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휩쓸기 시작하던 1970년대 말까지 약 40년간 선진국은 지속적으로 빠른 경제성장을 누리면서도 소득불평등 정도는 과거 어느 때보다 낮았다. 토마 피케티(T. Piketty)는 이 기간을 인류 역사상 선진국이 이룬 최고의 “영광스러운 시대”로 묘사했다. 행복이 당연시됨직한 바로 이 시기에 행복에 대한 연구가 쏟아져나왔다는 것이 좀 놀랍고, 그 기초연구의 대부분이 경제학자가 아니라 자연과학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더욱더 놀랍다.
경제학자들이 왜 행복에 관한 연구를 외면했을까? 이들은 소득수준이 높아질수록 국민들이 더 행복해진다고 굳게 믿은 탓에 연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을 면밀히 관찰하는 것이 습관화된 자연과학자들은 이런 고정관념에 의혹을 품었다. 그리고 이 의혹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줄줄이 찾아냈다. 1945~2000년 56년 동안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약 3배 늘었지만 이 기간에 미국 국민 중에서 행복하다고 느낀 사람의 비율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자연과학자들이 행복지수 개발 선도
행복에 관해서도 과학적으로 얘기하자고 주장한 자연과학자들은 좀더 확실하고 일관성 있는 연구를 위해서 행복감을 점수화한 ‘행복지수’를 개발했다. 그러면서 장기에 걸친 선진국 국민의 행복지수 변화 추세가 단연 큰 관심을 끌었다. <그림1>에서 점선은 1945년부터 1990년까지 46년 동안 미국 국민의 1인당 실질 국민소득이 약 2.5배 증가했음을 나타내고, 실선은 그동안 미국 국민의 평균 행복지수가 오히려 하락했음을 나타낸다. 이 결과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미국 국민은 46년 전보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엄청나게 잘살게 되었지만 행복 면에서는 오히려 못해졌다는 얘기가 된다. 소득이 늘었는데 행복해지지 않는 ‘이상한’ 현상이 미국에서만 나타나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같은 얘기가 유럽 선진국에서도 반복된다. 1985년 이래 독일인의 소득은 크게 늘었지만 행복지수는 오히려 낮아졌다. 1958~91년 일본의 1인당 실질국민소득은 자그마치 6배나 뛰었지만, 국민의 행복지수는 높아지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볼 때, 선진국의 경우 소득수준과 행복 사이에는 별 관계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면서 “행복의 역설”이라는 말이 널리 퍼졌다.
1970년대에 이르러 소수 경제학자들이 자연과학자의 행복에 관한 연구결과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선구적 역할을 한 학자가 리처드 이스털린(R. Easterlin)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70년까지 동서양을 망라한 전세계 30개 지역에서 수행된 행복 관련 시계열 자료를 수집·분석하는 방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이 연구에서 그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한 가지 발견했는데, 개인의 경우 소득수준이 올라가면 더 행복했지만 그렇다고 소득수준이 높은 나라의 국민이 그렇지 않은 나라의 국민보다 더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개인의 행복은 소득 순이지만, 국민의 행복은 소득 순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가난한 나라 쿠바 국민의 행복지수가 부자 나라 미국 국민의 행복지수와 비슷했다. 이스털린의 야심적인 연구에 여러 가지 비판이 쏟아졌는데, 그 가운데 특히 선진국의 경우에는 소득수준 향상이 개인의 행복에 별 보탬이 되지 않음을 보이는 연구들이 주목을 받았다. 이와 관련된 다수의 연구를 종합해볼 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일단 생계가 보장된 다음에는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고 리처드 레이어드(R. Layard) 영국 런던 경제대 교수는 결론지었다.
미국의 정치학자 로널드 잉글하트(R. Inglehart)는 기존 여러 연구를 종합한 다음 소득과 행복 사이의 관계를 <그림2>에서 보는 곡선으로 요약했다. 이 그림에서 가로축은 1인당 국민소득, 세로축은 행복지수를 나타내는데 그림의 곡선은 결별점을 중심으로 기울기가 무척 가파른 부분과 아주 완만한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결별점의 왼쪽 부분은 소득 증대가 국민의 행복감을 급속도로 높이는 영역, 즉 경제성장이 매우 큰 효과를 보이는 영역이요, 양(量)이 중시되는 영역이다. ‘가난하면서도 불행한 나라’가 이 영역에 속하는데, 아프리카와 일부 옛 동유럽 나라들이 그 예다.
결별점의 오른쪽 부분은 소득수준이 높아지더라도 국민의 행복에 큰 변화가 없는 영역 즉, 경제성장의 ‘약발’이 없어지는 영역이다. 이 영역은 양보다 질이 중요시되는 영역이요, 이제는 소득을 늘리기보다 국민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바꾸어야만 더 행복해지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잉글하트가 ‘경제성장 효용체감곡선’이라고 부른 이 곡선의 결별점에 상응하는 1인당 국민소득은 2000년 초에 약 2만달러였다. 선진국들은 오래전부터 이 영역에 진입해 있었다. 우리나라는 2010년부터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를 넘었으니 서서히 경제성장의 ‘약발’이 떨어지면서 행복의 역설이 나타날 것으로 전망된다. 아니, 그 징조가 이미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개인소득 2만달러가 기준점 잉글하트의 곡선은 나라별 행복지수의 비교에도 적용될 수 있지만, 개인 차원에서 소득과 행복의 관계를 나타내는 곡선이기도 하다. 대략 개인소득 2만달러를 기준으로 이보다 낮은 수준에서는 소득이 늘어남에 따라 개인의 행복지수가 매우 큰 폭으로 높아지지만, 일단 이 기준점을 넘어서면 소득이 늘어나더라도 개인의 행복이 별로 높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진국 국민들 대부분의 소득은 이 기준점보다 훨씬 높다. 따라서 지속적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선진국 국민의 행복지수가 높아지지 않았다는 설명이 나온다. 행복의 역설은 단순히 관찰된 사실이 아니다. 이것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 다수의 이론이 있고 이것이 이 역설의 설득력을 더해주고 있다. 흔히 “행복=소비/욕망”으로 표현되는 “행복방정식”에 의거한 이론이 그중 하나다. 이 방정식에 따르면 행복은 소비에 비례하고 욕망에 반비례한다. 따라서 소비를 많이 하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이다. 소비를 많이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소비를 통해서 얻은 행복은 주로 “돈으로 산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행복에 이르는 또 하나의 길로 행복방정식은 욕망을 줄이라고 가르친다. 실제로 우리 주위를 보면 대게 욕심이 많은 사람은 늘 불만에 차 있고 불평을 많이 한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욕심 많은 사람들의 한 가지 특징은 남과 자기 자신을 늘 비교하는 습관이다. 그래봐야 자신만 비참해지니 행복해질 수 없다. 그래서 욕심이 많을수록 불행해진다고 말한다. 옛날부터 성인들은 우리에게 욕심을 버리고 소박하게 살아가라고 늘 당부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니라”는 말이 성경에 있고, 절에 가면 큰스님들은 마음을 비우라고 늘 가르친다. 지난 수십 년간 선진국에서는 소득수준이 꾸준히 높아지면서 소비도 크게 늘어났다. 그런데 행복지수가 제자리걸음을 했다면 욕망도 그만큼 커졌다는 얘기다. 왜 선진국 국민의 욕망이 그렇게 불어났을까?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2008년 미국 금융시장 붕괴의 원인으로 “탐욕의 만연”을 꼽았지만, 그보다 약 150년 전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시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람들을 탐욕스럽게 만들고 욕망을 부풀리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자본주의 경제가 잘 돌아가기 위해서는 우선 생산된 상품이 잘 팔려야 한다. 그래야 기업도 신나서 생산을 계속하고 경제성장도 가능해진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라는 속담이 있듯 소비가 늘어나면 욕망도 늘어나기 마련이다. 심리학자들의 실험에 따르면, ‘가진 것’이 늘어나면 이에 비례해서 ‘가지고 싶은 것’도 늘어난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지적하였듯 자본주의의 생산력이 워낙 높기 때문에 욕망의 이런 자연적 증가만으로는 부족하다. 상품이 좀더 잘 팔리도록 소비자의 상품 구매 욕구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부풀려서 지갑을 열게 만드는 인위적 노력이 필요하다. 가장 널리 쓰이는 방법 중 하나가 광고다. 오늘날 광고는 정보를 제공한다기보다 다른 사람에 비해 더 잘살고 더 앞서고 싶은 심보를 자극하고 남과 자신을 자꾸 비교하게 만들어 은근히 욕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초점을 맞춘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쟁이 미화되고 구조화된다. 그러나 이로 인한 경쟁의 격화 역시 남보다 더 잘살고 더 앞서고 싶은 심보를 자극함으로써 욕망을 부풀린다. 이와 같이 고도의 상술과 경쟁의 격화로 욕망이 한없이 부풀게 되면 소비가 늘어나더라도 국민의 행복은 제자리걸음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인간을 매우 탐욕적이게 만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물욕과 소유욕을 끊임없이 조장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늘 부족을 느끼게 만들고 불만스럽게 만든다. 자본주의가 아무리 전대미문의 높은 생산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이래서는 국민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없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숙명이라고 마르크스는 단언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숙명’ 단언
과연 행복이 소비에 비례하는지 의심스럽다. 자연과학자들은 그렇지 않음을 보이는 많은 증거를 제시한다. 돈으로 산 행복은 대체로 지속적이지 못하다. 사람들이 쉽게 물리기 때문이다. 대량생산 상품들이 특히 그렇다. 쉽게 물리는 탓에 행복감이 얕고 짧다. 그래서 멀쩡한 것을 내버려두고 자꾸 새 것을 산다. 그러다보니 어느 집에나 잘 안 쓰는 물건, 잘 안 입는 옷, 잘 신지 않은 신발 등이 귀퉁이에 수북이 쌓여 있다. 오죽하면 이런 것들을 보관해주는 창고업이 성업 중일까. 하지만 그 많은 것들이 결국 환경을 파괴하는 쓰레기가 된다. 오늘날 만연한 환경오염은 우리의 건강을 해치고 우리의 행복을 갉아먹는 중요한 요인이다. 요컨대 자본주의 경제의 소비는 깊고 긴 행복감을 주지 못한 채 우리의 환경을 대규모로 파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우리를 행복하지 못하게 한다.
물론 행복방정식만으로 행복의 역설을 다 설명할 수 없다. 마르크스는 의미심장한 또 다른 통찰을 제시했다. 그는 ‘노동’과 ‘일’을 구분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노동’이란 돈벌이를 목적으로 육체와 정신을 사용하는 행위를 말하고 ‘일’이란 돈과 관계없이 행위자가 스스로 선택한 목적에 따라 원하는 방식으로 육체와 정신을 사용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통상 ‘노동’은 계약에 의해 시장에서 돈 받고 팔린 것이므로 행위자 마음대로 육체와 정신을 사용할 수 없다. 따라서 대체로 노동은 우리에게 직접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다만 ‘돈으로 산 행복’을 가져다주는데, 대체로 이 행복은 깊지도 길지도 못하다. 반면 ‘일’이 많은 경우 성취감과 자부심을 느끼게 해줌으로써 깊고 지속적인 행복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이 확대되면서 점차 노동은 늘어나고 노동강도도 심해진다. 옛날에는 남편 혼자 노동을 해도 먹고살았지만, 요새는 여성도 노동시장에 뛰어들어야 먹고살 수 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일’할 기회와 여유가 점차 줄어드는 반면 노동시간이 늘어나고 노동강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소득수준이 높아져도 행복 수준은 높아지지 않게 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 만연한 이기심과 금전만능주의도 국민의 행복을 저해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보았다. 이기심과 금전만능주의가 ‘온정적 인간관계’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날이 갈수록 인심이 점차 각박해지고 있다는 말을 많이 한다. 행복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에 따르면, 보람 있는 일과 온정적 인간관계가 깊고 긴 행복을 가져다주는 “행복의 샘물”이다. 요컨대, 자본주의 선진국에서 행복의 역설이 나타나는 근본적 이유는 이 행복의 샘물이 말라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론조사기관인 한국갤럽이 2006년에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 국민의 평균 행복지수는 100점 만점에 70점 정도로 그리 좋은 점수는 아니었다. 유엔 세계행복보고서(World Happiness Report)에 따르면, 2010~2012년 3년간 평균 행복지수에서 우리나라는 62.7점으로 조사 대상 149개국 중에서 41등이었는데, 2015년 조사에서는 59.8점으로 조사 대상 158개국 중 47등이었다. OECD의 조사 결과로는 2012년 우리나라 국민의 행복지수가 42점으로 34개 회원국 중에서 꼴찌에 가까운 32등이었다. 이 점수는 OECD 평균인 62.3점에도 한참 못 미치는 것이었다. 자살률과 노동시간이 세계 정상권이고 출생률이 세계 최하위권에 있으니 우리나라가 이렇게 초라한 행복 성적표를 들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근원적 정책 못 내놓는 한국 정부
우리나라는 국내총생산의 규모로는 세계에서 10위 근처에 있는 경제대국이고 1인당 국민소득으로는 세계에서 28위 근처에 있는 비교적 잘사는 나라다. 2008년 세계경제 위기의 격랑에도 유독 우리나라는 지속적 경제성장을 보였다. 말하자면, 우리나라는 경제적인 면에서는 탁월한 우등생인 반면 행복 면에서는 완전히 낙제생인 셈이다. 그냥 낙제생이 아니라 뒷걸음치는 낙제생이다. 우리나라야말로 행복의 역설을 아주 잘 보여주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행복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국민의 행복지수를 끌어올리기 위한 근원적 정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계속 변죽만 울리고 있을 뿐이다.
이정전 서울대 명예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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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별점의 오른쪽 부분은 소득수준이 높아지더라도 국민의 행복에 큰 변화가 없는 영역 즉, 경제성장의 ‘약발’이 없어지는 영역이다. 이 영역은 양보다 질이 중요시되는 영역이요, 이제는 소득을 늘리기보다 국민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바꾸어야만 더 행복해지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잉글하트가 ‘경제성장 효용체감곡선’이라고 부른 이 곡선의 결별점에 상응하는 1인당 국민소득은 2000년 초에 약 2만달러였다. 선진국들은 오래전부터 이 영역에 진입해 있었다. 우리나라는 2010년부터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를 넘었으니 서서히 경제성장의 ‘약발’이 떨어지면서 행복의 역설이 나타날 것으로 전망된다. 아니, 그 징조가 이미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개인소득 2만달러가 기준점 잉글하트의 곡선은 나라별 행복지수의 비교에도 적용될 수 있지만, 개인 차원에서 소득과 행복의 관계를 나타내는 곡선이기도 하다. 대략 개인소득 2만달러를 기준으로 이보다 낮은 수준에서는 소득이 늘어남에 따라 개인의 행복지수가 매우 큰 폭으로 높아지지만, 일단 이 기준점을 넘어서면 소득이 늘어나더라도 개인의 행복이 별로 높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진국 국민들 대부분의 소득은 이 기준점보다 훨씬 높다. 따라서 지속적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선진국 국민의 행복지수가 높아지지 않았다는 설명이 나온다. 행복의 역설은 단순히 관찰된 사실이 아니다. 이것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 다수의 이론이 있고 이것이 이 역설의 설득력을 더해주고 있다. 흔히 “행복=소비/욕망”으로 표현되는 “행복방정식”에 의거한 이론이 그중 하나다. 이 방정식에 따르면 행복은 소비에 비례하고 욕망에 반비례한다. 따라서 소비를 많이 하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이다. 소비를 많이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소비를 통해서 얻은 행복은 주로 “돈으로 산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행복에 이르는 또 하나의 길로 행복방정식은 욕망을 줄이라고 가르친다. 실제로 우리 주위를 보면 대게 욕심이 많은 사람은 늘 불만에 차 있고 불평을 많이 한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욕심 많은 사람들의 한 가지 특징은 남과 자기 자신을 늘 비교하는 습관이다. 그래봐야 자신만 비참해지니 행복해질 수 없다. 그래서 욕심이 많을수록 불행해진다고 말한다. 옛날부터 성인들은 우리에게 욕심을 버리고 소박하게 살아가라고 늘 당부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니라”는 말이 성경에 있고, 절에 가면 큰스님들은 마음을 비우라고 늘 가르친다. 지난 수십 년간 선진국에서는 소득수준이 꾸준히 높아지면서 소비도 크게 늘어났다. 그런데 행복지수가 제자리걸음을 했다면 욕망도 그만큼 커졌다는 얘기다. 왜 선진국 국민의 욕망이 그렇게 불어났을까?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2008년 미국 금융시장 붕괴의 원인으로 “탐욕의 만연”을 꼽았지만, 그보다 약 150년 전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시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람들을 탐욕스럽게 만들고 욕망을 부풀리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자본주의 경제가 잘 돌아가기 위해서는 우선 생산된 상품이 잘 팔려야 한다. 그래야 기업도 신나서 생산을 계속하고 경제성장도 가능해진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라는 속담이 있듯 소비가 늘어나면 욕망도 늘어나기 마련이다. 심리학자들의 실험에 따르면, ‘가진 것’이 늘어나면 이에 비례해서 ‘가지고 싶은 것’도 늘어난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지적하였듯 자본주의의 생산력이 워낙 높기 때문에 욕망의 이런 자연적 증가만으로는 부족하다. 상품이 좀더 잘 팔리도록 소비자의 상품 구매 욕구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부풀려서 지갑을 열게 만드는 인위적 노력이 필요하다. 가장 널리 쓰이는 방법 중 하나가 광고다. 오늘날 광고는 정보를 제공한다기보다 다른 사람에 비해 더 잘살고 더 앞서고 싶은 심보를 자극하고 남과 자신을 자꾸 비교하게 만들어 은근히 욕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초점을 맞춘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쟁이 미화되고 구조화된다. 그러나 이로 인한 경쟁의 격화 역시 남보다 더 잘살고 더 앞서고 싶은 심보를 자극함으로써 욕망을 부풀린다. 이와 같이 고도의 상술과 경쟁의 격화로 욕망이 한없이 부풀게 되면 소비가 늘어나더라도 국민의 행복은 제자리걸음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인간을 매우 탐욕적이게 만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물욕과 소유욕을 끊임없이 조장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늘 부족을 느끼게 만들고 불만스럽게 만든다. 자본주의가 아무리 전대미문의 높은 생산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이래서는 국민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없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숙명이라고 마르크스는 단언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숙명’ 단언
2008년 12월 서울 삼성동 코엑스 앞에 세워진 수출 4천억달러 달성 기념 현판 앞을 시민들이 지나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