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행복경제학’을 비판적으로 들여다보거나 인간 행복의 관점에서 GDP 신화를 짚고 있는 책들. 자료
1930년 대공황이 막 시작되던 무렵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우리 후손을 위한 경제적 가능성’이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출간했다. 그는 역사적인 자본축적률과 기술 진보 정도를 기초로 100년 뒤 선진국에서의 생활표준은 당시보다 네 배에서 여덟 배 정도 높아져 있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의 계산대로라면 2030년을 20년쯤 앞둔 2010년대의 선진국 사람들은 하루 3시간 정도 일하면서 필요한 재화는 거의 모두 충족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했다. 요컨대 “100년 이내에 경제적인 문제들은 해결되어 있거나, 적어도 해결을 목전에 두고 있을 것”이라는 게 케인스의 예측이었다. 나보다 높은 존재와 비교 행렬 끝없어 기술적 측면에서만 보면 케인스의 예언은 충분히 실현되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성장률은 케인스의 예측을 뛰어넘었다. 1인당 실질소득은 이미 2000년 무렵 1930년대보다 네 배 이상 증가했다. 그렇지만 이들 선진국 중에서 “이제 경제적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는 나라가 과연 있을까? 케인스는 대중의 비합리성에 맞서 싸우기보다 대중과 함께 오류에 빠지는 게 낫다고 본 현실적 인물이었다. 그조차 인간 욕망의 비합리성에 대해 온전히 평가하지는 못했다. 사람은 복잡하고 모순적인 존재다. 성장이나 소득 증가가 아니라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행복경제학자들이 제시하는 대안을 들어보자. 학자들은 로또 당첨의 기쁨조차 조만간 시들하게 만드는 적응의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는 용한 영역을 발견했다. 그것은 ‘사회적 인정’의 영역이다. 가족과의 사랑, 친구들과의 우정, 이웃과의 교류 같은 것 말이다. 사랑과 우정, 친교라는 재화는 써도 써도 마르기는커녕 쓸수록 행복감이 증가한다. 친구는 자주 만날수록 우정이 더 깊어지고, 이웃은 함께할수록 이야깃거리가 더 풍성해진다.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을 비웃는 한계행복감체증의 법칙이라 할 만하다. 시민경제론을 주창한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루이지노 브루니와 스테파노 자마니는 관계적 존재인 인간에게서 행복이란 타자와의 관계와 ‘관계재’에 의존한다고 설파했다. 관계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경제체제를 구상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들이 제시하는 삼각구도의 경제는 효율성을 추구하는 등가교환의 세계로서 시장, 정의와 공평성을 추구하는 재분배의 세계로서 복지·관계성·협력을 추구하는 사회적 경제의 영역으로 이루어진다. 무척 아름다운 그림이다. 행복의 측정 등 따져볼 문제도 많아 성장지상주의의 절대적 정당성에 파문을 일으킨 행복경제학의 역할은 물론 긍정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경제학을 통해서 우리가 정말 행복의 나라로 갈 수 있을지 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우선 방법론부터 생각해보자. 행복경제학은 우리의 경제생활, 체제의 건강함을 가늠하기 위해 행복이라는 잣대를 들이댄다. 여기서 행복한 정도를 측정해야 한다는 과제가 제기된다. 측정의 전제는 일관된 정의지만 행복의 정의는 나라마다, 심지어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따라서 행복경제학은 행복이 무엇이라고 정의하기보다 “당신은 얼마나 행복한가?”라고 묻는 방법을 택한다. 여기서 행복은 개인의 ‘주관적 느낌’에 속한다. 전형적인 행복경제학은 가장 불행한 느낌에 1점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상태에 10점을 표기하도록 하는 자기기입식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구축된다. 이 점수의 평균을 통해 나라별로 행복도가 서열화되고, 장기간에 걸친 행복도 변화가 관찰된다. 이제 어떤 문제가 생기는 걸까? 행복의 질적 차이점 더 큰 논란 남미의 여러 나라가 이런 행복도 조사에서 곧잘 높은 점수를 기록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남미 문화권은 낙천성으로 유명하지만, 그것은 불행을 드러내는 걸 꺼리는 문화적 압력의 존재를 시사하기도 한다. 이 나라들 중 상당수는 행복경제학이 불행의 조건으로 곧잘 제시하는 극심한 양극화와 정치적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그래도 그들은 곧잘 행복하다고 대답한다. 이걸 어떻게 봐야 할까? 영어권에서 ‘나는 행복하다’(I’m happy)라는 문장의 무게는 매우 가볍다. happen, happening 같은 단어와 어원 ‘hap’(우연)을 공유하는 happy라는 단어는 이 문화권에서 그다지 심사숙고를 요구하지 않는다. ‘I’m happy’는 습관적인 문장에 가깝다. 반면 동아시아의 한자 문화권에서 행복이라는 단어는 상대적으로 무겁다. 마치 고대 그리스어의 행복, 즉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가 그런 것처럼 이 단어는 그저 행복한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 이상의 어떤 바람직한 상태와 관련된다. 이 지역의 행복도가 대체로 낮게 나타나는 데 이런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번역 과정은 행복에 대한 문화 간의 이해와 태도 차이를 소멸시키고, 유효한 비교를 난감하게 만든다. 이런 문제점은 행복의 질적 차이와 관련된 문제에 비하면 사소해 보인다. 행복의 종류는 매우 다양할 수 있다. 누군가는 자녀를 위해 희생할 때 가장 행복하지만, 누군가는 컴퓨터 게임을 할 때 제일 행복할 수 있다. 누군가는 타자에 대한 봉사에서 행복을 찾지만, 다른 이는 타자에 대한 승리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심지어 양자는 공존할 수도 있다. 기부 배틀에서 승리를 추구하는 부자라면 말이다. 중요한 건 서로 다른 행복 사이에서 가치 평가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문제는 삶의 목표를 행복으로 내세우는 쾌락주의의 오랜 역사에서는 익숙한 논란거리다. 행복이 주관적 느낌으로 정의되고 그 극대화로서 행복이 삶의 목표가 되는 순간 감당하기 어려운 아이러니가 닥쳐온다. 이 세계에 어떤 행복이 옳고 그른지 가려줄 심판관은 없다. 콜로세움에서 사자 밥이 되어가는 기독교인들을 보며 행복해 하는 로마 시민들의 느낌을 행복이 아니라고 선언할 수 있는 객관적 잣대는 없다. 스카이넷이 지배하는 <매트릭스>의 세계에서 인류를 배신한 대가로 매트릭스로 돌아가게 되는 사이퍼가 제공받는 신경계의 쾌락을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고 판별할 객관적 척도도 없다. 마약에 취한 중독자든, 파시즘의 영광에 도취한 나치당원이든 그들이 행복하다고 주장하면 행복한 것이다. 행복의 최종 심판관은 행복하다고 말하는 당사자일 뿐이다. 행복경제학을 향한 가장 큰 의문은 ‘행복이 과연 우리 삶의 궁극 목적인가’ 하는 것이다. 누구나 행복해지길 바라는 건 사실이다. 그게 삶의 목표가 행복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왕이면 날씨가 좋길 바라지만, 좋은 날씨가 우리 삶의 목표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삶에는 여러 종류의 날씨가 있고, 때로는 비와 천둥, 태풍이 필요하다. 삶은 복잡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행복한 삶보다 바람직한 삶이나 올바른 삶을 추구하고, 또 어떤 사람은 좋은 삶을 추구한다. 그래서 불편함을 무릅쓰는 내부고발자가 나올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더불어 행복해지고 싶은 무임승차자들로 가득 차 있을지 모른다. 또 다른 국정 과제 경계해야 인류가 자기 삶의 목표를 송두리째 행복의 제단에 갖다 바친 건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목표 설정이 개인의 과업이 된 시대, 즉 근대 자유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국가나 공동체가 개인의 삶에 모델을 제시하고 강요하던 시대에 비해 이것이 진보였음은 틀림없다. 하지만 따지고보면 근대 자유주의 국가도 개인에게 삶의 목표를 제시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게 바로 행복이다. 행복은 우리 시대의 헌법이고, 국정교과서다. 알고보니 행복이 국정 과제였던 것이다. 행복경제학, 조금은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조형근 한림대 연구교수·일본학연구소 ※카카오톡에서 <한겨레21>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