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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프랑스] 빌팽! 외교는 맨손으로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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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2-1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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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외무부 직원들의 전례없는 파업…세계화 등으로 국외 예산 중 외무부 비율 점점 줄어

“이라크 위기에 직면해 회원들 각자가 그들의 책임을 통감해야 하며, 이렇듯 위기에 처한 세계를 모두가 함께 파악하고, 나아가 우리의 화합 조건을 재설정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 모두를 위한 일입니다. 그리고 유엔의 기본 임무를 회복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사진/ 유엔에서 연설하고 있는 도미니크 드빌팽 프랑스 외무장관. 프랑스 외무부는 해외 직원의 50%가 동참한 파업에 나섰다.(GAMMA)

미국 다음으로 방대한 외무부

지난 3월7일 유엔이사회에서 ‘다원주의’를 설득력 있게 외쳐 박수 갈채를 받았던 도미니크 드 빌팽 프랑스 외무부장의 연설 한 토막이다. 그런데 그 다원주의를 실천해야 할 프랑스 외무부 직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12월1일 더 이상 일을 못하겠다며 파업에 나선 것이다. 파업의 나라인 프랑스에서도 전례가 없는 일이다. 도대체 외무부가 파업을 하면 어떤 모습일까. 직원의 절반 이상이 세계 도처에 나가 있기 때문에 지구촌 전체에 걸쳐 파업이 이뤄진다. 지리적 차원에서 보면 가장 큰 규모의 파업이 되는 셈이다. 더 쉽게 설명하면 그날 파업에 참가한 직원들이 있는 나라에서는 프랑스 입국 비자는 받을 수 없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세계 도처에서 프랑스의 위상을 대변하는 일을 하는 외무부 직원들에게 파업할 권리는 있는 걸까. 이와 관련해서는 구체적인 금지 규정이 없다. 따라서 이들도 파업할 수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출근은 하고 업무를 진행하지 않는 식이다. 비록 상징적인 파업이긴 했지만 마다가스카르, 아테네, 취리히, 멕시코, 쿠바 등지의 대사관 및 영사관에서는 100% 참가율을 보이는 대단합을 과시했다. 해외 직원의 50%, 파리 직원의 3분의 1이 참가한 이번 파업에서 나온 슬로건은 이렇다. “빌팽! 돈 없이는 멀리 가지 못한다!”

대외적 명분을 갖는 외교도 좋지만, 물적 자원은 물론 인적 자원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이다. 물론 이는 외무부에 배당된 국가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12월1일은 상원의회에서 외무부에 할당되는 국가예산액을 발표하는 날이기도 했다. 프랑스 외무부는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에 154개의 대사관, 98개의 크고 작은 영사관, 26개의 연구기관, 148개의 교육 및 문화 기관, 223개의 알리앙스 프랑세즈를 두고 있다. 이들 공관에서 근무하는 국내 3900여명과 국외 5300여명의 외무부 직원을 모두 합치면 9200여명에 이른다. 미국 다음으로 큰 규모다. 하지만 매년 줄어들고 있는 국가 예산으로 이들 방대한 조직을 운영하는 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다른 부서의 세계 진출로 타격받아

궁여지책으로 주재원을 줄이기도 하고, 각종 계획들을 중단해야 하는 진통을 치러야 했다. 더구나 올해는 예산 일부가 갑자기 취소되는 일도 벌어졌다. 2003년 현재 국외 업무의 66%를 국외 예산의 46%로 담당하고 있는 외무부는 최근 10년 동안 업무 내용이 10% 줄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왜 이런 현상이 불거지고 있는 걸까. 가장 주요한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세계화의 물결’이다. 급속한 세계화에 발맞춰 자의든 타의든 다른 부서들이 세계로 진출해야 했고, 이와 함께 새로 생겨난 프로그램이나 업무들 때문에 과거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던 국외 예산을 다른 부서들과 나눠써야 하는 운명에 처한 것이다. 특히 재정부와 경제부는 외무부 다음으로 국외 예산을 가장 많이 지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뒤를 교육부의 해외연수생 교환프로그램이 쫓고 있다.

결국 국가예산액 전체가 대폭 늘어나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다른 부서의 해외 진출이 활발해질수록 외무부에 할당되는 예산액은 점점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시라크 대통령은 국제정치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강한 프랑스의 이미지를 심는 데 주력하는 그다. 외무부 파업이 발생한 12월 첫째주에도 튀니지를 비롯해 해외방문 일정이 빡빡하게 잡혀 있었다. 시라크의 야망이 외무부를 통해서만 수행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외무부의 예산 축소가 앞으로 그의 행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파리= 이선주 전문위원 seoulparis@tiscali.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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