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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금지된 드라이버, 불법체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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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2-0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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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불법 체류자들에게 운전면허 허용하는 ‘SB60 법안’은 왜 폐지됐나

“주민투표에 부치겠다.”

요즘 미국 캘리포니아 정치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말이다. 지난 10월7일 그레이 데이비스 전 주지사가 주민투표로 재선 11개월 만에 주지사에서 강제 퇴출당한 이후 ‘주민투표 회부’는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정치인을 압박하는 초강력 무기가 되고 있다. 주민 그룹이나 각종 이익집단, 공공기관, 심지어 주민투표 덕분에 신임 주지사가 된 영화배우 출신의 아널드 슈워제네거에 이르기까지 이 무기를 사용하는 부류도 다양하다.

사진/ 집회를 끝낸 노동자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행진에 나섰다. 이들은 ‘이민자 탄압 중지’를 외치며 30여분 동안 LA의 노스할리우드 일대에서 시위를 벌였다.

슈워제네거, 당선되자마자 폐지 밀어


로스앤젤레스(이하 LA) 시의회를 통과했다 3개월 만에 사문서가 된 ‘랩댄스 금지안’과 12월 초 사실상 폐기될 것으로 보이는 ‘불법 체류자에게 운전면허증을 허용하는 법’(SB60) 등 두 법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최근의 논란을 보면, ‘주민투표 회부‘의 막강한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

LA 시의회는 지난 9월 만장일치로 랩댄스(반나체의 무희가 손님 무릎에 앉아 댄스를 하는 유흥 서비스)가 매춘 등 각종 불법 행위를 부추긴다는 지역 주민들의 항의에 따라 이를 금지했다. 그러나 스트립 클럽들이 40만달러를 모금해 이 안을 2005년 3월 주민투표에 부치겠다고 나서는 등 강력 대응하자, 결국 11월21일 만장일치로 금지안을 철회하고 말았다. “투표에서 진다면 LA 지역의 40여개 성인클럽을 단속하기 위해 시행 중인 기존 법안들 역시 도전받게 될 것이다. 클럽들은 투표 캠페인에 수백만달러를 쏟아부을 여력이 있지만 우리는 그럴 돈이 없다”며 LA 시의원들이 스트립 클럽 주인들의 협박에 무릎을 꿇고 만 것이다.

지난 9월 역시 만장일치로 주 의회를 통과하며 220만명으로 추산되는 캘리포니아 불법 체류자들에게 합법운전의 희망을 안겨줬던 ‘SB60 법안’도 정치적 이해관계는 훨씬 더 복잡하지만 주민투표라는 강펀치를 맞고 3개월 만에 쓰러졌다는 점에선 마찬가지다. SB60은 소셜 시큐리티 번호가 없어도 연방 국세청에서 발급하는 개인 납세자번호와 신원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만 제출하면 체류 신분에 상관없이 운전면허증을 발급해주는 법안이다. 슈워제네거 주지사는 11월17일 취임식을 끝내자마자 SB60 철폐를 논의하기 위한 특별의회를 소집해 의회가 SB60 폐지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내년 3월 이를 주민투표에 부치겠다고 밝혔다. 민주당이 다수를 차지하는 주 의회에 주민투표라는 칼날을 들이민 것이다. 결국 SB60 폐지안은 24일 주 상원을 전격 통과한 데 이어 바로 다음날 하원 교통 소위원회에서도 반대 없이 통과됐다. 이제 법의 폐지를 위한 마지막 절차로, 12월 초 열리는 하원 전체회의 표결만 남겨두고 있다. 표결에서 3분의 2 이상이 찬성할 경우 SB60는 주지사의 서명을 거쳐 곧바로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소셜 시큐리티 번호가 없는 불법 체류자들은 그동안 운전면허증은 물론 차량 보험도 없이 불법 운전을 해왔다. SB60은 지난 3년 연이어 주 의회를 통과했으나 데이비스 전 주지사의 막판 거부권 행사로 두 차례나 부결됐다. 하지만 올해는 데이비스 전 주지사가 목전에 닥친 주민 소환투표를 앞두고 라티노(히스패닉) 유권자들의 표를 의식해 서명했던 것이다.

사진/ 민주당의 길 세디요 상원의원이 11월25일 새크라멘토 주의회에서 열린 상원 교통위원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불법체류자 운전면허 허용법안의 제안자인 세대요 의원은 이 법안을 폐기하자는 안건에 찬성할 것을 촉구해 충격을 던졌다.
그러나 내년 1월1일부터 시행되는 이 법안을 둘러싸고 퍼시픽 법률재단, 가주공화당회의(CRA) 등 보수단체들은 “이 법안이 테러리스트들에게 악용될 수 있으며, 미국에 불벌 체류하는 사람들에게 합법적으로 운전할 권리를 부여할 수 없다”며 법의 무효화를 위한 위헌 소송을 제기한 데 이어, 주민투표 상정을 위한 서명운동을 시작하는 등 거센 반대 움직임을 보여왔다. 반발 여론을 읽고 자신감을 얻은 슈워제네거 신임 주지사는 선거 공약에 아예 이 법안의 폐지를 내걸었고 당선되자마자 가장 먼저 폐지안을 의회에 제출한 것이다.

라티노 커뮤니티가 움직이지 않는 이유

지난 9월 SB60에 찬성표를 던졌던 민주당 의원들이 이 법의 폐기에 동조한 것도 폐지안이 내년 3월 주민투표에 부쳐져 논란이 이어질 경우 민주당이 입을 정치적 타격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캘리포니아 주민의 3분의 2가 불법 체류자 운전면허법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애초 이 법안을 제안했던 길 세디요 주 상원의원조차 이날 폐지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세디요 의원쪽은 슈워제네거 주지사와의 면담에서 범법자나 테러리스트 등 국가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외국인의 면허증 취득을 방지하기 위한 신원조회와 신분도용 방지 조항을 포함하는 수정안이 제시되면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을 확인한 뒤 폐지안에 동조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세디요 의원은 내년 1월 새로운 법안을 상정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반대 여론을 등에 업은 공화당 의원들이 불법 체류자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운전면허 발급을 허용하는 것 자체에 반대한다는 완고한 입장을 취하고 있어 의회에서 협상을 통한 법안 재상정과 순조로운 의회 통과가 실제로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민주당의 ‘변심’에는 사실 말 못할 속사정이 있다. 전통적으로 캘리포니아주에서 텃밭을 일궈온 민주당은 내년 대선을 앞두고 지지그룹인 라티노 커뮤니티를 위해 이 법안을 만들었다. 불법 체류자의 대부분은 라티노들이다. 백인 유권자들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법안을 밀어붙인 이유다.

그러나 반발은 예상외로 컸다. 공화당 지지층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당의 지지 기반인 중산층 유권자들의 비판도 쏟아졌다. 백인뿐 아니라 다른 인종 커뮤니티에서도 반발은 거셌다. 이들은 폭증하는 불법 체류자들로 자신에게 돌아올 각종 복지혜택이 줄어드는 걸 늘 못마땅하게 여겨왔다. 즉, 자신이 내는 세금이 저소득 불법 체류자들을 위해 상당 부분 쓰이는 마당에 ‘합법적’인 신분까지 주면서 또다시 엄청난 예산을 소모해야 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던 것. 그 결과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SB60를 밀어붙이다는 건 민주당으로선 ‘정치적 자살’이나 다름없고, 민주당 의원들은 어쩔 수 없이 명분 대신 실리를 선택한 것이다.

비단 정치인들뿐 아니라 이 법안에는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가장 흥미로운 건 경찰의 입장. 불법 체류자들의 무면허 운전 단속 업무를 맡고 있는 경찰은 법안의 상정 때부터 강력한 지지를 표명해왔다. 물론 명분은 ‘불법 운전이 사라져 거리가 좀더 안전해질 것’이라는 것이었지만 속셈은 달랐다. 보통 캘리포니아에서 무면허 운전으로 적발되면 차량 압수와 함께 1천달러의 벌금을 부과받는다. 이 돈은 경찰 예산으로 귀속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불법 체류자들은 벌금을 내는 경우가 거의 없다. 낼 돈이 없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또 사회적 신분이 없기 때문에 추징하기도 어렵다. 결국 경찰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들의 불법 사실을 기록하고 이민국에 통보해주는 게 전부다. 한마디로 업무만 많고 실속은 전혀 없는 ‘허드렛일’인 셈이다. 실제로 로스앤젤레스 경찰국(LAPD)만 해도 무면허 차량의 단속과 벌금 추징에 배치된 인력만 전체의 20%가 넘는다.

한인 커뮤니티도 법안 지지 안해

소수계 커뮤니티의 입장도 천차만별이다. 일단 라티노연합체 등 대부분의 소수계 단체들은 표면상으로는 이 법안을 강력하게 지지해왔다. 특히 가장 많은 수혜대상을 지닌 라티노 단체들은 쌍수를 들어 이 법안을 환영했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다르다. 라티노는 캘리포니아 전체 인구의 과반수를 넘지만, 실제 사회적으로 안정된 기반을 형성하는 중산층 이상은 그 중 20%도 안 된다. 이들 중산층은 인종적으로 라티노 계열이지만 전형적인 백인 미국인의 사고를 지녔다. 부와 사회적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에게 가난한 불법 체류자들은 인종이 같다는 것 외에는 전혀 동질성이 없는 것이다. 가뜩이나 사회적 골칫덩이로 떠오른 불법 체류자들에게 합법적인 신분을 부여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라티노 단체들이 겉으로는 입을 모아 법안 폐지에 반대하면서도 실제로는 별다른 행동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도 이들의 강력한 입김 때문임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지만 한인 커뮤니티도 속내는 크게 다르지 않다. 현재 이 법안의 혜택을 받을 한인은 대략 2만5천∼3만명으로 추산된다. 문제는 이들 중 선의의 피해자가 그다지 많지 않다는 점이다. 한인 불법 체류자의 상당수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무작정 건너온 사람이나 조기유학 등으로 늘어난 임시 방문자 등이다. 이들 불법 체류자들은 한인 이민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때로는 각종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SB60 법안을 지지하는 움직임이 있지만 한인 커뮤니티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차를 몰고 길에 나설 때마다 무섭다. 하지만 일을 하려면 어쩔 수 없다.” 오랜 숙원이던 SB60 법안의 좌초를 지켜보는 불법 체류자들은 좌절과 분노, 체념이 뒤섞인 채 앞으로도 불안감 속에 운전대를 잡고 길을 나설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로스앤젤레스= 글 · 사진 신복례/ 자유기고가 boreshi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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