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물 없애는 점자만화
등록 : 2000-11-08 00:00 수정 :
시각장애인도 만화책을 읽을 수 있을까. 더욱이 그것이 ‘개그만화’라면, 칸과 칸 사이의 시간적 비약, 혹은 독특한 만화적 약속과 기호를 시각장애인이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하지만 이같은 불가능을 가능한 것으로 바꾸려는 시도가 일본만화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원로만화가 아카쓰카 후지오(64)의 ‘만지는 그림책’ <준비∼땅!>이 그것이다.
이같은 만화책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산이치사의 ‘터치프린팅’이라는 독특한 제책공법 덕택이다. 그림의 외곽선을 따라 책 표면이 돌출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만화의 말풍선 속 글에 해당하는 부분은 당연히 ‘점자’로 처리되어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림이 나타내는 독특한 상황이다. 이것을 이 책은 두 가지 방식으로 해결했다. 하나는 글에 해당하는 점자 외에 상황을 설명하는 또다른 점자를 집어넣는 것이고, 또다른 하나는 이 책을 컬러로 만들어 비장애인도 함께 즐기면서 장애인에게 설명해 주도록 하는 것이다.
이 책을 기획한 소학관 그림책부 편집장 야마다 다케미는 이런 기획을 ‘배리어 프리’(장애물 없애기)라는 말로 설명한다. 장애인이 좀더 편히 다닐 수 있도록 계단을 없애는 것처럼, 비장애인이 시각장애인에게 즐거운 마음으로 설명해줄 수 있도록 책을 기획했다는 것이다. 8명의 캐릭터가 벌이는 달리기 시합을 이끌어 가는 <녹색선>은 이같은 기획의도를 가장 잘 담고 있다. 책의 맨 앞장에 적혀 있는 대로, 비장애인이 ‘눈을 감고’ 녹색 길을 ‘만지며 가다’보면 때로는 맨홀에 빠지기도 하고, 막다른 골목에도 다다르게 된다. 체험을 통해 그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더욱 열심히 책의 내용을 설명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천재 바카본> <오소마쓰군> 등으로 일본에 널리 알려진 원로만화가 아카쓰카는 이 책이 좀더 값싸게 널리 읽혀져, “볼 수 없는 아이들이 더 많이 ‘웃음’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인세를 받지 않기로 했다. 그는 시각장애아 엄마로부터 감사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자기가 어린 시절 무척이나 좋아했던 아카쓰카의 개그만화를 시각장애아인 자기 아이도 느낄 수 있게 해주어서, 책을 펼쳐든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