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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홍콩] 인민폐에 대하여~ 경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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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0-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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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인들로 다시 활기 띠는 홍콩 쇼핑가…중국 정부의 자유여행 허가 조처에 힘입어

홍콩의 쇼핑명소 가운데 하나인 몽콕 거리의 ‘여인가’와 전자상가 일대. 자정이 가까운 시간임에도 거리는 대낮처럼 활기를 띠고 있다. 온갖 액세서리, 가방, 의류, 소상품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여인가 뒷골목 노천가게들은 ‘사는 사람, 파는 사람, 먹는 사람’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다. 몽콕의 밤거리를 ‘사냥’하는 그 세 부류의 사람들 중 ‘사는 사람’의 절대다수는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대륙인들이었다.

사진/ 홍콩의 유명 거리 몽콕의 ‘여인가’풍경. 여기서 물건을 사는 사람의 상당수는 중국 대륙에서 건너왔다.

사스 이후 침몰한 경제의 구세주

커다란 가방을 하나씩 손에 든 그들에게 ‘대륙보다 더 싸고 질 좋은 물건’이라고 호객을 하는 홍콩 상인들 역시 한때 중국말을 쓰는 대륙인들을 깔보고 얕잡아보던 과거의 그들이 아니었다. 광둥어와 영어밖에 쓸 줄 모르던 그들 입에서 이제는 ‘유창한’ 중국 보통어가 나오는 것도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촌스럽고 가난하다고 멸시받던 대륙인들은 이제 홍콩 거리의 ‘큰손’으로 나타나 각종 상품들을 ‘싹쓸이’하는 최대 관광객이 되었다.


어떤 상인은 “이제 홍콩 사람들은 이들에게 엎드려 절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홍콩의 행정장관 둥젠화도 얼마 전 홍콩 시내의 한 유명 쇼핑몰에 나타나 대륙 관광객들에게 ‘안부인사’를 전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들 대륙에서 온 일명 ‘싹쓸이 관광객’ 덕분에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와 기본법 23조 파동을 겪으며 한때 ‘죽은 도시’라는 오명을 썼던 홍콩이 쇼핑의 천국으로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홍콩 경제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한 데도 대륙 관광객들의 ‘주머닛돈’이 큰 구실을 했다.

사진/ 홍콩 거리 곳곳에는 인민폐환전소들이 즐비하며, 호황을 누리고 있다.
홍콩 거리가 이전과 달라진 점, 또 한 가지는 시내 곳곳의 상점과 슈퍼마켓 등에서 인민폐를 그대로 받고 있다는 것이다. 가게 앞이나 계산대 앞에 아예 커다랗게 “우리 가게는 인민폐를 받습니다”라는 팻말이 붙은 것은 보통이고 길거리 곳곳에 인민폐와 홍콩달러를 교환해주는 환전소들이 즐비하게 설치되어 있다. 대륙 관광객들은 굳이 홍콩달러로 바꾸지 않더라도 언제 어디서든 곧바로 인민폐로 물건을 살 수 있게 되었다. 불과 몇달 전까지만 해도 이런 풍경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대륙 사람들이 홍콩인들의 ‘안부인사’를 받으면서까지 ‘칙사 대접’을 받는 것은 더더욱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난 7월28일 중국 정부는 광둥성의 광저우, 선전, 주하이, 중산 등 네 도시 주민에게 개인 신분증만 가지고도 홍콩과 마카오를 여행할 수 있는 ‘개인 자유여행’을 허가했다. 그 뒤 9월1일부터는 베이징과 상하이 주민에게도 홍콩 개인 자유여행을 ‘개방’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 대륙인들은 여행사 등을 통한 단체여행이 아니고서는 개인 신분으로 홍콩과 마카오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없었다. 이들 대륙 자유여행객은 홍콩과 마카오에서 개인당 인민폐 6천위안(약 80만원)까지 쓸 수 있다.

비록 사용금액의 한정뿐 아니라 일부 발전한 몇몇 대륙도시 주민들에 한해 실시된 여행 자유화 정책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홍콩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훨씬 더 크게 나타나고 있다. <명보>를 비롯해 홍콩의 각종 언론매체들은 연일 대륙 관광객들의 ‘홍콩 상륙’ 소식을 자세히 전하면서 대륙인들이 사스 이후 침몰한 홍콩 경제의 ‘구세주’가 되고 있다고 보도한다. 통계를 보더라도,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객들이 1명당 평균 4500위안 정도의 소비를 하는 반면 대륙 여행객들은 평균 5100위안 정도의 소비를 하는 것으로 나타나 홍콩의 여행산업과 쇼핑경제를 부흥시키는 일등공신이 되고 있다.

기본법 23조 파동, 민심 달래기

그러나 홍콩 언론을 비롯해 대다수 홍콩인들은 이러한 대륙 관광객들의 홍콩 상륙을 사스 이후 침체된 경제회복의 절호의 기회로 여기면서도, 사스와 기본법 23조 파동 이후 흉흉해진 홍콩 민심을 달래기 위한 중국 중앙정부의 ‘정치구제’적 성격이 짙다고 보고 있다.

“현재 홍콩인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경제다. 경제가 예전처럼 회복되기만 한다면 기본법 23조든 뭐든 ‘정치적 문제’에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대륙 관광객들이 대거 홍콩으로 밀려들어 오면서 차츰 경제가 기지개를 켤 만하니까 그전에 23조 반대와 민주화를 외치던 사람들은 지금 다 대륙인들을 상대로 ‘장사’하느라 정신이 없다. 중앙정부는 바로 이 점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이다.”‘국가안전에 관한 입법조문조례’로 불리는 홍콩기본법 23조는 국가전복, 반란선동, 국가안전을 저해하는 위험조직 금지 등을 규정할 계획이어서 ‘홍콩판 국가보안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얼마 전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뭔가 ‘돈 되는’ 사업을 하기 위해 친구 두명과 함께 조그만 회사를 차렸다는 홍콩의 젊은 사업가 천위(陣宇)의 말이다. 그 역시 지난 7월1일 기본법 23조 제정에 반대하는 시위대열에 참여했지만 “그때 심정은 솔직히 돈벌이도 안 되고 곳곳에서 실업자들이 넘쳐나는데 정부에서 난데없이 23조를 들고 나오니까 너무 화가 나서 시위에 참여한 것이다. 당시 홍콩인들의 심정이 대부분 그랬을 것이다”라며 최근 대륙 여행객들의 자유여행 허용이나 홍콩에 대한 각종 우대정책 실시는 중앙정부의 ‘정치적 배려’일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중앙정부가 홍콩에 대한 본격적인 ‘긴급 구호대책’을 실시한 것은 지난 6월30일 ‘홍콩과 중국간 긴밀한 경제무역 협력방안’(CEPA·Closer Economic Partnership Arrangement)을 체결하면서부터다. 사실상 홍콩-대륙간 자유무역 협정이라고 할 수 있는 CEPA는 내년부터 정식 발효하게 된다. CEPA 체결 이후 대륙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홍콩인들은 중국인들과 동등한 각종 우대정책을 받는 것은 물론 홍콩-대륙간 무관세 정책이 실시되고, 대륙에서 홍콩으로 들어오는 관문인 선전은 이미 24시간 통관업무를 개시한 상태다. 더군다나 지난 7월 말과 9월 이후 대륙의 일부 주민에 한해 자유여행까지 허용하고 앞으로 그 허용대상이 더 확대될 것으로 보여 홍콩-대륙간에는 사실상 ‘일체화된 경제, 인적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CEPA 체결과 여행자유화 등으로 구체화된 홍콩에 대한 중국 중앙정부의 ‘정치·경제적 구제책’ 배경에는 또한 지난 몇년간 광둥성 내 광저우, 선전을 중심으로 한 중국 화남경제권과 홍콩간의 치열한 ‘머리싸움’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는 요소다. 1990년대 이후 광저우, 선전을 핵심으로 하는 주장 삼각주 경제가 홍콩을 능가하는 성장세를 유지하면서 기존에 홍콩이 누리던 국제자유무역 도시로서의 명성을 위협하자 홍콩과 중국 광둥성간에 “누가 용의 머리가 될 것인가”를 둘러싸고 일대 격전이 붙었던 것이다.

각종 검은 돈의 세탁 기능도

홍콩에서 발행되는 시사주간지 <아주주간>에 따르면 최근 몇년간 홍콩이 ‘병든 고양이’ 신세가 되면서 인접해 있는 광저우와 선전이 홍콩의 지위를 탈환하기 위해 피튀기는 경제전쟁을 치렀으나 중앙정부가 결국 홍콩의 손을 들어주면서 세 지역간 ‘혈투’가 어느 정도 정리되고 있다. 즉, 홍콩이 여전히 국제 금융·물류 중심도시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주장 삼각주 경제의 ‘머리’가 되고 광저우나 선전은 그 배후에서 ‘공장’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한편, CEPA 체결과 대륙인들의 홍콩·마카오 자유여행 이후 우려되고 있는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중에서도 대륙인들의 자유여행 이후 급속하게 확대된 ‘1국 2화폐’ 현상은 홍콩과 대륙정부간 가장 큰 골칫거리로 대두했다. 많은 여행객들이 불법 경로로 홍콩에 거액의 인민폐를 소지해 들어오고 있으며, 이같은 대량의 인민폐들이 홍콩으로 들어오면서 홍콩의 외환 조절능력 상실 및 대륙의 각종 ‘검은돈’ 세탁 기능까지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홍콩 거리 곳곳에 나붙어 있는 “인민폐 사용 환영”이라는 문구들에서는 당장 이러한 우려를 찾아보기 힘들다. 사스와 기본법 23조 파동으로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홍콩인들은 인민폐를 싸들고 오는 대륙인들을 향해 더없이 친절한 환대를 하고 있다. 홍콩인들은 지금 인민폐를 향해 감사의 절을 하고 있다.

홍콩= 글·사진 박현숙 전문위원 strugil1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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