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주년 맞은 11 · 17 그리스 학생봉기의 주역 파파크리스토스를 만나다
“에도 폴리테크니오(여기는 산업대학), 에도 폴리테크니오….”
감격과 흥분을 동반한 절박한 음성이 라디오 전파를 타고 그리스 전역에 나흘 동안 울려퍼졌다. 그 목소리는 자유의 소리였고, 한줄기 빛을 동반한 구원의 소리였다. 이 소리를 따라 그동안 공포에 짓눌려 한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던 민중들이 속속 모여들었고 데살로니카와 파트라 등 대도시에서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본격화됐다. 그 목소리는 군부독재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마지막 날의 나팔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라디오를 통해 울려퍼지던 날부터 그리스의 군부정권을 지원했던 미국과 군부정권의 핵심세력들은 도주할 궁리만 했다.
총선 전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군부독재정권(훈타)의 탱크가 아테네 산업대학의 철교문을 부수고 들어온 1973년 11월17일은 그리스의 현대사를 뒤바꾼 날이었다. 7년간 그리스 국민들의 숨통을 조였던 군부독재의 압제를 깨뜨린 날이었다. 비록 그곳에서 민주를 열망하던 학생과 민중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몇달 지나지 않아 군부독재정권은 무너졌다. 지금 그리스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바로 1973년 11월17일 아테네 산업대학의 학생봉기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미국과 영국의 외교관들을 비롯해 그리스 정치가와 기업가들을 28년 동안 암살하면서 악명을 날린 ‘11월17일단’도 이날을 기념해 조직됐다. 지금도 그리스 국민들은 11월17일이 되면 당시 학생봉기의 선봉장으로, 나흘간 그리스 전역을 움직인 라디오 방송의 주역이었던 디미트리스 파파크리스토스(54)를 잊지 않고 있다.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탱크가 들어오는 공포의 현장에서 탱크를 향해 “우리는 형제들이다. 발포하지 말라!”는 외침과 더불어 “자녀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어떻게 잠들 수 있습니까? 모두 거리로 나오십시오!”라고 절규한 일은 지금도 그리스 국민 모두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1967년의 군부 쿠데타는 미국의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대령들이 일으켰다. 총선 투표일 이틀 전, 총선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반대하던 좌파의 승리가 거의 확실해지자 이를 무력으로 뒤집어놓기 위한 시도였다. 당시 아테네대학 경제학부 학생이던 파파크리스토스는 파리의 학생운동에 큰 영향을 받으면서 많은 비밀서클을 조직했다. 대학가는 군부에서 심어놓은 수많은 프락치 교수와 프락치 학생들에게 통제됐다. 당시의 군부정권은 기본인권을 완전히 무시한 가히 살인적인 통치를 했다. 쿠데타를 일으킴과 동시에 모든 민중조직들을 해산하고 6천여명의 반군부 인사들을 일시에 체포 고문한 뒤 작은 섬에 유배 보냈다. 공포에 눌려 숨조차 쉴 수 없던 학생들은 1970년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서서히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학내에서는 각종 서클이 조직됐고 영화관, 도서관, 카페, 작은 책방 등이 학생들의 독서서클로 이용됐다. 이들 광범위한 학생 비밀조직을 기반으로 먼저 학내 문제부터 터뜨려 나갔다. 학내에서 파파크리스토스가 가장 먼저 조직한 투쟁은 프락치 교수와 학생 퇴출이었다. 더불어 학생회 구성을 위한 직접선거를 요구했다. 그가 직접 관여했던 그룹은 12명의 학생들로 이뤄진 비밀조직으로 그가 대표를 맡았다.
1972년 11월, 그와 다른 한명의 학생은 군부독재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자신들의 이름과 서명을 담은 선전물을 학생과 일반시민들에게 배포한 뒤 경찰에 검거됐다. 당시 그의 체포 소식은 신문의 머리기사로 나올 만큼 사회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경찰서에서는 날마다 고문 전문가들의 가혹한 고문이 행해졌다. 폭행과 더불어 머리를 뽑는 고문, 발바닥을 곤봉으로 치는 고문이 매일 일어났고 죽음 협박도 이어졌다. 하지만 고문은 오히려 그를 강인하게 변화시켰다. 그는 “당시 경찰의 고문이 심해질수록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심은 더 강해졌다”고 기억한다. 경찰서에서 그는 강제징집 절차를 거쳐 그리스 북부의 외딴 곳에 자리잡은 군부대로 보내졌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더 힘들었다. 군복무가 아닌 사실상 군대감옥에 수감됐고 두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구타가 자행됐다. 더욱 처량했던 것은 전등조차 없는 어두운 감옥 생활이었다. 그럼에도 밤이면 길거리에서 비춰오는 희미한 가로등을 벗삼아 매일 일기를 썼다.
잔혹한 고문과 군사감옥 생활
군사감옥에서 절망과 고독의 시간과 싸우는 동안 바깥에서는 그를 기억하는 학생들의 투쟁이 가열됐다. 1973년 3월에는 아테네 법대가 학생들의 동맹휴학으로 학생들에 의해 점거되면서 군부독재 구조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강제징집된 학생들의 귀환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연일 계속되고 유럽 인권단체들의 압력이 가해지자 강제징집된 학생들이 풀려났다. 1973년 11월13일, 파파크리스토스를 비롯해 강제징집됐던 학생들은 군복 차림으로 아테네에 돌아왔고 이들은 곧바로 산업대로 갔다. 곧이어 이곳에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산업대 교정은 해방구로 변해갔다. 학생들은 스스로의 대표를 뽑았고 31명의 학생대표들이 위원회를 구성해 파파크리스토스를 대표로 선출했다. 학생들은 식당도 만들고 의료진도 구성하고 라디오 방송사도 설치했다. 파파크리스토스가 담당한 것은 라디오 방송이었다. 이 라디오 방송은 그리스 전역에 전파를 내보냈고 교정의 스피커에 연결돼 있어 그곳에 모인 학생들에게도 울려퍼졌다. 7년간의 강요된 침묵을 깨고 공개적으로 군부독재를 비판하고 즉각 퇴진을 요구했다. 다음날부터 시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테네 주변의 시골에서는 농민들이 트랙터를 몰고 산업대로 몰려왔다. 더욱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산업대로 향했다. 자발적으로 몰려든 시민과 학생들은 산업대 주변을 완전히 메웠다.
거의 10만명의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자발적으로 슬로건을 종이와 천, 길바닥과 벽, 심지어 시내버스의 차체에도 쓰기 시작했다. “군부독재와 파시즘 철폐! 미국 추방! NATO 반대! 노동자·농부·학생은 단결하라! 빵, 교육, 자유!'” 사흘 동안 계속 자유를 전파한 파파크리스토스의 목소리는 쉬어갔다. “수업을 거부하고 나온 고등학생들과 파업을 한 노동자들을 보자 너무 신이 났다”는 그는 지금도 당시 장면을 생생히 기억하는 듯했다.
드디어 11월17일, 군부독재는 시위 중이던 인파를 해산하기 위해 무장병사들과 탱크를 동원했다. 이미 군부독재의 잔인성을 경험한 시민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한두 사람씩 자리를 떴다. 어두워지면서 아스팔트를 짓이기는 탱크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은 숨기 시작했다. 그러나 산업대 안에서는 여전히 학생들이 최후의 순간까지 맞서고 있었다. 탱크가 도착하기 전, 이미 무장해 있던 진압경찰들은 총을 쏘기 시작했고 일대에 모여 있던 시민들은 모두 흩어졌다. 남은 것은 산업대 건물과 교정에 남아 있던 학생들이었다.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의사들이 도착했다.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적십자와 교회, 심지어 외국 대사관에도 도움을 요청했지만 누구도 오지 않았다”고 디미트리스는 말했다. 잠시 뒤 탱크소리가 멈추자 교문쪽으로 뛰어나간 그가 본 것은 탱크에 의해 다리가 뭉개진 여학생이었다. 탱크는 교문을 무너뜨리고 들어왔고 교정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우리는 형제들입니다. 쏘지 마십시오!” “당신들의 자녀들이 죽어가고 있으니 거리로 나와주십시오!” 그의 절규에는 아랑곳없이 나흘간 민주화의 성지였던 산업대는 탱크에 짓밟히고 있었다. 곳곳에서 고통의 신음소리와 절망의 울부짖음이 메아리치고 거리는 죽음보다 더한 공포가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도 진압경찰에 잡혔으나 진압경찰이 다른 나이 많은 사람을 잡으려는 순간 경찰의 손을 뿌리치고 간신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이날 밤 이곳에서 체포된 학생들만 해도 700명이 넘었고 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목숨을 잃고 부상당했다.
11월17일 학생봉기 30주년이 다가오는 시점이어서 모든 언론에서 그를 찾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역시 그는 다른 외국 언론사보다는 군부독재의 암울한 시기를 함께 경험했던 한국을 잊지 않았다. 특별히 <한겨레21>에 인터뷰를 승낙한 이유다. 그가 사는 집도 우연의 일치랄까, 학생봉기의 살아 있는 현장인 아테네 산업대학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군부독재가 무너진 뒤 정치가로 변신해 지금은 국민들의 지탄의 대상이 된 ‘왕년의 학생운동가’들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는 양심’으로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저술가로, 라디오 방송의 시사프로그램 진행자로 활동하면서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일하고 있다.
지금 보이지 않는 독재와 싸운다
기성세대가 보수화되는 원인 중 하나는 과거에 집착한 삶 때문이다. 그러나 디미트리스는 30년 전의 영웅으로 사는 게 아니라 현재를 살기에 지금도 세상을 향해 할 말이 많다. “산업대의 봉기는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역사이며 다음 세대를 위해 중요한 교훈이다. 당시에 외쳤던 ‘빵, 교육, 자유’의 슬로건은 지금도 유효하다. 지금 우리는 보이지 않는 독재와 싸우고 있다. 전쟁세력과 금융독점 세력에 대항해 세계적 차원에서 투쟁하고 있다. 비록 우리가 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더 나은 세상은 가능하다고 믿는다. 우리가 투쟁하지 않은 것말고는 절대로 헛된 투쟁은 없다.”
아테네= 글 · 사진 하영식 전문위원 youngsig@teledomenet.gr

사진/ 그리스의 살아 있는 양심으로 추앙받는 학생봉기의 주역 디미트리스 파파크리스토스. 지금은 전쟁과 금융독재 세력에 맞서 싸우고 있다.
군부독재정권(훈타)의 탱크가 아테네 산업대학의 철교문을 부수고 들어온 1973년 11월17일은 그리스의 현대사를 뒤바꾼 날이었다. 7년간 그리스 국민들의 숨통을 조였던 군부독재의 압제를 깨뜨린 날이었다. 비록 그곳에서 민주를 열망하던 학생과 민중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몇달 지나지 않아 군부독재정권은 무너졌다. 지금 그리스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바로 1973년 11월17일 아테네 산업대학의 학생봉기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미국과 영국의 외교관들을 비롯해 그리스 정치가와 기업가들을 28년 동안 암살하면서 악명을 날린 ‘11월17일단’도 이날을 기념해 조직됐다. 지금도 그리스 국민들은 11월17일이 되면 당시 학생봉기의 선봉장으로, 나흘간 그리스 전역을 움직인 라디오 방송의 주역이었던 디미트리스 파파크리스토스(54)를 잊지 않고 있다.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탱크가 들어오는 공포의 현장에서 탱크를 향해 “우리는 형제들이다. 발포하지 말라!”는 외침과 더불어 “자녀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어떻게 잠들 수 있습니까? 모두 거리로 나오십시오!”라고 절규한 일은 지금도 그리스 국민 모두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1967년의 군부 쿠데타는 미국의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대령들이 일으켰다. 총선 투표일 이틀 전, 총선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반대하던 좌파의 승리가 거의 확실해지자 이를 무력으로 뒤집어놓기 위한 시도였다. 당시 아테네대학 경제학부 학생이던 파파크리스토스는 파리의 학생운동에 큰 영향을 받으면서 많은 비밀서클을 조직했다. 대학가는 군부에서 심어놓은 수많은 프락치 교수와 프락치 학생들에게 통제됐다. 당시의 군부정권은 기본인권을 완전히 무시한 가히 살인적인 통치를 했다. 쿠데타를 일으킴과 동시에 모든 민중조직들을 해산하고 6천여명의 반군부 인사들을 일시에 체포 고문한 뒤 작은 섬에 유배 보냈다. 공포에 눌려 숨조차 쉴 수 없던 학생들은 1970년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서서히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학내에서는 각종 서클이 조직됐고 영화관, 도서관, 카페, 작은 책방 등이 학생들의 독서서클로 이용됐다. 이들 광범위한 학생 비밀조직을 기반으로 먼저 학내 문제부터 터뜨려 나갔다. 학내에서 파파크리스토스가 가장 먼저 조직한 투쟁은 프락치 교수와 학생 퇴출이었다. 더불어 학생회 구성을 위한 직접선거를 요구했다. 그가 직접 관여했던 그룹은 12명의 학생들로 이뤄진 비밀조직으로 그가 대표를 맡았다.

사진/ 민주화 투쟁의 성지였던 폴리테크니오(산업대학)의 현재 모습.

사진/ 30년 전 11월17일 밤 그리스 군부독재정권이 탱크를 앞세우고 아테네 산업대로 진입해 들어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