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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남에게 인정받아야 행복하다?

[경쟁사회의 두 얼굴] 반세기 만에 기적 이뤘지만 희망 잃은 ‘헬조선’ 획일적 기준 벗어나 우정·가족 등 요소 보듬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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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5-17 17:11 수정 : 2016-05-24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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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서울 잠실 학생체육관에서 열린 성균관대 입시설명회에 학생과 학부모들이 몰려 입추의 여지가 없다. 남보다 좋은 대학에 가려는 이들의 열기가 묻어난다. <한겨레> 김성광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사회의 역동적 변화는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대변혁이었고 우리는 참으로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많은 일을 이루었다. 식민지와 전쟁을 겪었으며 희망이 없는 가난하고 분단된 나라로 시작해 이제까지 성취한 것들은 실로 눈부신 것이다. 폐허에서 일어나 전세계 하이테크 분야에서 가장 잘하는 분야를 여러 개 갖게 되었고 도움을 받는 나라에서 남을 돕는 나라로 우뚝 섰다.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루어냈고 문화적으로도 인정받는 나라가 되었다.

이러한 성취를 설명할 때 우리는 흔히 한국 사회의 역동성을 그 배경으로 든다. ‘다이내믹 코리아’는 이러한 긍정적 측면을 강조할 때 흔히 사용되는 용어다.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 때의 붉은 악마와 빨간색 열풍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전 국민의 열광 속에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품어낸 열기를 잊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다이내믹 코리아의 뒤안에는 긍정적 열기 못지않은 공격적이고 위협적인 에너지가 존재한다. 다이내믹 코리아의 뒷면에 있는 이러한 열기는 흔히 ‘냄비 근성’이라는 비하적 표현으로 묘사되어왔다. 한국의 경험을 배우기 위해 제3세계의 많은 젊은이가 한국을 찾고 있다. 하지만 ‘헬조선’이라 불리는 한국 사회에서 탈출을 꿈꾸는 젊은이가 늘어나는 현상은 ‘기적을 이루었지만 희망을 잃었다’는 현재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다이내믹 코리아’ 뒤의 위협적 에너지

기적을 이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남보다 빠르게 무언가를 이루었다면 남보다 훨씬 뼈를 깎는 아픔을 겪었다는 뜻이다. 한국 사람들의 평균적인 일상을 보면 참 고단하게 살고 있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유치원부터 시작된 경쟁은 전쟁과 같다. 살인적인 공부시간과 노동시간, 숨 가쁘게 우리를 몰아치는 경쟁 속에서 많은 한국인이 신음하고 있다. 아이를 낳지 않고 삶을 스스로 포기하며 최악의 노인빈곤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속살을 보면 우리가 과연 어떤 기적을 이룬 것인지 알 수 없다.

눈에 보이는 분명한 성과를 얻고 생활수준이 빠르게 개선되며 노력한 대가를 어느 정도 손에 쥘 수 있다면 치열한 경쟁사회가 요구하는 고단한 삶을 그래도 견뎌내기 수월하다. 하지만 지금 우리 경제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구조화되고 고착화된 저성장 속에서 시장경쟁을 통해 불평등과 양극화 현상은 더욱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다이내믹 코리아’보다 ‘냄비 근성’이 더욱 위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의 남에 대한 공격성은 강화되고 이념, 지역, 학력, 소득, 직업을 달리하는 사회계층 사이의 적대감은 날로 커져가고 있다. 우리 사회의 삭막한 경쟁 상황은 이러한 현상을 더욱 악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부모는 노후의 안정된 삶을 반납하면서까지 자녀의 사교육 전쟁에 올인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에 가득한 서로에 대한 경계심을 더욱 부추길 뿐이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동료 학생을 친구가 아니라 경쟁자로 상대하는 법을 배우고 삭막한 경쟁 속에서 이겨내는 비법들을 전수받고 있다. 적당한 경쟁은 우리를 긴장하게 하고 끊임없이 훈련시키기 때문에 생산성을 높일 수 있으나 사회 전체적으로 잘 조정되지 않은 고삐 풀린 경쟁은 ‘제 살 깎기’ 가 되어 모든 사람의 목을 겨누는 칼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행복’ 담론이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이러한 사회 환경의 산물이다. 모든 사람이 삭막한 경쟁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보니 우리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이 행복을 가장 중요한 삶의 목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행가에도 있듯 ‘행복’이 무엇인지 정의하기 쉽지 않다. 행복이라는 용어는 다차원적으로 정의될 수 있으나 본질적으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심리학에서는 흔히 행복의 측면들을 설문을 통해 주관적인 ‘안녕감’ (reported subjective well-being)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한다. 물론 이러한 주관적 안녕감이 얼마나 현실을 충실하게 반영하는지는 여전히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측정한 주관적 안녕감을 바로 국가 간, 지역 간, 계층 간 비교에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행복지수를 국가 간 비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관적으로 포착된 행복수준이 무엇에 의해 영향을 받는가, 그리고 어떤 특정한 사회문제가 행복수준에 어떻게,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 분석하는 것을 통해 더 풍부한 사회정책적 함의를 얻을 수 있다. 주관적 안녕감을 다양한 설문방식을 통해 측정한 뒤 행복지수를 결정하는 요인들을 연구하는 학문 분야인 행복경제학을 통해 얻은 통찰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행복’ 담론, 삭막한 사회 환경의 산물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만족하는 경향이 있으며, 경제적 요인 못지않게 비물질적 요인들도 행복을 결정하는 주요 요인이다. 살면서 큰 사건이나 사고가 발생하면 못 견딜 만큼 고통을 당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신의 기본적인 행복수준으로 회귀한다. 사람들은 남들보다 앞서고자 하며 항상 다른 사람들과 비교한다. 결혼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 기간은 길지 않으며, 아이들 때문에 부모의 행복수준이 낮아질 가능성이 크다. 과다한 TV시청은 사람들의 행복감을 감소시키지만 자원봉사나 기부를 통해 남을 돕는 것, 그리고 정치참여는 행복감을 크게 만든다. 사람들은 과거는 지나치게 어둡게 묘사하고, 미래는 지나치게 밝게 예측하는 체계적인 오류를 범하며 결과보다 절차를 통해 행복감을 더 느끼는 경우가 많다.”(브루노 프라이, <행복, 경제학의 혁명>, 유정식 외 옮김, 부키 펴냄, 2015)

행복경제학이 밝혀낸 것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적응(adaptation)과 열망(aspiration)의 개념이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훨씬 쾌락에 적응을 빨리하며 사회적 비교 때문에 곧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소득이나 지위와 같은 외생적 속성은 사랑, 우정, 가족관계 등과 같은 내생적 속성보다 쾌락적 특성을 더 많이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은 이들의 변화에 더 빠르게 적응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체계적인 의사결정의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자신의 미래를 예측할 때 현재의 열망수준을 가지고 생각하기 때문에 설령 자신의 목표가 달성되더라도 실제 미래의 순간에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은 현재 상태보다 크게 높아지지 않는다. 쉽게 적응하고 또다시 더 큰 열망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행복하다면, 혹은 어떤 사회가 전체적으로 높은 행복수준을 구가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를 밝히는 것이 과학적으로 중요하다. 행복과 관련해 더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how)가 아니라 ‘왜’(why)라는 것이다. 행복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크게 사회문화적 배경과 개인적 특성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개인적 특성과 관련해 외향적이고 쾌활하며 긍정적인 사람일수록 삶에 대한 만족도가 높고 인생에서 더 많은 것을 성취한다는 것이 여러 경험적 연구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사회문화적 배경과 관련해서는 일관되게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서 행복수준이 높은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들 국가의 특징을 더 세밀히 분석해서 한국 사회에 주는 시사점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행복은 ‘어떻게’ 아닌 ‘왜’의 질문

한국 사람들이 ‘올챙이적’ 생각을 하지 않고, 배가 고픈 것보다 ‘배가 아픈 것’을 더 힘들어한다는 속설이 사실이라면 한국 사회에서 적응과 열망의 사이클은 다른 사회보다 훨씬 빠를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변화에 대한 적응 속도가 빠르고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의 특징으로 미루어볼 때 소득이나 지위 등 외생적인 속성을 추구하는 경쟁은 ‘쥐들의 경주’(rat race)와 같이 모두에게 허망한 결과를 낳기 십상이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지위추구경쟁이 이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으나 한국 사회의 경우 이러한 적응과 열망의 사이클이 유독 빠를 것이라고 추측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정이 맞다면 평균적인 경제 상황이 좋아진다고 해서 한국 사람들의 행복수준이 올라가기 어렵다. 한국 사회의 욕망의 흐름이나 변화를 정확하게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고용·불평등·저성장 등 외형적인 경제 현상 속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한국 사회에서 남과 비교에 가장 민감한 영역은 학벌과 직업인 것으로 보인다. 좋은 학교나 좋은 직업에 대한 생각이 획일적이고 위계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경쟁이 지나치게 치열해지는 경향이 있다. 학벌과 직업에 대한 위계적, 획일적 의식은 ‘지위재’(positional good)로서 학벌과 직업이 갖는 부정적 외부효과(negative externality)를 강화시킬 것이다. 일반적으로 지위재로서의 부정적 외부효과의 크기는 차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관찰가능성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확산되고 정보통신기기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에게 지위재의 노출 빈도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반면에 민주화와 개인주의가 정착되면서 차이에 대한 수용 정도는 일반적으로 커졌다(예: 성소수자의 커밍아웃).

문제는 좀더 지배적인 위계적 차이에 대한 인식이 젊은 층에서 오히려 더 악화되고 있다는 것이다(예: 대학생들의 학벌 서열 논쟁, 의대 집중). 고용의 질이 문제되는 이유는 임금 차이나 계약 기간 차이에도 있지만 직업의 위계와 관련이 깊다. ‘좋은’ 직업은 남에게 ‘인정받는’ 직업이라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보통의 한국 사람을 옥죄는 불행의 많은 부분은 학벌과 직업의 위계에서 유래한다. 한국 사회의 무한경쟁은 이 부분에서 남보다 앞서려는 욕망에서 나오지만 그 욕망의 끝은 허망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서는 외생적 속성인 소득과 지위에 대한 적응과 열망의 사이클이 더욱 빠르게 나타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렵게 이루어도 더 빨리 적응하고 앞선 남들과의 비교 때문에 더욱더 많이 열망하는” 사회라면 이것만을 추구하는 것은 그리 크게 영양가가 없는 일이다. 그런 성취가 남을 넘어뜨리고 치열하고 삭막한 경쟁에서 이겨야 가능한 것이라면 더더욱 뚜렷한 성과 없이 모든 사람을 고단하게 하는 한국형 경쟁이 앞으로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이다.

“되도록 행복에 대해 잊어라”

행복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보다 과거를 덜 회고한다고 한다. 또 행복을 명시적으로 추구하는 경우 오히려 이를 달성할 능력이 저하된다고 한다. 행복연구에서 밝혀진 것들이 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대부분의 한국인과 한국 사회에 주는 시사점은 이 점에서 상당히 역설적일 수밖에 없다. “되도록 행복에 대해 잊어라. 자신의 삶을 존중하고 앞으로의 삶에 더 높은 가치를 두고 충실하라. 그리고 남들과 함께하고 나누는 삶을 살아라.”

유정식 연세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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