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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독일] 교문 안으로 들어온 콘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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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0-3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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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성년자 임신과 낙태가 급증하자 베를린 몇몇 구의회가 학교안에 콘돔자판기 설치 결정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찾아가게 마련이다. 성인들은 주로 약국이나 슈퍼마켓에서 콘돔을 구입하지만, 이를 쑥스럽게 여기는 청소년들이 남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콘돔 자판기를 주로 이용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콘돔 자판기를 영화관이나 실내 스케이트장의 화장실 등에 제한해 설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최대 소비자’인 청소년들이 쉽게 구입할 수 있도록 학교 화장실에 설치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언뜻 보기에는 자명한 이 ‘시장의 법칙’은 그렇게 간단한 일은 전혀 아니다.

사진/ ‘콘돔을 쓰자’는 캠페인을 10년 넘게 진행해온 독일 에이즈협회는 최근 캠페인의 무게중심을 청소년으로 바꾸고 있다. 이들이 미래 그리고 현재의 콘돔 사용자들이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구 반발도 만만치 않아

지난 8월부터 베를린의 몇몇 구의회는 구 관내 고교 화장실에 콘돔 자판기의 설치를 결정했다. 최근 급격히 증가한 미성년자의 임신과 낙태에 대한 통계자료 및 실태보고서가 이 결정의 근거로 제시되었다. 또한 1990년대 이후 크게 줄어들었던 에이즈 감염자가 최근 청소년을 중심으로 상승하고 있는 사실도 지적되었다. 이에 대한 대처방안의 하나로 고교 내 콘돔 자판기 설치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결정에 녹색당과 사민당에서 보수적인 자유민주당과 기독교민주당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색채가 다양한 정당들이 동의했다. 따라서 학내 콘돔 자판기 설치가 곧 독일 전역에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흐름에 처음 제동을 걸고 나선 단체가 베를린 가톨릭 교구다. 콘돔 자판기의 학내 설치는 성경험이 없는 학생들에게 성관계를 보편적 현실 내지는 의무사항으로까지 느끼게 하는 심리적 압박효과를 일으킬 것이라는 강한 우려에서다. 이는 임신·에이즈 예방의 효과를 가져오기보다는 이미 미디어를 중심으로 한 성인 중심의 성문화에 노출되어 있는 청소년들에게 성관계를 조장하는 측면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게 베를린 교구청 대변인의 주장이다. 더불어 그는 콘돔 자판기의 설치보다는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성문제에 좀더 여유 있고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당 수업시간을 확대하고 활용하는 방안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독일 연방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미성년자의 임신, 특히 14살 미만 청소년들의 임신이 최근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1996년 9490건이던 미성년자의 임신이 2001년에는 1만2845건으로 크게 늘어났다. 또한 만 10~14살 청소년의 낙태가 같은 기간 내에 365건에서 761건으로 두배 가까이 증가했다. 2002년에는 그 수가 832건으로 계속 늘어났고, 이 수치가 공식 통계에 잡힌 ‘합법적 낙태’만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특히 1999년 공식 집계에 처음 등장한 만 10살 아동의 낙태가 2002년에는 20건에 이르자, 독일 교육계에서 성교육 방식과 내용의 전면적 재검토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40명의 여의사들로 구성된 ‘40인 성교육’이라는 단체는 “청소년들 사이에서 이제 성관계는 마치 책가방 안의 핸드폰처럼 돼버렸다”며 이제는 사회가 청소년의 성문제를 현실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이들은 2001년부터 자신들의 성교육 프로그램의 대상을 초등학교로 확대했다. 최근 100년 동안 청소년들의 육체적 성숙과 성관계의 경험이 평균 4, 5년 빨라졌으나 학부모나 학교 당국은 이에 부응한 조기 성교육의 필요성을 미처 깨닫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이들 의사협회의 비판이다.

성교육 프로그램 초등학교까지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베를린 일선 학교 당국들은 콘돔 자판기 설치에 대해 찬성 의사를 표하고 있다. 베를린 지역 학부모협회와 교원노조도 가톨릭 교구의 비판이 원인과 결과를 바꿔놓은 것이라며 콘돔 자판기는 청소년들의 임신과 성병을 예방하는 새로운 성교육 프로그램의 하나일 뿐임을 밝히고 있다. 학내 콘돔 자판기 설치가 현실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부모와 교사, 그리고 사회가 그들의 아이들이 자신들보다 훨씬 일찍 성숙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 문제에 새롭게 접근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듯하다.

베를린= 글 · 사진 강정수 전문위원 jskang@web.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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