이다. 이 점에서 좋은 삶이란 욕망이 충족되는 삶이 아니라 욕망의 올바른 목표로서, 우리에게 자긍심과 삶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높은 차원의 만족을 얻게 해준다. 이 경우 행복은 현실을 바라보고 인생을 살아가는 건강한 태도이자 활동이 되며, 이러한 태도와 활동 속에서 자신의 전반적 삶에 대한 총체적 만족도도 높아진다.

욕구보다 필요, 교환가치보다 사용가치 관심을


전북 전주시 효자동에 있는 완주로컬푸드 직매장에는 매대마다 농산물을 키운 농민의 사진과 이름이 붙어 있다. <한겨레> 자료

오늘날 좋은 삶의 이상이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부분은 경제이다. 좋은 삶의 이상을 경제 속에서 실현하려는 노력의 출발점은 욕구보다 필요에 더 높은 가중치를 부여하고 경제활동에서 화폐로 표현된 교환가치만으로 포착되지 않는 사용가치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키워드는 ‘효율’이 아니라 ‘충분’이다. 이제는 이윤이든, 행복이든, 돈이든 최대한 많이 얻는 게 아니라 적당히 얻고 가치 있게 향유하는 게 목적이 되어야 한다. 이 새로운 세상에서는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시되며, 수단의 정당성이나 삶의 일관성도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덕성·탁월함·중용·숙의와 같은 특성 그리고 양질의 인간관계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인간은 각자의 덕성과 타고난 능력을 친구와 유익하게 나누는 과정에서 잠재적 능력을 한껏 펼칠 수 있으며, 상대방에게 관심과 우정을 베풀고 이를 다시 돌려받을 때 진정한 기쁨을 누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경제 영역에서의 좋은 삶은 사회적 경제를 중심으로 주도될 수 있다. 시장과 기업의 목적을 새롭게 세우고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과 가치가 반영되는 방향으로의 변화를 이끄는 주체가 바로 사회적 경제 사업체들인 것이다. 시장이나 기업은 여러 사람의 삶이 연결되어 있고 집합적 삶의 현장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공공의 사회적 활동 공간이다. 설령 이들이 사적 자치 공간이라 하더라도 일련의 가치판단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순수 무균질의 공간일 수 없음은 분명하다. 시장경제가 확대되고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하면서 시장에 의해 그 가치가 평가되고 자원이 배분되는 부분이 늘어나지만 시장이 가치 평가 및 자원 배분과 관련해 배타적 지위를 요구할 정당성은 없다. 오히려 시장이나 기업들의 영향력과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이들의 활동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가격기구 이외의 다양한 원리를 통해 사회적으로 평가하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시장에 의해 가치판단이 새롭게 이루어지는 영역의 경우 과연 그것이 사회 전체의 눈으로 볼 때 바람직한 것인지도 지속적인 토론과 판단이 요구된다. 오늘날의 시장이 인간의 이기심과 금전적 동기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이를 부추김으로써 덕성이나 이타심, 우정과 신의와 같은 우리 내면의 좋은 특성을 내몰아버리고 있다는 사정을 감안할 때 그 필요성은 대단히 크다. 이러한 시도는 개인의 선택권과 경제적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기보다 시장과 기업 속에서 원자화된 개인을 공화국의 책임 있는 시민으로 격상시키려는 의미심장한 노력이라고 보아야 한다.

시장과 기업, 사회적 평가 작업 필요

그렇다고 해서 시장을 무조건 억압하거나 축소시키는 것 또한 해법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식으로 말하면, 시장에서의 이익 추구 역시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적당한 수준, 곧 중용이 바람직하다. 이와 관련해 협동조합이나 마을기업과 같이 새롭게 등장하는 사회적 경제 조직체들이 시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모든 조직체가 그러한 것처럼 시장 또한 어떤 성격의 주체들이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참여하느냐에 따라 거래 내용이나 성격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시장이 사람들의 여러 측면 중 어느 쪽 성향을 끌어내고 고취시킬지 여부는 참여자들이 경제적 거래의 마당에서 무엇을 내놓고 상대로부터 무엇을 얻고자 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상품의 품질과 가격에 더해 자신의 선택이 상대방의 구체적인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려하면서 거래에 임한다면, 시장은 양질의 관계를 가꾸어가며 더 나은 존재로 함께 성장해가는 호혜의 터전이 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해진 윤리적 소비, 도농상생, 로컬푸드, 공정무역 등은 바로 시장을 인간화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인 셈이다. 이러한 사회적 경제활동들은 시장의 이름으로 돈이 오가는 거래를 하면서도 상대방과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며, 타인의 사연에 귀 기울이고 상품 교환에 더해 마음까지도 나누며, 응답받지 못할 위험을 감수하고 호의를 기꺼이 베푸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례이다. 거래 상대방과 비즈니스 파트너가 아니라 친구 관계를 추구하려는 사회적 경제의 마음가짐이 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게 되면 전통 시장이나 영리기업에도 사람을 ‘목적’으로 존중하고 내재적 동기를 고양시키는 바람직한 기운이 스며들 것이다.

기업에 대한 인식의 전환도 필요하다. 기업을 사적 자치의 공간만으로 치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 기업은 많은 이들에게 경제적 생존의 기반이자 삶의 터전이며,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라는 점에서 사람들의 행복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공간이다. 또한 기업은 여러 사람이 긴밀한 협력을 통해 운명을 함께하면서 공유한 사업 목표를 달성하는 이해당사자들의 자치체이기도 하다. 이처럼 기업을 주주의 소유물이 아니라 이해당사자들의 자치체로 이해하면, 기업의 목적도 달라진다. 이제 기업은 더 이상 수익성의 극대화나 주가의 극대화를 위해 존재하는 장소가 아니라 이해당사자들의 참여와 숙의를 통해 공동 이익을 규정하고 이를 잘 달성하기 위해 존재하는 경제적·정치적 공간이 된다. 집단을 이루고 숙의 과정을 통해 공동 목표를 세우고 협력을 통해 실현해가는 정치적 삶은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핵심이자 ‘좋은 삶’의 정수이다.

그런데 주식회사 형태의 기업이 ‘주주 주권론’의 큰 영향력 아래 이해당사자의 자치체가 아니라 주주가치 극대화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현실에서 이들 기업을 이해당사자의 자치체로 바꾸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주주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덜하고 참여와 숙의의 원리를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 등을 대상으로 자치체로서의 원리를 구현하려는 시도가 더 가시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주주 소유물 아닌 이해당사자들의 자치체

사람들은 협동조합을 세우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정서적 만족과 행복감을 맛볼 뿐 아니라 좋은 시민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을 본격적으로 익히게 된다. 즉, 그들은 복잡한 조직을 출범시키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공동의 목표를 어떻게 명확하게 설정할지, 동료와 후원자를 어떻게 찾아내고 설득할지, 필요한 기술과 자원들을 어떻게 하나로 묶을지,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마련인 갈등을 타협과 양보에 의해 어떻게 조율하고 해결할지를 배운다. 이 과정에서 각자의 주관적 행복감이 고양될 뿐 아니라 사람들은 공동체 속의 책임 있고 유능한 시민으로서 좋은 삶을 영위하게 된다. 사회적 경제를 일구는 새로운 유형의 기업가와 시민들은 우리 사회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앞으로 ‘좋은 삶’이 얼마나 가치 있고 바랄 만한 삶인지 잘 입증해주기 기대해본다.

박종현 경남과학기술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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