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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철거민 눈물로 넘치는 파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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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1-0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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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은 놔둔 채 무리한 철거 강행하는 ADB와 필리핀 정부는 ‘인간의 얼굴’을 버렸는가

(사진/필리핀 정부가 주민들 이주지역으로 만든 몬탈반시의 주택전경. 도심으로부터 상당부분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비좁은 평수에 이사비용도 지급되지 않는다)
최근 아시아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은 아시아개발은행(ADB)과 한판 싸움을 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 등과 함께 세계화의 대표적인 첨병으로 꼽히는 ADB와 아시아 NGO, 주민들의 싸움은 지금까지는 NGO와 주민들의 판정승이다.

싸움의 발단은 필리핀의 수도권 중심을 관통하는 파식강을 둘러싼 논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한국의 한강처럼 필리핀 수도를 관통하는 파식강은 각종 오염 하수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어 라모스 정권 시절부터 파식강을 깨끗이 하자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필리핀 정부는 최근 아시아개발은행으로부터 파식강 정화사업을 위해 고액의 이자를 조건으로 1억7600만달러에 이르는 단기 15년, 장기 25년의 차관을 받았다. 올해부터 앞으로 5년간 750만달러를 투자하는 정화사업은 강 주변지역 주택을 철거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환경 정화’를 명목으로 ADB가 파식강 주변의 1만여 가구에 대한 주택철거 계획을 승인한 것이다. 필리핀 정부는 지난 9월26일 277가구 철거를 시작으로 올해 12월 초순까지 강 하천변으로부터 10m 이내의 가옥을 모두 철거해 시내 중심가에서 한참 떨어진 몬탈반시로 이주시킬 계획이다.

그런데 환경오염의 가장 큰 주범인 각종 공장과 말라카냥 대통령궁저는 철거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강을 깨끗이 하는 게 아니라 애꿎은 주민들만 깨끗이 처리하려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보고서에 따르면 파식강 인근 주변에는 2천여개가 넘는 각종 공장이 있으며, 강변을 따라 철거 대상지역에 포함돼 있는 수만 300여개가 넘는다. 그러나 이들은 세금을 많이 낸다는 이유로 철거에서 제외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지역주민을 철거시킨 뒤 도로와 산업시설까지 세울 계획이다. 철거대상지역인 분타 지역 주민대표인 비네르(56)는 “강을 깨끗이 하자는 것에 누가 반대를 하겠는가? 강변으로부터 3m 이내를 철거하는 것은 이미 주민들간에 합의를 한 사항이다. 그러나 철거를 한다 해도 인근지역으로 이주하겠다고 주장하는데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도대체 이런 계획을 승인한 ADB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필리핀의 하천 도시계획법에 따르면 강 하천 주변 환경사업으로 인한 철거는 3m 이내로 한정하고 있다. ADB가 주장하는 10m에 대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더구나 유엔에서 정하는 경제사회문화 인권 의제(No 7. 1997)는 국제기구의 어떠한 사업계획도 대단위 철거를 포함하는 사업안을 승인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면 강의 오염주범은 누구일까?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강변 주민들이 버린 하수로 인한 오염은 5%인 데 비해 각종 산업 쓰레기를 쏟아내는 공장 하폐수가 35%, 마닐라시 전체에서 지류 하천을 통해 버려진 폐수로 인한 오염이 60%이다. ADB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환경정화’라는 미명하에 대단위 철거사업을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필리핀뿐 아니라 인도 캘커타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업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 알려지면서 아시아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은 지난 10월 초순부터 ADB에 항의서한을 보내는 운동을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함께하는 시민행동’에서 ADB에 항의서한 보내기 홈페이지(http://ngo.ww.or.kr)를 개설했으며, 때맞춰 일본의 NGO(www.geocities.co.jp/NatureLand/6880/)에서도 항의서한을 보내는 인터넷 서명운동이 시작되었다.

미국, 일본, 한국 등 12개국에서 파견하는 12명의 이사로 구성된 ADB 이사회는 이런 항의서한이 계속 들어오자 필리핀 정부에 철거일시 중지를 요청했다. 또한 지난 10월24일, 이번 사업실무담당자인 아샤드 샤 국장은 앞으로 필리핀의 시민단체와 주민 대표, 그리고 정부 관계자를 만나서 다각적인 협의를 할 것을 약속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아시아 시민단체에서는 이번 일을 계기로 각종 개발사업에 참여하는 ADB와 같은 국제기구에 대한 예산 및 사업 감시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인도 캘커타의 지역운동단체 대표인 라비알 말릭(46)은 “무분별한 개발사업으로 가난한 이들의 삶의 터전을 파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구제에 나서겠다는 구호를 외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지적한다. 주민들은 잠시 멈춘 정화사업에 한시름을 놓으면서도 아직 불안에 떨고 있다. 철거작업이 언제 또다시 세계화 바람을 타고 재개될지 모르는 형편에서….

마닐라=나효우 통신원nahyowoo@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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