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티모르 독립 지도자 사나나 구스마오의 자전적 수기- 포르투갈 식민 시절의 마지막 날들
사나나 구스마오(Xanana Gusmao)
동티모르독립투쟁의 전설적인 게릴라 지도자로 불리는 사나나 구스마오는 1946년 6월21일 포루투갈 식민치하의 동티모르에서 태어났다. 75년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FRETILIN)에 참가한 그는 78년 당시 의장이었던 니콜라우 로바토의 사망에 따라 무장투쟁전선을 재조직한 뒤, 인도네시아 침공군에 맞서 게릴라투쟁에 돌입했다. 91년 이른바 산타크루즈 대학살로 기록된 동티모르의 비극 1주기를 추도하기 위해 딜리로 잠입했던 구스마오는 92년 인도네시아 정부군에 체포돼 종신형을 선고받고 99년 9월 출옥 때까지 자카르타에서 감옥살이를 했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에도 동티모르독립전선의 게릴라조직들은 그를 최고사령관으로 받들며 ‘상징명령’을 수행했고, 98년 새롭게 재편한 최대의 독립투쟁조직인 티모르항쟁민족회의(CNRT)는 구스마오를 의장에 임명했다. 그는 99년 9월 유엔 감시 아래 실시된 동티모르국민투표에서 동티모르의 독립이 결정된 뒤 수도 딜리로 돌아가 현재 티모르항쟁민족회의의 의장으로 새 정부 구성을 준비하고 있으며 국제사회로부터도 유일한 초대 동티모르 대통령 후보자로 인정받고 있다.
벼가 누렇게 익어가던 계절인 1946년 6월21일 동티모르 북부 해안도시 마나투토에서 나는 태어났다. 두어살 무렵 학교 선생님이었던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라크루타로 이사 갔고, 여동생 루시아는 안개에 싸인 험난한 비빌레오에이타나산 기슭에서 태어났다. 루시아가 태어난 얼마 뒤 우리는 테레사 기독학교로 전근을 가게 된 아버지를 따라 다시 오수로 옮겨갔다.
신학교를 도망치다
모래펄이 드러난 강둑길, 쓸쓸하고 황량한 목가적인 풍경으로 애수를 끓게 하던 새들의 울음소리, 말등에 올라타고 아버지와 함께 가던 오수까지의 여정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성으로 둘러싸인 온화한 작은 마을 오수의 풍경은 포르투갈의 첫 번째 왕 알폰소 헨리크 왕의 설화에 나옴직한 귀마레스성을 연상케 했다. 이 귀마레스는 백인들이 우리 땅을 식민통치하는 데 요람 역할을 했다. 그 시절 우리가 알고 있던 유일한 백인이라고는 설교 때마다 성을 내고 학교에서는 폭력적이며 우리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어떤 나라의 행정관 노릇까지 하던 가톨릭 신부들뿐이었다.
고상한 꿈을 키우던 어린 시절, 당시 내 꿈은 아버지처럼 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교사는 전통적으로 마을 지도자 역할을 했기 때문에 모든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중국 상인들과도 신용이 통했던 훌륭한 직업이었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오수에는 두서너달에 한번씩 낡은 시보레 자동차가 지나갔던 기억이 난다. 차소리에 놀란 소들과 짖어대는 개들, 푸덕거리며 달아나는 암탉들, 그리고 아이들은 자동차 배기가스가 내뿜는 문명의 냄새를 맡아보려고 길거리로 뛰어나오곤 했다. 밤 놀이를 다니다 느지막이 집으로 돌아오면 아버지의 회초리가 기다렸고, 어머니는 우리를 달래려고 도둑 이야기나 나쁜 아이들을 잡아먹는 괴물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나는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시절에 모범생이 아니었다. 내가 다녔던 예수회신학교에서는 밤마다 묵주기도를 하고 규칙적으로 9일기도를 했는데, 늘 졸았던 기억만 난다. 성적도 65점을 넘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아버지로부터 책 읽는 즐거움을 배웠고 예수회신학교 시절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아이작 신부로부터 포르투갈어를 열심히 배웠다. 당시 또다른 즐거움은 나를 신부로 만들려고 애썼던 훌로아가 신부에게 빌린 신문을 매일 읽으면서 시간을 때우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신학교 3학년을 마친 뒤 엄격한 학교 분위기가 싫어 결국 도망쳐버렸다.
갇혀 있다고 여겼던 신학교 바깥 세상이 더 어려운 삶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나는 학교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그저 군식구에 지나지 않았다. 다행히 어머니께서 푼푼이 모아두었던 돈으로 이듬해 딜리의 야간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지만 형편이 어려워 아침나절에는 보건소에서 타자수 노릇을 했다. 별로 수입도 없는 일이긴 했지만 아버지의 희생과 어머니의 봉사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늙은 어부에게 웃는 법을 배우다
사실은 좀더 괜찮은 관공서 일거리를 찾아보았지만, 이건 혜택받은 환경에서 태어나 정확한 포루투갈어를 구사하는 공무원이나 명사들의 자녀들에게만 주어진 장이란 걸 곧 깨닫게 되었다. 대신 우리 같은 사람들은 백인들이 던지는 모욕적인 말을 삼키면서 그들에게 굽실거려야 하는 긴 시간이 주어졌다. 결국 나는 부두에서 늙은 어부와 함께 고기잡이 일을 시작했다. 그렇더라도 그 시절 내 삶이 모두 우울한 것만은 아니었다. 고생도 했지만 즐겁고 행복한 일들도 많았다. 운동에 빠졌던 나는 운동을 통해 행사와 사교모임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티모르인들의 자생적인 스포츠 클럽인 우니아오의 회원자격만 있으면 이웃의 결혼잔치나 생일 춤잔치에 언제라도 참여할 수 있었고, 그게 큰 즐거움이었다. 그뒤 나는 적당한 일자리를 찾았고 함께 일했던 늙은 어부와 작별을 했지만 그로부터 나는 웃는 법을 배웠다. 큰 파도를 넘어 먼 바다로 나가 애써 잡은 정어리를 모두 잃어버렸을 때도 그는 웃을 줄 알았다. 얼마 뒤 나는 식민지 국민의 의무였던 포르투갈 군대에 입대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결국 어렵게 찾은 일자리를 또 그만두고 말았다.
반항과 불복종의 마음으로 군에 입대했고 1971년 초 제대할 때까지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군이라는 조직생활을 통해 원치 않은 일도 해내는 법을 배운 것으로 자위했다. 당시 티모르인들에게 하사관 일자리가 늘어나면서 수입도 괜찮아 군에서 말뚝을 박는 것이 상당히 매력적인 유혹거리였다. 하사관이나 공무원이 된다는 것은 티모르인사회에서 성장하고 있던 엘리트 계급으로 들어가는 입구였고, 내남없이 엘리트사회로 편입되기 위해 관료체계의 사다리를 기어 오르고 있던 시절이었다.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시절이었다.
그 무렵 우리는 관공서가 그저 서류나 뒤적이는 비생산적이고 틀에 박힌 일을 하는 곳이라 여겼고, 그런 관공서를 지배하는 백인들이 아주 깨끗이 사라져 버리기만을 바랐다. 노력해도 끊을 수 없는 식민의 굴레에 우리는 절망해 있었고 상황의 인식과는 달리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증에 시달리던 때였다. 이런 가운데 당시 한 늙은 티모르인이 주지사에게 했던 이 말은 우리 사이에 유행어가 되었다. “우리 티모르인은 물이 새지만 결코 가라앉지 않는 배와 같은 존재 아니던가요?”
역설적이지만 1974년 4월25일 포르투갈에서 좌익 쿠데타가 파시스트 정부를 무너뜨린 이른바 카네이션혁명이 일어났을 때 나는 매우 놀랐다. 이것이 우리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어떻게? 티모르인 엘리트는 식민통치자들의 충복에 불과하지 않았던가? 우리의 정서 속에는 티모르인 엘리트들이 티모르를 통치하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때 나는 많은 친구와 동료들이 열광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로부터 자유를 지킬 것인가
나는 티모르에서 새로 창당된 정당 가운데 하나인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FRETILIN)에 동조하고 있었지만 국가를 운영할 만한 능력이 없는 우리 손에 맡겨질 티모르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다. 결국 정세는 불쾌하게 진행되었다. 정부는 식민주의자들의 국외 탈출로 쇠약해져 갔고, 혁명가와 인텔리가 뒤섞인 군대 내부는 불만과 불안정이 만연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나는 사람들이 폭력으로 치닫는 것을 보았고 결국 정치란 사람들을 동원하고 행동으로 끌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에 눈뜨기 시작했다.
곧이어, 나는 이 상황에 적극 참여할 것인지 아니면 한발짝 물러서 관망할 것인지를 놓고 깊이 고민했다. 말하자면 나는 의식의 혁명을 경험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다가 독립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울부짖는 티모르의 선배들을 보면서 나는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에 가입하기로 결심했다. 모든 사람들이 날카로워져 있던 무렵이었고 반대쪽의 UDT 당원들은 우리를 공산주의자들이라 몰아붙이며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 본부 앞에서 시위를 벌이곤 했다.
마침내 1974년 8월10일 UDT가 우리를 향해 공격을 시작했고 그 전투는 3주간 계속됐다. 마치 닭싸움 같았던 이 불행한 사건으로 우리의 혁명은 모든 티모르인의 살을 파고든 가시가 되고 말았다. 이런 정치투쟁으로 처음에 시민들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지만 갈등이 계속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시민들은 조금씩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기 시작했고 서서히 상처를 잊어갔다. 그뒤 UDT가 국경쪽으로 도망쳐버리자 이번에는 인도네시아 군대가 새로운 공격을 감행해 왔다. 우리는 조국 수호를 위해 군대동원령을 내렸고 결국 자유를 지켜냈다.
하지만 누구로부터의 자유인가에 대해서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다. 포르투갈로부터인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로부터인가? 식민지주의로부터인가? 아니면 자유 그 자체로부터인가?
이제 진짜 전쟁이 시작되었고 아이들까지 무기를 들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미래에 대한 우려가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었다.<계속>
사나나 구스마오(Xanana Gusmao)


(사진/운동에 빠졌던 구스마오는 운동을 통해 행사와 사교모임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스무살이던 1966년 농구부 동료들과 함께. 뒷줄 8번을 단 사람이 구스마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