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쿠르드] 차라투스트라는 쿠르드인

480
등록 : 2003-10-16 00:00 수정 :

크게 작게

주변국가들의 종교말살 정책에 위협받고 있는 예지디교…최근 쿠르드 민족종교 보존 운동 벌어져

얼마 전 필자가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 게릴라 기지를 취재했을 때(<한겨레21> 475호), 이들의 사상학교를 방문해 철학수업을 참관할 기회가 있었다. 수업시간 중 여성 게릴라들 사이에서는 철학에 관한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쿠르드어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짜라투스트라’라는 단어는 선명하게 들렸다. 여성게릴라들에게 쿠르드민족역사를 강의하던 교관 사디야는 분명히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알려진 독일철학자 니이체의 바로 그 짜라투스트라에 대해 강의하고 있었다. 첩첩산중에서 차라투스트라에 대해 강의하고 열띤 논쟁을 벌이는 사실 자체는 물론 그것도 총을 메고 다니는 게릴라들이 실존주의를 학습한다는 것이 의아스럽게 느껴졌다.

사진/ 예지드교의 성지 랄리쉬에 세워진 ‘쿱바’라고 불리는 성전. 수천년을 버텨온 예지디교의 생명력을 엿볼 수 있다.

예지디교 성지 랄리쉬로의 순례

하지만 의문은 곧 쉽게 풀렸다. 이들이 차라투스트라를 학습한 이유는 그가 쿠르드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45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쿠르드의 고대 종교 예지디교의 선지자로서 당시 페르시아에서 가르침을 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세계사에서는 차라투스트라를 페르시아인이나 바빌로니아인으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차라투스트라가 쿠르드인이란 사실은 지금까지 거의 알려진 적이 없었다. “지금도 산 밑의 모술시 부근에는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종교인 예지디교를 믿고 있는 신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있고, 심지어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예지디교의 성지까지 존재한다”는 게릴라 교관의 말은 필자의 발길을 차라투스트라의 고향이자 예지디교의 성지인 랄리쉬로 발길을 돌리게 했다. 산에서 내려와 모술시로 가는 길은 차라투스트라를 찾아가는 종교적인 순례의 길이었다. 모술시는 고대 아시리아의 수도인 ‘니느웨’이다. 도시 주위에는 수천년이 지난 성벽이 지금까지도 그 위용을 자랑하며 우뚝 서 있다. 뿐만 아니라 모술시 주위의 작은 마을들에는 고대사 교과서에서나 읽은, 한때는 거대한 제국을 이룩한 고대 아시리아 민족이나 고대 바빌로니아 민족이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공동체를 이뤄오면서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사진/ 어느 예지디 쿠르드 가족 사진. 많은 쿠르드인들은 이슬람교로 개종하면서 민족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중동 지역에서 민족을 나눌 때 가장 중요한 잣대는 종교다. 중동에서는 수많은 민족들이 이름만 남기고 사라진 경우가 허다했다. 소수민족들은 정복 민족의 종교로 개종해야 했고, 결국 민족언어나 문화까지도 잃어버리면서 정복 민족에 동화되어 갔다. 쿠르드문화센터로 나아가는 길 왼쪽에는 미군들이 포들을 맞은편에 위치한 신생국가 니느웨의 고대 성곽을 향해 조준하고 있어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문화센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는 사담 후세인의 아들이 미군 공격으로 사망한 곳으로 건물이 완전히 철거돼 집터만 덩그러니 남아 있기도 했다.

전쟁 와중에도 불구하고 문화센터에는 많은 예지디교 신자들이 분주히 드나들었다. 문화센터 대표인 살람 바쉬르(52)는 사담 후세인 체제 아래에서 예지디교를 위한 저술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6개월간의 투옥 생활과 2년 동안 레바논에서의 망명생활을 감수해야 했다. 이라크전쟁으로 사담 후세인 체제가 붕괴되면서 모술로 돌아온 그가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예지디문화센터를 열어 예지디교 연구와 출판, 포교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의 안내로 다른 두명의 예지디교 신자들과 함께 예지디교 성지인 랄리쉬로 순례의 길을 떠났다.

랄리쉬로 가면서 ‘쉐켄’이라는 작은 예지디마을을 통과했다. 이전에는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예지디 쿠르드인이었지만, 과거 이라크 정부가 이슬람교도들을 이주시키는 바람에 이슬람 인구가 거의 반을 차지하게 됐다. 랄리쉬는 거친 광야가 끝난 지점에서 시작되는 푸른 산악지역의 언덕배기에 자리잡고 있었다. 쿠르드어로 ‘랄리쉬’는 “신이 아담을 창조했다”는 의미로 신이 아담을 창조한 장소를 뜻한다. 이미 관광지로 변해버린 다른 종교의 성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막감이 흘렀고 종교적인 성지답게 잘 보존돼 있었다. 순례자들을 안내하는 일을 맡은 파키르 쿠다다는 “꿀을 탄 것처럼 물이 달다”면서 성전 옆에 흐르는 샘물을 마시도록 권하기도 했다.

성전의 깊숙한 곳에는 예지디교의 성인으로 숭배되는 쉑 아디의 관이 성스럽게 안치돼 있다. 이곳을 순례하는 신도들은 누구나 이 관 앞에서 잠시 동안 기도를 한다. 성전을 둘러보는 동안 다른 지역에서 순례차 방문한 한 가족이 눈에 띄었다. 전통적인 쿠르드 복장을 하고서 성전 벽에 입을 맞추는 모습 속에서 수천년을 버텨온 예지디교의 생명력을 엿볼 수 있었다.

명멸해간 다른 민족들처럼 터키와 시리아, 이라크, 이란 등지에 사는 많은 쿠르드인들은 민족 전통종교인 예지디교를 버리고 이슬람교로 개종하면서 민족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최근까지도 쿠르드 민족의 대다수가 살고 있는 이들 네 나라의 정부는 쿠르드 민족의 존재를 말살시키기 위해 쿠르드 민족을 이슬람교도로 개종시키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시도해왔다. 터키 정부는 지금도 예지디교를 인정하지 않고 박해하고 있다. 그 사례로 예지디교를 믿는 쿠르드인(이하 예지디 쿠르드인)의 신분증이나 여권의 종교란에 ‘예지디’ 대신에 ‘이슬람’이 기입돼 있고 그 옆에는 세개의 십자가 표시를 해두었다. 이 표시는 이슬람교의 한 분파라는 표시다. 비이슬람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어 식별이 용이하다.

터키 정부에서 예지디교를 철저하게 탄압하는 이유는 예지디교의 종교의식이 모두 쿠르드어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물론 터키에서는 예지디교가 존재하지 않으며 예지디교의 성전인 ‘쿱바’도 남아 있지 않다. 다른 세 나라도 터키의 실정과 별반 차이가 없다. 사담 후세인의 치하에서는 예지디 쿠르드인들이 구속되거나 정치적 압박으로 시달리는 사례들이 비일비재해 박해를 피해 산악지역으로 옮겨다니며 살아야 했다. 지금도 이들은 산 속의 비밀동굴에 양식을 비축해놓고 언제라도 피난할 준비를 해놓고 있다. 시리아나 이란의 경우는 정권의 비호를 받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 의해 공공연한 집단테러가 자주 발생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직도 전세계에 300만의 신자 남아

국가권력기관이 쿠르드 민족을 이슬람교로 개종시키려는 이유는 이들의 저항 의지를 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효과도 발휘하기 때문이다. 개종한 쿠르드인 가운데는 국가 권력의 민족말살 정책에 자발적으로 동조해 쿠르드 민족의 해방투쟁을 ‘무슬림 형제들 사이의 분쟁’으로 왜곡해 비판하고 있어 개종정책의 결과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2년 전 터키의 쿠르드 도시인 마르딘을 방문했을 때 이슬람교로 개종한 쿠르드 사람들이 자신들을 ‘아랍터키인’으로 스스로를 불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까지 터키에 거주하는 쿠르드 민족의 90%가 이슬람교로 개종했고 예지디교를 믿는 쿠르드 신자들의 95%가 종교 박해를 피해 독일로 이민을 떠났다. 하지만 예지디교는 사라지지 않았고 약 300만명의 예지디교 신자가 전 세계에 남아 있다. 더구나 지금은 쿠르드 게릴라들 사이에서도 이전에는 소홀했던 민족종교를 보존하려는 운동이 의식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모술= 글·사진 하영식 전문위원 youngsig@teledomenet.g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